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스탈린 X파일

이영훈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09.08.27 18:10:29

전쟁의 상처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대한민국의 건국사에 씻을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남북한을 합하여 엄청난 인명의 손실이 발생했습니다.
한국정부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국군만으로 사망, 부상, 행방불명자는 99만이며 북한군까지 합하면 191만이나 됩니다.
여기에다 미군의 피해 15만과 중공군의 피해 90만을 합하면 군인으로 사망, 부상, 행방불명자는 300만에 달합니다. 이외에 민간인의 피해자가 있습니다. 그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남북한을 합하여 적어도 200만은 되었을 겁니다. 이만한 사상자 수는 일제가 15년전쟁을 치르면서 감당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3년간의 한국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이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전쟁은 산업시설을 파괴하였습니다. 남한에서만 공장건물의 44%, 기계시설의 42%, 발전설비의 80%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쟁은 분단으로 인해 이미 농업과 경공업 중심으로 불구가 된 남한 경제에 소생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대한 타격을 가했습니다.
전쟁 당시 남북한의 인구는 총 2,500만 정도로서 대략 500만가호였습니다.
한국인으로서 남북한 군인과 민간인의 피해자를 대략 400만 명이라고 잡으면 전체 가호의 8할에서 1명의 피해자가 났던 셈입니다.
제 주변을 소개하면 사촌 형님 한 분과 외삼촌 한 분이 군인으로 나가 전사했습니다. 한 분은 평남 덕천 청천강 전투에서, 다른 한 분은 경북 안강 전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대략 120만 명의 북한 주민이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외에 피난길에서 이리저리 흩어진 이른바 이산가족에 속하는 인구와 관련해서는 흔히들 1000만 명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거리에는 부모를 잃은 고아들, 남편을 잃은 과부들, 손발이 잘라진 상이군인들이 넘쳐났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상이군인은 1950년대 슬픈 한국의 상징이었습니다.


▲ 남으로 남으로 길게 이어진 피난민 행렬. ⓒ 뉴데일리

전쟁은 이제 막 출범한 대한민국의 도덕적 정통성에 큰 흠집을 남겼습니다. 북한군의 갑작스런 침공으로 경상도 남부로까지 쫓겨 간 정부는 마구잡이로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전황이 워낙 급했던 탓이긴 합니다만, 권력의 정당성을 담보할 공적 도덕과 명분에서 최소한의 조건도 갖추지 못한 채 젊은이들을 징발하였습니다. 피난행렬을 세워 놓고 젊은이들을 색출하여 끌고 갔습니다. 제 사촌 형님이 그러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합시켜 놓고 무작정 끌고 가기도 했습니다. 학교 정문에 트럭을 세워놓고 등교하는 학생들을 차곡차곡 싣고 간 경우도 있습니다. 밤중에 마을을 포위하고 가택 수색을 하기도 했는데, 이를 두고 당시 경상도 사람들은 ‘훌치기’라 했습니다.
그것도 공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있는 집안의 자제나 대학생은 강제징발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끌려간 사람들은 대개 없는 집안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리고선 부질없이 치열하기만 했던 전장에서 의미 없는 죽음으로 소모되었지요.
동원의 실상이 그러했기에 보통 사람들의 기억에서 국가는 저 멀리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사람들을 끌고 가는 폭력체에 불과했습니다. 사회의 정치적 통합체로서 국가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의식에서 질서나 가치로서 내면화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이 우리의 건국사에 안긴 그러한 부담은 지금까지도 여러 방면에서 쉽게 관찰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잘못 세워진 나라라는 《인식》이나 역사교과서의 언설을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지요.


▲ 인민군에 의한 집단학살 현장. ⓒ 뉴데일리

전쟁의 와중에서 민간 사회는 사회대로 적지 않은 상처를 주고받았습니다. 그 지역적 범위와 피해의 정도에 대해서는 짐작할 길이 없습니다만, 수많은 마을에서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학살이 전개된 양상은 대개 패턴화되어 있습니다. 인민군에 밀려 급하게 퇴각하는 군경이 보도연맹에 속한 전향 좌익들을 학살한 것이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혹자에 의하면 그 수가 전국적으로 근 20만에 달했다는군요. 피해를 입은 집안에서는 인민군이 들어오자 마을의 우익 인사를 보복 살해합니다. 대개 여기서 그칩니다만 심한 경우 한 단계 더 나갑니다. 국군이 들어오자 우익이 다시 좌익을 보복 학살했습니다. 주로 충청도와 전라도의 여러 마을에서 그러한 양변(兩邊) 학살이 많았습니다.

그런 마을에서는 1980년대까지 일 년에 두어 차례 여러 집안이 같은 날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날만 되면 마을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 버렸습니다. 제가 다녀 본 여러 마을 가운데 충남 논산군 성동면의 어느 마을이 그 한 예입니다. 18세기 이래 조씨 양반 가문이 지배하던 마을이었습니다. 1983년 조씨 가문의 종손은 양변 학살이 있었던 마을의 슬픈 역사를 제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지나간 일로 마을이 계속 불화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 슬픈 역사를 절대 어린아이들에겐 전하지 말기로 하자. 이렇게 서로 다짐하였답니다. 그래서 가끔 원수의 집 아이들끼리 사이좋게 손을 잡고 학교를 다니는 것을 보지만, 그래도 제삿날만 되면 마을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는다는군요.

커밍스의 수정설

도대체 이 말도 되지 않은 전쟁은 누가 무엇 때문에 일으킨 것입니까. 주지하듯이 남한에서 오랫동안 정통설로 받아들여진 것은 북한의 남침설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이 민족통일의 명분을 내걸고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얻어 남침을 강행하였다는 것이지요.
1980년대가 되면 이러한 정통설에 강력한 도전이 제기됩니다.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라는 학자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일월서각)이란 책이 그 도화선을 이루었는데요, 그것을 가리켜 흔히들 수정설이라 부릅니다. 수정설을 간략히 요약하면 내전설과 유인설의 두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내전설은 한국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터진 것이 아니고 멀게는 식민지기부터 시작된 서로 다른 이념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계급 간의 갈등이 해방 후 크고 작은 반란과 충돌로 이어지다가 결국 대규모 군사적 충돌의 전쟁으로 나타났다는 겁니다. 갈등을 증폭시킨 직접적인 계기는 미군정이었습니다. 미군정은 대중의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는 혁명적인 민주노선을 억압하는 대신 소수의 보수적인 지주계급을 옹호하였습니다. 갈등의 핵심은 토지개혁이었으며, 미군정은 지주의 편을 들어 개혁을 미루기만 했습니다. 그에 대해 혁명적인 민주노선은 1946년 대구 폭동, 1949년 제주도와 여수·순천의 반란, 뒤이은 야산 유격대 등으로 저항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38선을 둘러싸고 남한과 북한의 두 군대 간에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계속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이 터진 것은 그러한 사실상의 내전의 연장에 다름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커밍스의 내전설이지요. 유인설은 북한이 남침을 하도록 미국이 덫을 놓았다는 뜻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의 경제는 전쟁에 따른 호황이 사라지고 1930년대의 악몽과도 같은 공황이 다시 살아날 조짐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또 하나의 전쟁 특수를 위해 남한에서 일부러 미군을 철수시켜 군사적 공백 상태를 조장함으로써 북한군이 남쪽으로 내려오도록 유인했다는 것이지요. 

1981년에 나온 커밍스의 수정설은 국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1980년대의 이른바 민주화운동의 파도를 타면서 커밍스의 수정설은 한국 현대사를 급진적으로 재해석하는 지렛대로 작용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제1장에서 소개한 《인식》 여섯 권이라 할 수 있지요. 다시 소개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커밍스의 수정설은 《인식》에 실린 여러 논문이 주장하는 그대로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혁명론에 기초한 한국현대사의 좌파적 해석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 필연을 안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연구 수준에서 커밍스의 수정설이나 논리나 실증에서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제 12, 13장에서 쓴 그대로 남한에서 농지개혁은 무작정 미루어졌다기보다는 지주와 소작농 간의 자율적인 사전 방매의 형태로 해방과 동시에 시작되었으며, 1949년의 농지개혁법이 이후 급피치를 올려 한국전쟁 이전에는 사실상 완료된 상태였습니다. 토지개혁을 위한 민중의 혁명적 요구가 내전으로 이어지다가 한국전쟁으로 발전했다는 주장에도 근거가 없습니다.
38선을 둘러싼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은 대개 1949년 8월까지의 일입니다. 그 이후엔 스탈린이 그것을 금지하는 엄명을 내린 바도 있어서 군사적으로 평온한 상태가 유지되었음이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명확해졌습니다.

모스크바 문서가 이야기하는 전쟁의 진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비밀이 해제된 구(舊)소련의 문서들이었습니다.
그 문서들이 전하는 생생한 정보에 기초하여 한국전쟁의 국제정치적 요인과 의미를 신정통설로 되돌려 놓은 논문으로서 《재인식》에 실린 김영호 교수의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재해석ㅡ스탈린의 롤백 이론ㅡ>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이 논문에 의하면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의 의사를 표명한 것은 1949년 3월 5일 모스크바 회담에서였습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남한이 먼저 북침해 올 경우에 한해서 반격을 가할 수 있다고 하면서 김일성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선 김일성에게 남한에는 아직 미군이 주둔해 있으며, 38선은 소련과 미국이 합의해서 그은 국제적 성격의 분할선임을 상기시켰습니다.


▲ 철원평야를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이 벌어진 백마고지. ⓒ 뉴데일리

그러했던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는 것은 1950년 1월 30일의 일이었습니다. 10개월 사이에 몇 가지 중대한 국제정세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지요.
1949년 8월 주한 미군이 철수했습니다.
같은 해 10월에는 중국의 공산당 정부가 국공 내전에서 승리하여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내쫓았습니다. 내전에 승리한 마오쩌둥은 1949년 12월 16일 스탈린에게 우호동맹을 제안합니다만, 스탈린은 여전히 망설입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맺은 우호조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합군의 국제적 우호체제를 1945년의 얄타회담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흔히들 얄타체라 합니다. 소련은 그 얄타체제의 일환으로 미국과 합의하여 38선을 긋고 그 이북을 점령하였으며, 또한 일본의 북방 영토인 사할린을 점령했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스탈린은 미국과의 냉전이 심화되는 가운데 새롭게 부상한 사회주의 우방인 중공과 우호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0년 1월 22일의 일입니다. 그로 인해 얄타체제가 붕괴하였습니다.
38선도 더는 우호적인 분할선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인 1월 17일에 김일성은 다시 남침의 계획을 스탈린에 올립니다. 1950년 1월 30일, 드디어 스탈린은 38선을 돌파하겠다는 김일성의 제안을 승인하는 비밀 전보를 평양으로 날리지요.
결국 중국혁명의 성공으로 아시아에서 유리하게 전개된 전략적 상황을 적극 이용하여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흡수함으로써 미국과의 냉전대결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기 위한 적극적인 공세정책이었습니다.
 남침계획을 승인한 스탈린은 1950년 4월 극비리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과 회담합니다.
그 자리에서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 할 가능성을 검토하고 그 대책으로 중공의 마오쩌둥에게 협조를 약속 받도록 지시합니다.
이후 5월 13일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찾아 남침 계획을 밝히고 협조를 구합니다.
마오쩌둥은 별도의 경로로 스탈린이 이미 그 계획을 승인하였음을 확인하지요. 그리고선 만약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면 중국이 병력을 파견하여 북한을 돕겠다고 약속합니다.
곧바로 마오쩌둥은 만주 션양 부근에 9개 사단을 배치합니다. 아울러 소련과의 군사방위조약을 서둘러 체결합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만약 미국이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까지 진격하면 중국과 소련의 협공을 받아 미국은 커다란 실패를 맛볼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의 실험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한국전쟁은 만주라는 광활한 지역을 덫으로 펼쳐 놓고 미국을 그곳으로 유인한 소련과 중공의 무시무시한 국제음모로 기획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한편 미국은 냉전이 심화됨에 따라 일본에 대한 점령정책을 일본 경제를 부흥시키는 방향으로 전환합니다. 그렇게 미국에 의해서도 얄타체제는 사실상 해체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반도의 남쪽마저 가지겠다는 스탈린의 군사적 공세를 묵과할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한국전쟁은 냉전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으려는 미국과 소련 간의 양보할 수 없는 전쟁으로 벌어진 것입니다. 한국전쟁의 원인과 책임을 미국에 돌려온 종래 커밍스의 수정설은 이렇게 전쟁의 발발 과정을 소상하게 전하는 모스크바의 비밀문서가 공개됨에 따라 더 이상 발붙일 데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한국전쟁은 주도면밀하게 기획되고 추진된 국제전이었습니다. 전쟁의 양상이 형언하기 힘들만큼 참혹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이상 김영호의 논문을 빌어 한국전쟁의 원인과 성격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일제가 북한에 남긴 군사공업

한국전쟁의 발발과 관련하여 정치학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경제사적 요인에 관해 한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제9장에서 논문을 소개한 바 있는 키무라 미츠히코(大村光彦) 교수가 2003년에 《북조선의 군사공업화(和泉書館)라는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여기서 키무라 교수는 김일성이 남침을 결행하게 된 역사적 배경의 하나로, 북한에 상당 수준의 군사공업시설이 존재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까지 제철·전기·화학 등 군수 관련 공업을 북한지방에 대량으로 건설했습니다. 해방 후 그 공업시설의 일부는 소련군이 해체하여 자국으로 반출했습니다만, 그 대부분은 오롯이 북한 정부에 인계되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일제가 비축해 둔 원자재와 부품의 재고가 풍부하였기 때문에 해방 후의 북한경제는 커다란 혼란이 없이 신속하게 공업생산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약 800명에 달하는 일본인 기술자들이 전쟁 전까지 억류되었던 것도 공업생산을 신속히 복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쟁 이전에 북한은 소총·기관총·박격포와 같은 소화기에서부터 총알·대포알·수류탄·각종 화약을 자체 생산하는 수준에 도달하였습니다. 일제가 평양에 건설했던 종업원 6천의 평양병기제조소(平壤兵器製造所)란 시설이 그 대표적인 공장이었습니다. 해방 후 이 공장은 M정공(精工)이란 비밀암호명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전쟁 전에 김일성이 이 공장에 들러서 병기와 폭탄 생산을 독려했음이 전쟁 중 미군이 노획한 북한문서에 나옵니다.

이 같은 북한의 사정에 비한다면 남한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던 편입니다.
김일성이 볼 때 미군이 물러간 남한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와 같았지요. 그래서 자꾸만 스탈린에게 남침을 건의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북한이 전쟁을 도발할 수 있었던 한편의 힘은 일제가 중국 대륙을 먹기 위해 북한에 건설한 군사공업에 있었습니다. 일제가 건설한 군사공업이 후일 북한이 남침을 결행하는 군사력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볼만한 역사의 아이러니이군요.
북한이 스스로 민족의 혁명기지로 자처하면서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는 남한을 해방시키겠다며 동원한 군사력이 원래 그 제국주의가 건설한 것이었다니 아이러니가 아닙니까.
제11장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만, 김일성의 북한은 민족의 혁명기지라기보다 정신이나 물질의 모든 면에서 일본제국주의를 계승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끝나지 않은 ‘나라세우기’

끝으로 최근에 다시 불거진 강정구 교수의 내전론에 대해 코멘트하겠습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강정구는 한국전쟁이 혁명적인 민중세력과 외세의존 반혁명세력 사이에 벌어진 내전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남한을 외세의 식민지적 지배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민족통일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커밍스의 수정설과 《인식》의 역사관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강정구의 주장에 대해 추가적인 해설을 덧붙일 필요는 없겠습니다. 한국전쟁이 내전인 것은 기능적으로 보아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여러번 강조했습니다만 ‘나라세우기’의 정치는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정치세력이 헤게모니를 다투는 사실상의 내전이자 많은 경우 실제적 내전을 동반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남한의 자유민주주의나 북한의 프롤레타리아트독재나,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나 김일성의 국토완정론이나 엄밀히 말해 정치적 기능에서 대등합니다. 동시대인들에게 그것은 어려운 선택이었습니다. 사회주의를 신념으로 삼았던 많은 지식인이 북으로 올라간 반면, 그 밑에서는 살 수 없었던 대략 100만의 북한 주민이 전쟁 전에 이미 남으로 내려 왔던 것 자체가 대립적 선택으로서 곧 내전이었지요.

문제는 강정구가 제기한 내전설은 이러한 ‘나라세우기’ 정치가 내포하고 있는 기능적으로 대등한 의미의 내전이 아닙니다. 그는 숨기지 않고 김일성의 북한이 일찍이 주장했던 혁명기지론을 지지함으로써 기능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 내전의 일방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그의 입장은 당초 내전으로 일어났던 한국전쟁이 미국의 부당한 개입으로 참혹한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바로 그 점에 커밍스의 수정설을 넘는 강정구 독자의 한국전쟁 이해가 있습니다.
결국 그는 커밍스 이상으로 전쟁을 기획한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고 또 변함없는 지지를 표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몇 차례 이야기하였습니다만, 저는 강정구와는 달리 민족 중심이 아니라 개인 중심으로 역사의 발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식민지기 이래의 지주-소작관계는 화해 불가능한 계급대립의 관계도 아니었을 뿐더러 해방 후 미국체제에 포섭된 남한을 두고 식민지적 상태라 하는 것도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강 교수와 저는 얼굴색이 같고 언어가 같아 같은 민족임이 사실이지만 역사를 감각하는 지성에서는 전혀 별개의 인간이지요.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얼마든지 용납할 수 있고 또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만, 서로 다른 생각이 ‘나라세우기’의 정치와 관련하여 서로 적대하는 입장이라면, 그곳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의 경계선입니다.
‘나라세우기’의 정치는 1948년 8월 15일 그 날에 있었던 정부 수립의 공포로 종료된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전통과 명분의 축적 과정입니다.
그러한 건국사에서 적잖은 잘못이 있었음은 사실입니다. 학살 등, 진상을 규명해야 할 반인륜 범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건국사에 대한 비판이 사회의 정치적 통합으로서 국가를 보다 높은 문명으로 발전시키려는 선의를 넘어 건국사 자체를 부정하는 정치적 도전으로 나타날 때는, 그리고 그것이 한두 개인의 학문적 소신을 넘어 잘 조직된 정치세력의 힘으로 과시될 요량이라면, 그러한 비판의 자유가 끝까지 보호되어야 할 헌법적 가치인지에 대해 저는 회의적입니다.

강정구의 주장에 실정법상의 문제가 있다고 하여 검찰이 그를 구속코자 하였을 때 법무부 장관이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발동하며 막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대한민국이 잠시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건국사의 기본 줄기가 크게 흔들렸지요. 나라의 정치 지도자는 나라의 기본 정체성과 관련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강처럼 피를 흘린 그 전쟁에 관한 공식 기억을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전쟁은 한국인들이 사회주의 국제세력의 공세로부터 그들의 자유와 인권을 지켜낸 전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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