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반의 책임: 일진회의 두 인물

    한국병탄은 일본의 숙원사업이었다. 일본이 이 숙원사업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들의 주도면밀한 계획과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진회와 같이 병탄을 앞장서서 지지하는 한국인 동조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거나 또는 상당한 대가를 치렀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병탄의 절반의 책임은 우리의 몫이다. 일그러진 과거의 현재 속에서 역사적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일진회는 일본의 한국병탄을 ‘한국인의 운동’으로 위장하는 데 앞장선 “매국의 앞잡이” 집단이었다. 이 단체는 러일전쟁 발발 직 후인 1904년 8월에 결성됐다. 유학주(兪鶴柱), 홍긍섭(洪肯燮) 등 독립협회 관계자와 한때 만민공동회의 회장이었던 윤시병(尹始炳)등이 참여했으나 실질적인 실력자는 이 단체의 결성을 주도한 송병준(宋秉畯)과 이용구(李容九)였다.

    기생의 아들 송병준, 임오군란 전부터 '친일파'

    송병준(1858-1925)은 함경남도 장진출신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출생과 성장 배경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기생의 몸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구박과 천대 속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분명치 않은 과정을 거쳐 민영환의 눈에 띠어 그의 식객으로 있다가 1871년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훈련원 판관, 오위도총부 서사,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당시 송병준은 접견사의 수행원으로 참여했고, 이 기회에 그는 처음으로 일본인과 접촉을 가지게 됐다. 특히 거물급 군납업자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와 밀착되면서 친일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 ▲ 일본의 백작 작위를 받은 송병준.
    ▲ 일본의 백작 작위를 받은 송병준.

    점포도 집도 습격받아 불타

    송병준은 오쿠라의 지원을 받아 부산에 상관(商館)을 열고 운영하면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조된 반일분위기 속에서 부산 주민의 습격을 받아 그의 상관도 불타버렸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서울의 그의 집이 소실됐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도피한 것을 보면, 당시에 이미 친일파로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1884년 갑신정변 후에는 망명중인 김옥균을 암살하려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오히려 그의 감화를 받고 추종자가 됐다. 1886년 귀국 후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영환의 도움으로 출옥한 이래 흥해 군수, 양지 현감 등을 지냈다. 그러나 정부의 체포령이 다시 내려지자 일본으로 도망하여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次郞)라는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고 10년 가까이 일본을 전전하면서 살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 제12사단 병참감인 오타니 기쿠죠(大谷喜久藏) 소장의 통역관으로 일본군과 함께 만주까지 종군했다. 그 후 서울에 돌아와 정치 활동에 끼어들었다. 일진회 일지(日誌)에 의하면 송병준은 8월 18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고, 이틀 후인 20일 이를 다시 일진회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동학 참여했던 이용구, 일본서 '대동합방론'에 심취

    일진회 회장으로 ‘병합청원’을 간청한 이용구(1868-1912)는 항일의병장에서 병탄 첨병의 주구로 전락한 인물이다. 그는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생활이 어려워 충청도 직산, 경기도 안성 등을 전전했다. 이용구는 13살 때 부친을 잃고, 모친을 도와 농사에 종사했으나 겨우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해온 이용구는 23살 때 동학에 입교했다. 그는 손병희와 더불어 교주 최시형의 ‘고제(高弟)’로 주목을 받았다. 동학봉기 당시 전봉준을 도와 투쟁에 가담했다가, 1894년 정부군에 체포되었고 사형은 면했으나 견디기 어려운 형벌을 받았다. 최시형을 이은 3대 교주 손병희와 함께 일본으로 외유할 당시 이용구는 처음으로 다루이 도키치의 <대동합방론>을 접할 수 있었다. 이용구의 아들 오히가시 구니오(大東國男)는 자신의 아버지는 “이 책으로부터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러일전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 이용구는 손병희와 별도로 홀로 귀국하여 진보회(進步會)라는 정치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진보회가 비록 정치단체이기는 하지만 이용구가 동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광범위한 지방조직을 쉽게 구축할 수 있었다.

    송병준, 이용구 설득 전국조직을 통합

    송병준의 유신회는 대중적 기반이나 지방조직에서 대단히 취약했다. 이러한 취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송병준은 동학의 조직배경을 가지고 있고 친일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한 진보회(進步會)와의 통합을 모색했다. 송병준은 진보회의 책임자인 이용구(李容九)를 설득했다. 동학 봉기 당시 처절한 고통을 직접 체험했고, 정부의 끈질긴 탄압을 받고 있던 이 용구는 송병준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강인하지 못했다. 이용구는 1904년 말 진보회의 취지와 목적이 일진회와 동일하므로 일진회와 통합한다는 것을 각 지방 조직에 알리고 통합 성명을 발표했다. 이용구가 회장에 추대됐다. 일진회는 비로써 광범위한 지방조직을 가진 대중조직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일진회 "외교권을 일본에 맡기는 것이 독립의 길"

  • ▲ 일진회 회장 이용구.
    ▲ 일진회 회장 이용구.

    일진회는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고 도탄에 빠져 있는 민중을 구제하여 “한 걸음이라도 개명의 영역으로 전진[一進]하여 국가의 면목을 새롭게 유신한다”는 것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친일 색채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단체를 조직하면서 일진회가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헌병대장 다카야마 이츠아키(高山逸明)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이 집단의 진로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한일 두 나라의 역사적․문화적․지리적 관계를 “입술과 이[脣齒]”와 같이 밀접한 관계라고 강조하며 시작되는 이 공식문서는, 일본이 “도탄에 빠진 (한국) 인민의 근심과 고통을 구제해 주고, 한일협약을 통해서 끊임없이 개선과 실행의 충고를 베풀어주시니, 우리 인민도 비록 버러지에 가깝지만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여 일진회를 결성하고 귀하의 나라를 향하여 감사의 뜻을 표시합니다.”라고 끝을 맺고 있다. 일진회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실제로 일진회는 러일전쟁 당시 이용구와 송병준의 지휘 아래 한국과 만주에 있던 일본군에게 여러 가지로 협력했다. 뿐만 아니라 1905년 을사강제조약이 민족의 절박한 문제로 대두하여 국론이 분분할 때, 일진회는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정부에 위임하는 것이 국가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영원히 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지지하며, 한국정부가 조약 조인에 응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파산상태의 일진회를 살려 활용 합시다"
     
    우치다의 일진회 조종
    통감의 특명에 따라 한국내의 친일, 배일 단체의 성격과 구성원, 그리고 현상을 면밀히 조사해 온 우치다는 일진회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는 일진회의 친일적 성격, 이용구와 송병준의 성향과 과거의 편력, 일진회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재정적 어려움 등을 면밀히 조사하여 통감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조종과 활용을 “심각하게 고려”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건의했다. 그는 같은 내용을 도쿄의 스기야마 시게무라에게도 전했다. 

    우치다의 조사에 의하면 일진회는 1906년 8월에 이르러 상당히 어려운 국면에 빠져있었다. 먼저 이용구와 함께 실질적으로 일진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송병준이 옥새(玉璽)를 위조하여 이권을 일본에 넘겨준 이일식(李逸植) 은닉죄로 경무청에 구속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용구가 동학의 교주인 손병희로부터 동학에서 출교(黜敎) 처분을 당하게 되면서 동학을 근거로 한 지방조직이 붕괴되어 많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가 공사관의 업무를 통감부에 보고하면서 “일진회는 무뢰한의 집회 단체이므로 장래의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해산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하여 1906년 9월에 이르러 일진회는 해산 직전의 위기까지 몰리게 되었다.

    "영원한 친일단체 만들 절호의 기회"

    그러나 우치다는 한국 유일의 가장 큰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해산시킬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송병준을 석방시켜 보다 적극적인 친일단체로 육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통감 이토에게 제출한
    <송병준 수감의 전말과 일진회의 현황에 관한 조사 보고서>에서, 우치다는 일진회가 자칭 ‘일백만 회원’을 갖고 있는 한국에서 가장 큰 정치 단체라는 점, 한국에서 활동하는 가장 적극적인 친일 단체라는 점, 재정적으로는 대단히 어려운 상태에 있다는 것을 등을 지적했다. 그리고 송병준의 구속은 “일진회의 머리에 떨어진 큰 철퇴와 같은 것”으로서 사실상 와해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점을 보고했다. 또한 송병준과 이용구의 관계는, “송의 단점은 이의 장점이고, 이의 단점은 송의 장점”으로서 “두 사람이지만 한사람”인 ‘한 쌍’이기 때문에, 송병준이 없는 일진회는 일본에게 쓸모없는 ‘무용지물’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송병준의 석방과 일진회에 대한 재정적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내우외환의 어려움” 속에 있는 일진회를 소생시키는 것이 이를 “영원한 친일단체”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충분히 활용할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우치다, 이용구에 '일한연방' 타진하자 "나의 뜻"

    이토에게 보고서를 제출한 우치다는 일진회를 이끌고 있는 이용구의 의지와 결의를 직접 타진했다. 우치다는 이용구를 자신의 관사로 초대하여 송병준이 수감됨으로써 일진회가 받고 있는 어려움에 대하여 동정의 뜻을 표시한 후, 이용구의 심중을 다음과 같이 떠보았다.

    “만일 일진회가 지향하는 노선이 본인의 소견과 일치한다면 송병준 군을 석방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 용구는 몹시 기뻤다. 우치다에게 반문했다.
    “백 만인이 넘는 일진회의 회원은 송군과 나를 신뢰하고 있어 무엇이든지 명령하는 대로 복종합니다. 그러므로 송군과 나의 의견은 곧 일진회의 의견이고, 일진회의 행동은 곧 송군과 나의 행동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귀하가 추구하는 방향이란 어떤 것입니까?”
    우치다가 자신의 복안을 밝혔다.
    “일진회의 목적이 4대 강령에 있다고 하겠으나 천하의 형세는 변화무쌍하여 반드시 이러한 원칙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일한연방(日韓聯邦)을 만드는 날이 오면 귀하는 회원들과 함께 이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보증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평소부터 품어 온 뜻도 역시 단방(丹邦-大東合邦論의 저자인 다루이 도키치의 호)의 대동합방(大東合邦)에 있습니다.”
     
       이는 일진회가 우치다의 뜻에 따르겠다는 뜻이다. 그 징표로 “일진회는 총무원회의 결의에 따라 귀하를 본회의 고문으로 추대한다”는 내용을 문서로 통지했다. 일진회는 우치다의 손아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다케다 한시, 일진회를 만취시키다

  • ▲ 우치다 료헤이, 다케다 한시, 이용구(왼쪽부터).
    ▲ 우치다 료헤이, 다케다 한시, 이용구(왼쪽부터).

    송병준이 석방되면서 일진회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우치다는 일진회를 조정하기 위하여 동학봉기 당시 텐유쿄(天佑俠) 회원으로 한국에서 함께 활동했고, 또한 명성황후 시해에도 깊숙이 가담했던 현성사(顯聖寺) 주지 다케다 한시를 이용구의 상대역으로 선택했다. 우치다가 다케다 한시를 염두에 둔 것은 두 사람 다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 대화가 쉽게 될 수 있고, 또한 두 사람 모두 ‘두주불사’의 주량으로 쉽게 가까워 질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다케다는 우치다의 당부를 쾌히 승낙하고, 12월 말 다시 산을 내려와 한국으로 향했다.

    일진회는 다케다 한시를 ‘사빈(師賓)’으로 맞이했다. 다케다의 표현대로 그는 “인생 최대의 사업”이라 할 수 있는 “일한합방운동”에 뛰어 들었다. “급속도로 가까워 진” 두 사람의 관계는, 이용구의 아들 오히가시 구니오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쇠붙이도 끊을 정도의 굳은[斷金] 관계를 맺고, 일한합방을 이끌어가는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 후 우치다의 보고서나 건의서와 같은 모든 문건은 문필가이기도 했던 다케다의 손을 거쳤다. 그리고 일진회가 한국 황제와 일본의 요로에 제출한 ‘일한합방상주문’도 그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송병준 석방...매달 2천엔 지원

    재정적 지원과 일진회의 입각
    송병준을 석방시킨 후 우치다는 일진회의 재건을 위해 재정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또한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해 줌으로써 일진회에 대한 우치다의 영향력은 더욱 굳어졌다.

    이토에게 보고한 것과 같이 1905년 말부터 어려움이 겹치기 시작한 일진회의 재정적 상황은 1906년 여름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되었다. 이러한 재정적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던 우치다는 통감 이토에게 일진회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재정적 지원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당부했다. 그 결과 일진회는 통감부로부터 1907년 1월부터 매달 2,000엔(円)의 보조금을 반년동안 지원받을 수 있게 됐다.

    일본정부 수뇌 방문...친일 다짐

    이와 같은 통감부의 보조금이 일진회의 재정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충분치는 않았다. 일진회의 보다 근본적인 재정적 안정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우치다는 1907년 2월 송병준을 대동하고 도쿄로 갔다. 스기야마의 주선으로 우치다와 송병준은 일본의 정계와 군부의 중심인물인 야마카타 아리토모, 카츠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다타 등을 만날 수 있었다. 우치다와 송병준은 그들에게 차례로 일진회의 성격, 목적, 경력, 일본의 한국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현재 당면하고 있는 재정난을 자세히 설명하고 협조를 간청했다. 테라우치는 “만일 내가 도울 것이 있다면 기꺼이 돕겠다”고 송병준에게 약속했고, 야마카타는 “백만의 회원을 움직일 때의 그 어려움이 어떻다는 것은 가히 짐작할 수 있으니, 인내와 노력으로써 성과를 거두기 바란다”고 격려했다.

    일본 육군성, 일진회에 10만엔 전달

    일본정계의 중심인물들을 차례로 방문한 후, 우치다는 창립 이래 일진회의 수입과 지출의 내역을 상세히 기록한 <일진회재정전말서(一進會財政顚末書)>를 작성하여 이토 통감과, 도쿄의 야마카타, 카츠라, 테라우치에게 보고하면서 보다 지속적인 재정적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스기야마 시게마루에게 도쿄에서의 역할을 당부했다. 그 결과 5월에 육군성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령관을 통하여 ‘기밀비’라는 명목으로 10만 엔의 보조금이 일진회에 일시에 전달됐다.

    일진회를 보조하는 ‘기밀비’가 왜 통감부를 통하지 않고 군부를 거쳐 전달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우치다의 일진회 활용론에 일본의 정권과 군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야마카타, 카츠라, 테라우치 등이 승인하고 있음을 뜻하고 있다. 그들은 그 후 한국에서 우치다와 일진회의 활동을 직간접으로 후원한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선악 구별없이 일본에 복종하는 일진회...만사 해결"

    ‘거금’을 확보한 이용구와 송병준의 태도는 보다 적극적인 친일 성향을 나타냈다. 이제 우치다는 일진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절대적 지위에 이르렀다. 재정문제를 해결한 직후 우치다가 스기야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진회는 “일의 시비와 선악과 관계없이 일본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빠지게 됐다”고 설명하고, 앞으로 “일진회를 조종하여 만사를 해결하도록 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일진회가 완전히 자신의 수중에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우치다, 송병준 입각시키는데 성공

    통감부와 군부를 통하여 일진회의 재원을 확보한 뒤 우치다가 시도한 것은 일진회를 한국정부의 내각에 직접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이토는 박제순 내각으로 하여금 일진회와 연립 내각을 구성하게 한다는 우치다의 방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박제순 내각이 총사직하고 이완용 내각이 등장할 때 이용구나 송병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내각에 입각시키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는 우치다의 제안은 수용했다. 5월 22일 새로 구성된 이완용 내각에 송병준이 농상공부 대신으로 입각했다. 이토가 일진회의 송병준을 내각에 입각시킨 것은 한편으로는 송병준으로 하여금 이완용을 견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친일’을 위한 두 사람의 충성 경쟁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었다.

    일진회의 실권을 막후에서 완전히 장악하고 그 단체를 통하여 내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작업을 끝낸 우치다는 ‘정한’ 프로젝트의 핵심인 ‘한국인에 의한 합방운동’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 첫 작업이 고종황제의 폐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