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고은씨 ⓒ연합뉴스 
    ▲ 소설가 고은씨 ⓒ연합뉴스 

    대한민국의 이념적 내전(內戰)을 「문화전쟁(culture war)」으로 표현한다면 그 한 가운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 : 民藝總)이 있다. 민예총(民藝總)은 소위 진보(進步)진영 예술인의 결집체로 불린다.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주한미군을 규탄하고, 이른바 「자주적 통일」을 외치는 현장엔 민예총(民藝總)이 있어왔다.
     
     민예총(民藝總) 소속의 놀이패, 소리꾼, 춤꾼, 시인들은 격한 구호(口號)로만 흐를지 모르는 정치적 집회와 시위의 분위기를 띄워주는 이들이다. 딱딱한 시위를 콘서트 형식으로 바꾸어 대중의 참여를 넓히고, 자연스럽게 의식화(意識化)를 유도한다. 민예총(民藝總)의 대표적 작곡가 윤민석 류(類)의 「세련된」 운동권 가요를 연달아 부르며 간간이 연사들 주장을 듣다보면, 주한미군은 철거의 대상이고, 북한정권(政權)은 사랑할 대상이요, 북한동포의 고통은 잊게 된다. 그야말로 환각제(幻覺劑)다. 이런 면에서 좌파성향 집회와 시위의 주요(主要) 선동수단은 음악, 그림, 율동 등 문화(文化)요, 연설과 성토는 보조적이다. 대한민국이 좌경화, 친북화, 반미화되고 있다면 그 한 가운데 민예총(民藝總)과 같은 문화전사(文化戰士)들이 뛰고 있다.
     
     민예총(民藝總)은 재야(在野)의 비판세력으로 출범했지만, 金大中·盧武鉉 집권 이후 문화계 제도권 안으로 집중적 진출을 꾀한다. 민예총(民藝總)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藝總): 藝總)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민예총(民藝總)과 예총(藝總)은 金大中, 盧武鉉 정권 시절 정부의 지원액(支援額) 자체가 달라졌다. 2008년 10월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03년 민예총(民藝總) 지원액은 예총(藝總)의 92%였으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 : 藝術委)가 출범한 2005년 162.9%, 2006년은 거의 2배인 191.3%였다.
     
     10만 명 회원을 보유한 민예총(民藝總)과 38만 명 회원을 보유한 예총(藝總)에 대한 2006년 지원액 차이는 100:191.3이다. 두 단체 회원 수가 같다고 가정하면, 민예총(民藝總)은 예총보다 727배의 지원을 더 받은 것이 된다. 좌파정권 당시 이른바 「코드지원」이 이뤄졌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좌파정권 당시 문화예술계 굵직한 요직에도 민예총(民藝總) 인사들이 포진했다. 민족문학작가회 현기영 이사장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2003년 2월 임명됐다. 이어 국립현대미술관장, 국립국악원장에도 민예총(民藝總) 출신인 김윤수·김철호 씨가 같은 해 9월 각각 임명됐다. 문화예술계의 가장 큰 돈줄로 불리는 예술위(藝術委) 역시 11명 위원 중 예총(藝總)소속 인사는 두 명뿐일 정도로 편중 현상을 보였다.
     
     민예총(民藝總)의 지난 20여년 활동상을 개괄하면, 민중(民衆)과 민족(民族)과 통일(統一)로 요약된다. 구체적으로 촉각을 곤두세워 온 분야는 국가보안법폐지, 한미FTA저지, 평택미군기지 확장·이전 반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등 좌파적 이슈들이었다. 실제 민예총(民藝總)은 △국보법폐지 국민연대 참가단체이며, △한미(韓美)FTA저지범국본, △탄핵무효범국민행동, △광우병국민대책회의 등에 참여했었다.
     
     민예총(民藝總)이 가장 최근에 발간한 2008년 자료집에 실린 2007년 활동상을 보면 이 단체는 여타 좌파단체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풍물, 굿 등 이른바 민족예술이라는 수단을 동원해 좌파의 스피커 역할을 담당해왔다. 단양지역 민예총(民藝總)의 1월30일 곡계골 『한국전쟁 시 국군으로부터 학살(虐殺)을 당한 민중들을 위한 추모굿』등 노골적인 반(反)대한민국 선동행위도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민예총(民藝總)의 「민족주의」는 「반미주의」라는 표현이 더 정확해 보인다. 민예총(民藝總)은 반미(反美)를 절대적 가치로 만들어 조직의 역량을 동원해왔다. 2002년에는 효순이·미선이 사건, 2003년 이라크파병 반대, 2005~2006년 평택범대위 반미소요로 이어지는 일련의 이슈에서 목소리를 높여왔다.
     
     예컨대 평택범대위 반미소요 당시인 2006년 2월11일 민예총(民藝總) 소속 50여명의 문화예술인들은 【들사람들】이라는 조직을 결성, 대추리 내 철거예정 건물에 벽화(壁畵), 벽시(壁詩), 설치예술품 등을 만들었다. 이들 작품(?)은 소위 『땅을 일구고 지켜온 주민들의 얼굴과 평화의 의미가 담긴 것』이라 주장됐지만, 국방부 강제집행이 이뤄지자 『국방부가 평화예술품을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규탄의 도구가 활용된다. 민예총(民藝總)은 이후 대추리 일대를 『전쟁과 국가폭력을 반대하는 평화예술마을』로 명명하며 반전평화(反戰平和)와 미군철수(美軍撤收)를 상징하는 메카처럼 꾸며갔다. 토요일 대추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비닐하우스 콘서트」가 계속됐다. 토요일이면 민예총(民藝總)을 비롯해 전국의 반미단체와 풍물패가 몰려들었다. 같은 해 3월26일 「3.25 대추리 평화문예축전」과 같은 중량급 행사도 개최됐다.
     
     민예총(民藝總)의 반미(反美) 프로퍼갠더(propaganda)는 맹목적이다. 예컨대 2002년 3월31일 발표한 성명은 『미국은 「악(惡)의 축」을 꾸며낸 「악(惡)의 축」이며, 세계평화에 진정한 위협이 되는 장본 국가임이 분명하다』며 북한정권을 감싸면서 『미국의 일방적 패권주의가 바로 세계평화의 적』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해 12월14일 성명은 한미SOFA에 대해 『현대판 노비문서(奴婢文書)를 방불케 하는 협정』, 『이는 결코 주권을 가진 국가 간에 맺은 협정으로 볼 수 없다』,『다른 나라에서도 우리나라에서와 같은 횡포(橫暴)를 되풀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예총(民藝總)은 맹렬한 반미와 달리 북한정권(北韓政權)은 포용과 통일의 대상으로 여겨왔다. 민예총(民藝總)이 재일(在日) 조총련 계열과 잦은 회합을 가진 대목은 눈 여겨볼만 하다. 이미 93년 10월 일본에서 최초의 남북미술교류인 코리아통일미술전이 열었고, 10년 후인 2003년 8월6일 서울 인사동 물파 아트센타에서는 남북, 재일동포 서예인들이 공동전시한 「민족서예교류전」이 개막했다. 이 행사엔 조총련 계열 서예가 21명이 직접 한국을 방문했다.
     
     민예총의 이른바 남북교류는 6.15선언실천으로 이어졌다. 2005년 1월31일 6.15선언실천을 위해 북한정권과 남한, 해외의 단체가 결성한 「6.15선언실천남측위원회」에는 민예총(民藝總) 김용태 회장이 공동대표로 올라가 있다. 金회장은 금강산 등지에서 이뤄지는 남북교류 행사에도 자주 이름이 오르내린다. 2007년 5월31일에는 민예총(民藝總) 주도로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문예본부(이하 6.15문예본부)」도 출범했다.
     
     송두율, 강정구, 한총련 등 민예총(民藝總)이 옹호해 온 인물과 단체를 살펴보면, 이 단체의 이념적 스탠스가 명확해진다. 예컨대 민예총(民藝總)은 같은 민예총(民藝總) 회원인 작곡가 윤민석氏의 공안사건 연루 시마다 이를 비호하는 활동을 벌였다. 윤민석은 90년대 『수령님께 드리는 충성의 노래』, 『金日成 대원수는 인류의 태양』등 북한정권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었고, 이후에도 『fucking U.S.A.』, 『또라이 부시』,『주한미군에게 고함』 등 반미가요를 제작, 유포시켜온 인물이다. 尹씨의 2004년 『사는 게 힘들다 느낄 땐 평양에 가보세요...돈으로 사고 팔 수 없는 그런 인정(人情)이 있죠』라는 노래를 보면 이른바 민족예술인들의 맹목적 반미와 친북 성향에 당혹감마저 느껴진다.
     
     6.25남침의 전범(戰犯)인 김일성에 대한 옹호는 다른 민예총 문화예술인들의 주장에도 드러난다. 민예총(民藝總) 출범을 이끌고 이후 대표를 맡았던 황석영은 밀입북(密入北) 후 「노둣돌」이라는 잡지의 1992년 창간호 인터뷰에서 『金日成은 어쨌든 사상의 차이는 도외시하더라도 두 번이나 세계 최강의 외세(外勢)와 맞서 싸웠다』며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중이 소박하게 떠올렸던 여러 위인들 을지문덕, 이순신, 세종대왕, 이율곡, 정약용, 전봉준, 김구 등등처럼 위인의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민예총(民藝總)은 같은 민족주의(?) 성향의 재독(在獨) 작곡가 윤이상(작고)을 줄기차게 추모·홍보해왔다. 95년 11월4일 사망한 윤이상은 67년 「동백림 사건」이외에도 죽는 날까지 북한을 오가며 친북(親北)성향 단체에서 활동해왔다. 윤이상의 실체는 92년 「오길남 간첩사건」으로 다시 확인됐다. 당시 국가기관은 윤이상을 『북한의 문화공작원』으로 분석했었다. 윤이상은 북한에서 『애국자』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북한의 「영원한 추억」이란 책자에는 윤이상이 썼다는 편지도 수록돼 있다. 윤이상의 편지는 『우리 력사 상 최대의 령도자이신 주석님의 뜻을 더욱 칭송하여 하루빨리 통일의 앞길을 매진할 것을 확신합니다』는 등의 내용으로 돼 있다.
     
     민예총(民藝總) 소속 문화예술인들은 이른바 빨치산 추모행사에도 참석했다. 2005년 5월29일 전라북도 회문산 기슭 청소년수련원에서 열린 소위 「남녘 통일애국열사 추모제」라는 명칭의 행사는 6.25당시 빨치산 투쟁정신을 이어받아 美제국주의를 몰아낼 것을 다짐하는 자리였다. 민예총(民藝總) 거창지부 한대수氏는 일장기(日章旗)와 성조기(星條旗)를 불태우는 씻김굿에 나섰고, 민예총(民藝總) 소속인 전북작가회의 문병학 시인은 『천하에 못된 짓하는 미(美) 제국주의 양키놈 몰아내고 저 회문산 자락 구비 구비 깃든 가신님들 앞에 통일조국(統一祖國)을 안겨 드리겠다』고 노래했다. 당시 행사는 『해방 60돌, 당(黨) 창건 60돌, 6.15 5돌인 올해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북으로 간다. 통일은 다 됐다』는 등의 구호가 난무했다. 여기서 당(黨)은 물론 조선로동당이다.
     
     민예총(民藝總)에게 국가보안법은 응당 철폐(撤廢)의 대상이다. 민예총(民藝總)은 이미 91년 2월7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학술, 언론, 출판, 문화예술인 공동결의」 성명을 발표했고, 이후에는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라는 좌파연대체(連帶體)에 참가해 국보법철폐의 선봉에 서왔다. 춤, 노래, 그림을 동원해 국보법폐지 집회의 분위기를 띄우는 것도 민예총(民藝總) 몫이었다. 정권교체 이후인 2008년에는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 구성집단 중 하나로서 선동과 결집의 한 가운데 섰다.
     
     민예총(民藝總) 탄생을 주도한 시인 신경림은 출범 당시 「민예총(民藝總) 탄생의 의미」라는 글에서 「민예총(民藝總)이 앞으로 할 일」로 『조국의 통일(統一)은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이며 민예총(民藝總)은 남북 민중(民衆)이 진정으로 만나고 화합하는 마당이 되어야 할 남북문화의 예술교류에 앞장설 것이다. 남북문화 예술교류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쌍방의 민중(民衆)』이라고 주장했다. 남북 민중(民衆)이 만나고 화합할 것을 강조한 일성(一聲)과 달리 민예총(民藝總)의 족적(足跡)의 소위 남북한 문화교류 상대방은 철저히 북한정권(北韓政權)이었다. 북한정권의 과거(過去)부터 현재(現在)에 이르기까지, 되풀이된 패륜적 죄악은 덮어왔다.
     
     어이없게도 북한정권에 압제당하는 절대다수 북한의 동포는 외면했다. 3만8천 개의 김일성동상과 핵무기와 미사일을 만들다 배급도 못 받고 굶어 죽어간 300만 명도 노래하지 않았다. 아우슈비치보다 더 끔찍한 정치범수용소에서 죽어간 100만 명도 그리지 않았다. 배가 고파 강(江)을 넘곤 돼지 값에 팔려 다니는 수십만 동족처녀들도 말하지 않았다. 민족(民族)을 앞세웠지만 그들이 감싸 안고, 덮어주고, 사랑하는 민족(民族)은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충성하는 「평양정권(平壤政權)」이었다. 2009년 8월24일 민예총(民藝總)의 대표적 시인인 고은은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북한 민중의 고통을 노래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 외국 원수가 와서 서울의 달동네에 가 봐도 그렇지 않나요. 북한만 그런 게 아니라, 거기도 참담한 삶이 있습니다. 우리 대통령이 도시 빈민을 어떻게 다 해결합니까.』
     
     비뚤어진 대북관(對北觀)은 일그러진 대미관(對美觀)을 낳았다. 대한민국에 대해서도 흠집잡고, 약점 찾기에 바빴다. 60년 성취의 골간인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을 원수처럼 보았다. 「평양정권」과 송두율, 윤민석, 강정구와 같은 친북인사엔 한 없이 너그러웠지만, 미국 얘기만 나오면 한(恨)을 품은 듯 주먹을 쥐었다. 그것을 「민족애(民族愛)」라고 불렀다. 균형감각을 잃은 극단적 반미(反美)였지만, 그들은 그렇게 불렀다.
     
     좌파적 논리를 차용했다. 농민, 노동자, 도시빈민 등 소수자(少數者), 약자(弱者)를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론은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게 아니라 미군(美軍)을 내쫓고 동맹(同盟)을 깨뜨려 자주적 통일(統一)을 하는 것이라 말했다. 납득이 안 된다. 반역집단과 야합해 대한민국을 허무는 것이 어째서 소수자(少數者), 약자(弱者)를 위하는 것인가? 민예총이 주장하듯 남한의 소수자(少數者), 약자(弱者)가 늘고 있다. 그러나 약하고 소수일수록 살 길은 선진국을 만드는 것이다.
     
     예술은 순수(純粹)한 것이다. 돈과 물질, 명예를 따르는 세속적 사람과 다르다. 순수한 가치를 쫓다가 시인이 되고,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나는 민예총을 비판했지만, 그들의 순수(純粹)를 느낀다. 민족(民族)과 소수자(少數者), 약자(弱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그 길을 걷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변했다. 대한민국의 권위주의가 사라져 민주화(民主化)됐고, 폐쇄된 북한이 조금씩 열리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포악한 집단임이 확인됐다. 이제는 진실로 민족(民族)과 소수자(少數者), 약자(弱者)를 위하는 것이 무언지 확인할 정보가 생겼다. 돌아설 시기가 된 것이다.
     
     한(恨) 맺힌 이들도 있을 것이다. 살기 띤 반미(反美)로 얼룩진 시와 소설, 노래와 그림을 보면 이념이라기보다는 6.25때 죽어간 빨치산 동료에 대한 피맺힌 원한, 남로당 출신의 아버지 밑에서 겪어 온 가족사에 대한 상처가 느껴진다.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괴로웠을 것이다. 미제국주의자들을 내쫓고 미완의 6.25를 완성하고 싶었을 것이다. 악바리처럼, 악랄하게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2세, 3세, 우리의 후손이 살아갈 미래를 보자. 이른바 자주적 통일은 이미 망한 수령독재(首領獨裁)의 한반도 버전이다. 金씨 왕조의 노예된 삶을 미래세대에 유전시키자는 억지이다. 민예총이 진실로 민족(民族)을 위하고, 진실로 소수자(少數者), 약자(弱者)를 위하는 미래가 와야 한다. 「평양정권(平壤政權)」의 종식을 통해 북한민중에게 소금과 빛과 같은 존재가 되는 내일이 와야 한다. 민예총과 같은 재능과 열정을 가진 조직이 자유통일(自由統一)의 선봉에 서는 그날이 반드시 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