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악명이 높은 것은 '비둘기 고문'이었습니다"

    북한 회령시 보안서 지하 독방에서 고문을 당했던 탈북자 정광일씨는 27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북한 인권유린 증언대회'에서 "북한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문을 당했다"며 무겁게 입을 뗐다. 그는 2004년 4월 한국에 들어왔다. 정씨는 '간첩행위'라는 죄목으로 지하독방에서 고문을 당한 후 2000년부터 2003년까지 요덕정치범 수용소에서 3년간 강제노역을 했다.

    '비둘기 고문'이란 수갑을 채운 채 팔은 격자 모양으로 한 곳에 묶어, 설 수도 앉을 수도 없는 상태를 만드는 고문이다. 그는 "이 고문을 받으면 어깨 근육은 하루 종일 마비되고 뼈는 가슴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아서 전신이 마비된다"고 회고했다.

    정씨는 지하감옥에 들어가자마자 5X5cm 두꺼운 곤봉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그 탓에 그의 뒷머리가 깨져 아직도 세군데에 흉터가 있다. 또 탈북 후에 중국에서 치과치료를 받았지만 북한에서 당한 고문으로 치아를 모두 잃은 채 4년간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 ▲ <span style=탈북자 출신 정성산 감독이 지난 2006년 제작한 뮤지컬 '요덕스토리' 중 일부ⓒ 연합뉴스" title="▲ 탈북자 출신 정성산 감독이 지난 2006년 제작한 뮤지컬 '요덕스토리' 중 일부ⓒ 연합뉴스">
    탈북자 출신 정성산 감독이 지난 2006년 제작한 뮤지컬 '요덕스토리' 중 일부ⓒ 연합뉴스

    정씨는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도 허용하지 않고 그대로 팬티가 버려지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며 "지하감옥에 두 사람이 더 투옥됐었지만 결국 모두 죽었다"고 했다. 75kg였던 그의 몸무게는 고문을 당하는 동안 38kg까지 줄었다고 한다.

    정씨는 "죄수들 식사는 거의 쓰레기로 만들었다"고 했다. 음식은 대부분 보안서 요원 식사에서 남겨진 것이었는데 그나마도 이틀에 한번씩 주어졌다고 한다. 정씨는 '운좋게' 고문을 버텨 살아났지만 2000년, 징역 3년을 더 보내야 하는 '요덕 수용소'로 보내졌다. 수용소 생활 역시 그에게 악몽으로 남아있다.

    정씨는 "요덕에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죄수를 죽이는 방법은 '굶기는 것'"으로 "수용소 내에서는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어떨 때는 보안요원이 고의적으로 수용자를 죽이려고 어려운 일을 할당해 음식을 주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는 그 당시를 '정글의 법칙'이라고 회고하며 몸서리쳤다. "아버지가 자신이 살려고 아들의 음식을 훔치는 장소"이라고도 표현했다.

    그는 요덕수용소에서 죽어나간 사람을 언급하며 "관이 강 옆에 묻히면 구더기와 파리가 장마때 시체 묻힌 장소 도처에 생긴다"고 말했다. 정씨는 "비록 남한에서 안전하게 있더라도 나는 여전히 요덕수용소에 내던져지는 악몽을 계속 꾸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