• 1951년 6·25 전쟁 때 미군이 한국 공군에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李承晩 대통령은 불복한 한국군 장교를 처형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張志良(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의 회고록 내용을 바로잡는 데 앞장선 사람은 張 총장의 후배이기도 한 尹應烈(윤응렬) 전 공군작전사령관이다. 그의 이런 노력은 공군으로 하여금 미군과 李承晩 대통령이 해인사 폭격에 관여한 사실이 없고, 폭격 요청은 경찰이 한 것이며, 金英煥(김영환) 편대장이 스스로 폭격 회피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공식으로 확인하도록 하였다.

    올해 82세인 尹 장군은 일본군, 북한군, 한국 공군에 근무한 경험이 있다. 日帝 시대인 1943년 평양3中 재학중 일본의 소년항공병학교에 들어가 조종훈련을 받고 이듬해 자바 戰線에 배치되었다. 소년항공병학교 제15기 졸업생인데, 수십 명의 한국인이 동기생으로 배출되었다. 이들은 해방 뒤에 북한과 한국 공군의 창설에 참여하게 된다.

    尹應烈씨는 1945년 8·15 해방을 프놈펜에서 맞았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북한공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일제 시대 때 전투기 조종 경험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북한空軍 창설에 동참하였다고 한다. 북한空軍 창설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사람은 李活(이활). 그는 민간인 신분으로 自費를 들여 조종술을 배운 뒤 일본 해군에 촉탁신분으로 들어가 전투기를 몰았다. 소년항공병학교 출신으로는 이흥부, 박경옥씨 등이 참여하였다. 나중에 인민군 9사단장으로 가는 허민국은 일본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이다. 북한 공군사단장까지 오른 서주필은 윤흥렬씨의 항공병학교 동기생인데 6.25 전쟁 때 美軍 B-29기도 격추시킨 사람이다.

    尹應烈씨는 북한공군 장교로 근무하다가 사상검열을 받아 조종사 자격을 박탈당하자 월남하여 1948년에 육사 7기로 들어갔다. 그는 졸업 후 육군 항공대 소위로 임관하였다가 1949년 10월1일 공군이 창설되자 옮겼다.

    6·25 남침 당일 尹씨는 여의도 비행장의 당직사관이었다. 그날 소련제 야크기를 몰고 서울 등지를 폭격한 북한 공군조종사들은 거의가 일본군 조종사 출신이었다. 윤씨의 동기생인 박경옥은 야크기가 격추되면서 낙하산으로 뛰어내렸다가 사살되었다. 또 다른 동기생인 이흥부는 낙하산을 타고 着地(착지)하였으나 복부에 총상을 당하였다. 한국 공군이 그를 인수하자 李씨는 동기생인 윤응렬씨를 찾다가 숨졌다고 한다. 인천 상륙 이후 國軍이 北進하여 평양을 점령하였을 때 윤응렬씨는 평양에 가서 이흥부의 부모를 만났는데, 부모가 아들이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차마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하지 못하고 왔다고 한다.

    위의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북한에서도 日帝시대의 군대 경험자를 소중한 자원으로 생각하여 重用하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親北세력이 대한민국을 만든 主流세력을 공격하기 위하여 박정희 같은 滿軍장교들까지 親日派로 몰고 있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한때 북한정권의 제2인자였던 김영주는 김일성의 동생인데 일제 시대에 일본군의 보조원으로 근무했던 이다. 한국의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지낸 강양욱은 日帝下 도의원이었다. 그는 김일성의 외삼촌이다.

    이승만이 짠 대한민국 초대 내각엔 친일파가 한 사람도 없었으나 김일성의 初期 정권에는 많은 친일파들이 있었다. 노무현 정권 시절 금강산에서 남북간의 접촉이 있었을 때 북한의 한 고위간부가 私席에서 한국측 모 인사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요사이 남한에서 친일파를 새삼 거론하던데 이해를 할 수 없어요. 김일성 주석님은 친일파였던 사람도 뉘우치면 다 받아들여 조국 건설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이 말은 공산당에 협조한 친일파는 重用하고 반대한 친일파는 숙청하였다는 의미이다.

    남한의 철부지 친북파들은 북한정권이 친일파를 숙청하였고 이승만 정부는 하지 못하였으므로 북한정권이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는데 무식한 건지 알고도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6·25 남침 직후 서울에 들어온 북한군은 한국 공군의 창설 멤버인 李英茂 대령(육군항공대장 역임. 당시 민간인)을 납치하여 갔다. 그는 장개석의 중국군에서 조종사로 근무하면서 일본군과 싸운 사람이다. 李 대령을 납치해간 북한군은 협력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李씨가 거부하자 그를 투옥하여 옥중에서 죽게 하였다.협조적인 친일파를 重用하고 반대하는 독립파를 탄압한 셈이다. 이게 북한정권의 친일파 숙청 기준이었다.

    北은 非命橫死 내각, 南은 독립투사 내각

    이승만이 친일파를 중용했다는 미신에 대해서. 1. 소위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초대 내각 명단을 보자. 수상 金日成, 부수상(외무상 겸임) 朴憲永(처형), 부수상(산업상 겸임) 金策, 부수상 洪命熹, 내무상 朴一禹(숙청), 민족보위상 崔庸健, 재정상 崔昌益(처형), 사법상 李承燁(처형), 상업상 張時雨(처형), 교통상 朱寧夏(처형), 노동상 許成澤(처형), 국가검열상 金元鳳, 도시 경영상 李鏞, 교육상 白南雲, 문화선전상 許貞淑, 농림상 朴文圭, 보건상 李炳南, 보위성부상 김무정(처형), 최고회의 의장 許憲, 최고회의 상임위원장 金枓奉(숙청). 이상 20명 중 10명이 사형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사라졌다. 非命橫死 내각인 셈이다. 이외에 김영주(노동당 조직부장, 김일성의 동생), 홍명희(북한 부수상), 이승엽(남로당 제2인자), 장헌근(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도 日帝 때 부역하였던 親日派였다.

    2. 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본다. 대통령 李承晩(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부통령 李始榮(임시정부 재무총장), 국회의장 申翼熙(임시정부 내무총장), 대법원장 金炳魯(抗日변호사), 국무총리 李範奭(광복군 참모장), 외무장관 張澤相(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내무장관 尹致暎(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재무장관 金度演(2·8독립선언 투옥), 법무장관 李仁(抗日 변호사), 국방장관 李範奭 겸임, 문교장관 安浩相(철학교수), 농림장관 曺奉岩(공산당 간부·사형), 상공장관 任永信(독립운동, 교육가), 사회장관 錢鎭漢(抗日 노동운동가), 교통장관 閔熙植(철도교통 전문가), 체신장관 尹錫龜(교육 사회운동가), 무임소 장관 李靑天(광복군 총사령관), 무임소 장관 李允榮(抗日 기독교 목사), 국회부의장 金東元(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 국회부의장 金若水(사회주의 독립운동). 이상 19명은 거의 전부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다. 친일파는 한 사람도 없다. 反共反日을 國是로 삼다시피한 李承晩 대통령이 親日한 사람을 장관으로 기용할 리가 없었다. 다만, 親日 경찰 출신들을 중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수사하도록 했는데, 이들이 정치사찰까지 하는 바람에 독립운동가 출신들을 조사하는 사태가 일어나곤 했다.

    대체로 李承晩 내각은 독립투사 내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북한 어느 쪽이 정통성이 있느냐가 自明하게 판명된다. 정통성 안에는 法治의 요소가 크게 자리잡아야 한다. 정치적 숙청으로써 초대 각료의 반을 제거하는 체제에 정통성이 있을 수 없다. 민족사적 정통성은 민족 전체의 행복을 어느 체제가 발전시켰느냐로 판가름 낸다. 인간의 행복은 물질적 복지, 안전, 자유가 있어야 한다. 金日成 체제는 출발부터 피비린내를 내면서 민족의 재앙이 되었고 李承晩 대통령은 조국을 위하여 고투한 분들을 모았다. 그 차이가 오늘날의 남북한 차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