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림 4거리의 자취방

    83년 2학기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세미나’(의식화 학습)를 하기위해 신림4거리에 위치한 자취방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예전과 달랐다. 자취방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공기가 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미나 지도를 담당하고 있던 3학년 선배의 표정이 매우 어두웠다. 그리고 평소 같으면, 발제 준비를 제대로 해 왔는지, 아니면 과학회(科學會) 분위기가 좋았는지 등을 물으면서, 이야기 꽃을 피우던 2학년 선배들도 조용했다. 우리 1학년들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러나 분위기에 눌려 감히 왜 그런지를 묻을 수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동뜨기’ 선배를 위한 ‘소주 성찬식’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최소한 1∼2시간은 흐른 것 같았다.(그러나 나중에 따져보니, 막상 지난 시간은 불과 15분 정도였다.) 자취방 문이 열리며, 2학년 선배 1명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선배 뒤를 따라, 처음 보는 사람이 들어왔다. 그 순간 다른 2학년 선배들은 물론, 3학년 선배도 자리에 일어났다. 엉겁결에 우리 1학년들도 모두 자리에 일어났다. “그냥 편히들 앉아.” 이 말이 떨어지자, 모두 자리에 앉았다. 문득 영화 ‘대부’가 떠올랐다. 

    세미나 지도책이었던 3학년 선배가 입을 열었다. “이 선배님께서 다음 주에 ‘동뜰’ 예정이다. 그렇기에 여러분께 작별인사를 하러 오셨다.” ‘동뜬다’는 ‘시위를 주동한다’는 의미의 운동권 은어였는데, 당시 ‘동뜰’ 경우, 거의 자동적으로 징역 1년에서 2년 사이 형을 받았다. 즉 감옥가기 전에 후배들에게 인사하러 온 것이었다.

    그 선배는 준비해 온 소주병을 꺼내서 일일이 한명씩 따라 주면서 포옹했다. 누군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친구’라는 운동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친구는 멀리 갔어도. 없다 해도. 굵은 눈물 붉은 피 흐르네. 역사가 부른다. 멀고 험한 길로. 북소리 울리며, 사라져 간다.” 2학년 선배 몇 명은 흐느끼고 있었다. 운동권 성찬식이었다. 포도주 대신에 소주가, 그리고 떡 대신에 새우깡이 사용되긴 했지만….

    시위할 땐 ‘불온물’ 일체 지참 금지

    일주일 후, 우리 1학년들끼리 모여 술을 마셨다. 이날 시위의 주동자가 바로 그 성찬식의 주인공이었다. 우리는 죄의식과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날 시위는 맥없이 붕괴됐다. 시위대열은 채 5분도 버티지 못했으며 선배는 얻어맞으면서 끌려갔고 우리는 최루가스에 도망쳤다. 밤새 떡이 되도록 술을 마셨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향하는데 지하철 입구에서 검문을 받았다. 소위 ‘불온 유인물’ 검사였다. 책가방을 뒤지는 것이었다. 이날 우리는 문제가 될 만한 서적이나 유인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우연이 아니라 시위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은 데모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는 어느 경찰의 말에 “네”하고 돌아섰을 때의 그 느낌. 베드로가 새벽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3번 부인했을 때의 느낌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당시 데모는 ‘달걀로 바위치기’처럼 보였다. 왜 쓸데없이 희생하면서 데모를 하느냐, 차라리 실력을 길렀다가 나중에 개혁하면 되지 않느냐는 식의 이야기를 어른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었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데모 자체를 반대하는 어른이 거의 전무했다는 점이다. 어른들이 우려하거나 비판한 것은 데모학생의 피해, 혹은 방법론의 무모성이었지 결코 학생운동권 자체는 아니었다. 당시 당국이 학생 운동권을 좌경용공이라고 비판해도 이를 믿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약간 농담 같은 이야기인데 우리도 웃었다. 정반대의 의미에서이긴 했지만. “아니 좌경용공이라고? 그런 모욕적인 소리!. 우리가 바로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인데…”

    데모용 1회용 조직 DT "목적은 구속되는 것“

    그럼 당시 운동권은 징역살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것도 많은 경우 5분도 채 못 버티는 데모를 감행했는가? 당시 ‘동뜨기’(시위주동)는 운동권 핵심이면 반드시 치러야하는 의식(儀式)과 같은 것이었다. 앞서 이야기한 바처럼, 당시 ‘동을 뜨면’ 자동적으로 학교에서 제적되고 징역 1년에서 2년 정도를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출소한 뒤 취직도 되질 않았다. 바로 이 점을 역으로 이용했다. 감옥을 가는 의식을 통해, 기존 사회와 자신을 단절시키고, 자신을 사회혁명을 일으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또 이 의식을 통해, 후배들이 자신의 길을 쫒아 오도록 강제해 나갔던 것이다. 사실 ‘동뜨기’라는 ‘성찬식’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의식화 학습’이라는 ‘예배’는 감동 없이 끝날 가능성이 많았다.

    그렇기에 4학년이 되면, 기존 패밀리나 팀 활동을 단절시킨 뒤, DT(Demonstration Team)에 편제되어 순번을 기다리다가 ‘동뜨는’ 것이었다. DT는 데모팀으로서, 데모용 1회용 단세포 조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안당국이 DT를 구속시켜도 학생운동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아니 구속을 자양분으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DT는 원래 구속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팀으로서 이미 보안조치를 통해 다른 조직과 단절시켰기 때문에 구속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구속되지 않을 경우 황당한 것이 DT의 운명이었다.(이러한 상황이 84년 이른바 ‘유화국면’에서 발생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DT지원자 봇물군 면제되고 ‘훈장’ 달고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이 있다. 자신이 원한다고 모두가 DT에 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 DT은 2∼4명으로 이뤄지는데, 1년 시위계획에서 필요한 DT은 83년까지만 하더라도 학교당 20팀을 넘기 힘들었다. 따라서 80명을 소화하기 힘들었으며, 이 80명 안에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 DT는 1년 계획으로 1월에서 2월 사이에 구성되는데, 여기에 끼기 위해서 온갖 빽(?)이 동원되기조차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잉공급’은 훗날 ‘농성투쟁’과 ‘조직사건’으로 대량 구속사태가 발생하면서 해결된다. 아무튼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지원자가 넘쳐흘렀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당시 실형 6개월 이상을 선고받으면 군대가 면제됐다. 이 점도 ‘동뜨기’ 지원자를 늘리는 데 크게 일조했다. 직업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상 감옥경력은 흠집이 아니라 훈장이었다. 그런데 군대 면제 혜택까지 받게 되다니?! 2년 6개월 군대 가는 대신에 1년 교도소 갔다 오는 것이 낫다는 계산이 나왔던 것이었다. 훗날 이러한 혜택(?)이 사라지면서 군대를 안가기 위해 손가락을 절단하는 일이 조직적(?)으로 벌어지기도 했다. 이 역시 차후에 이야기하겠다.

    피를 부르는 ‘직업 혁명가 코스’

    나는 여름방학 합숙이 끝난 뒤 좌익 이론에 깊숙이 빠져갔다. 골방에 처박혀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적 호기심의 충족에 행복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반대로 긴장감이 떨어지고 있었다. 바로 이런 시점에 때맞춰 ‘동뜨기’ 의식이 진행되었다. 이 ‘동뜨기’ 의식은 진짜 피를 부르기도 했다. 11월7일 서울대 도서관 6층에서 시위를 주도하던 황정아(토목공학 4) 학생이 추락해 사망한 사건이 대표적이었다. 제2편에서 이야기한 있는 이른바 ‘고공’(高空) 시위를 벌이다가 떨어져서 죽은 사건이었다. “정말 죽을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아무튼 2학기 후반이 되면서, 나의 진로가 정해지기 시작했다. 2학년부터는 선배가 돼서 후배를 포섭 교육시키고, 3학년이 되면 RP(의식화 재생산) 책임자 역할에 몰두하다가 4학년이 되면 DT에 편제되어 데모를 주동한 뒤 상급학교(교도소)에서 1년 내지 1년 6개월 쯤 있다가 나와서 직업혁명가가 되는 당시 운동권 정통 코스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진로에 다소(?) 변화를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83년 12월6일 이른바 ‘유화조치’가 발표된 것이었다. 제적생 복학이 허용되고, 경찰이 교내에서 철수한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1학년에 불과했던 나는 당시만 하더라도 그러한 논쟁을 잘 알지 못했다.

    그 해 겨울 나에게 가장 큰 사건은 구로공단에서 ‘공활’(工活)이었다. 여름에 ‘농활’(農活)을 가지 않은 대신에, 겨울에 ‘공활’을 하기로 결심했다. 공활이란 공장에 들어가서 노동자 생활을 체험해 보는 것이었다. 나중에 이른바 ‘위장취업’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대학생 출신이 공장에 취직하는 것이 어려워졌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취업 자체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