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년만에 조지워싱턴대 학사, 하버드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그가 스물 아홉 살이던 1904년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운동이라기보다 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한 투쟁의 시작이었다.
    이승만은 1904년 한성 감옥에서 6만에 풀려 나오자 고종황제 밀사 자격으로 미국에 건너가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친일적인 루즈벨트는 입장이 난처해지자 “그 문제는 매우 중요하므로 외교 경로를 통해 오라” 하여 젊은 이승만을 따돌려 버렸다. 그후 5년동안 조지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승만은 서울~샹하이~호놀루루~워싱턴을 왕래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 직후에는 샹하이 임정에서 집정관총재(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그는 구미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였다.

    "미국만이 일본-러시아의 조선 지배를 좌절시킬 수 있다"

    이승만이 미국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남다른 영어 구사력, 다른 하나는 강대국인 미국만이 아시아에서 일본과 러시아의 영토 확장 야욕을 좌절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강국으로 부상하는 일본을 경계한 나머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권리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맞바꾼 지 오래였다.(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이승만은 처음엔 이런 음모를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의 레닌 공산혁명후 미국의 조야(朝野)에 일본의 군국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 확산을 경계하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언론을 통해 미국민 여론에 호소했다. 친일파와 친소파가 많은 국무성에도 수시로 찾아가 일본의 음모를 알리려 애썼다.
    1919년 3.1 운동후 이승만은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키 위해 미국무성에 재입국허가를 신청했으나 거부당했다. 프린스턴대의 은사(총장)이기도 한 윌슨 대통령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윌슨은 이승만에게 “미국 시민권을 얻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이래 뵈도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통령입니다. 어찌 남의 나라 국적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감동한 윌슨은 재입국 주선을 해 주면서 “일본을 자극할 우려가 있으니 회의장 입장은 삼가 달라”고 청했다.

    진주만 공습 예언...'Japan Inside Out' 베스트셀러로

    이후에도 이승만은 임정의 국제적 승인을 얻으려 국무성과 국회등으로 동분서주했지만 번번이 좌절을 맛보았다. 이때 쌓인 울분과 전략이 1941년 6월 한권의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Japan: Inside Out"(일본 그 가면의 실체)가 그것이다. 이 책에서 이승만은 일본 군국주의의 역사적 배경과 생성과정 그리고 가까운 장래에 미국을 기습 공격할 것이라고 구체적인 예을 들어가며 경고했다. 그해 12월 8일(미국시간 7일) 이승만의 예언은 맞았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한 것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 특히 국무성은 이승만에게 여전히 냉정했다. 제2차 대전 수행에 있어서 유럽과 태평양 두 전선에 허덕이던 미국에게 소련은 사실상 동맹군이나 마찬가지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주만 공습후 한 달도 안 된 1942년 1월2일 이승만은 미 국무성을 찾았다.

    루즈벨트 대통령 측근이 소련 간첩일 줄이야

    그가 만난 관리는 당시 현직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측근이며 소련 붕괴 후에 소련의 간첩으로 밝혀진 앨저 히스(Alger Hiss)라는 인물이다. 미국대통령도 모르는 간첩을 알 턱이 없는 이승만은 그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광복군을 위한 무기 공급을 간청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2차대전 종료후 소련의 한반도 점령을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한국독립군에게 무기를 원조하는 것은 미국에게 일본과 소련을 막아내는 일거양득이 된다고 강조했다. 소련의 첩자인 히스는 화를 냈다.
    그후 1945년 2월 얄타에서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 3거두가 전후처리를 논의할 때, 히스는 루즈벨트에게 소련에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진언했다. 바로 소련의 극동 참전 불가피론이다.내심 소련 참전을 바랐던 미-영은 즉시 합의함으로써 소련군의 한반도 점령을 일찌감치 허용한 셈이 되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이승만은 맹렬한 반대운동을 벌였다.
    대전이 끝난 넉달후 1945년 12월 미-영-소 3국 외무장관들은 모스크바에서 다시 만나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을 결의했다. 이승만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그는 김구, 김규식등 모든 지도자들과 함께 탁치(託治)반대투쟁을 전개했다.
    미-소 양국은 모스크바 합의대로 한반도문제 해결을 위해 1946년 덕수궁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었다. 소련은 반탁의 민족진영은 배제하고 찬탁(贊託)의 공산진영만 회의에 참석시키자고 주장했고, 미국대표 존 R 하지 중장도 이에 동조했다.

    "반탁운동 이승만을 제거하라" 비밀 작전 이름은 'Ever Ready Plan'

    미국은 사생결단으로 탁치를 반대하는 이승만을 제거할 음모까지 꾸몄다. 미국의 대외정책(US Foreing Policy) 1946년도판 715-716쪽과 743-744쪽을 보면 이승만 제거계획(Ever Ready Plan)이 밝혀져 있다.
    이런 가운데 이승만은 46년 9월 23일 하지를 만나 격론을 벌였고, 하지는 “미국정책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이승만은 영원히 권력을 잡지 못할 것”이라고 배척했다.(이도형 지음 ‘건국의 아버지 李承晩’). 이승만은 무지-무식한 하지를 제쳐놓고 동경의 맥아더에게 연락, 그가 보낸 군용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날아가 트루먼 대통령이하 행정부와 의회지도자들을 두루 만나 담판했다. 즉 한국민은 일본 대신 또 다시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되는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한다며 자주독립국가 창건을 강력히 호소했다. 반면 정치도 공산당도 모르는 하지는 무턱대고 남한 정치인들을 모아 ‘좌우합작’만을 추진했다. 그러나 미소공위는 실패했다.
    한국문제는 곡절 끝에 유엔으로 이관되었고 48년 5월 한국역사 최초의 민주적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미국과 소련과 북한과 국내반대파에 맞서 이승만이 고군분투한 결과였다.

    "휴전 결사반대" 이승만...미국, 또 제거 음모 추진

    소련과 김일성은 끈질기게 남한을 선동 파괴했다. 46년 9월의 총파업, 10월 대구폭동, 총선거를 방해하려는 48년 4.3 제주폭동, 그리고 8.15 대한민국 건국에 맞춰 여수-순천에서 군내 좌익반란을 일으켰고, 마침내 50년 6월 25일 기습남침을 감행했다.
    신생 대한민국은 맥없이 쫓기고 말았다. 북한의 남침을 예상한 이승만은 끊임없이 미국에 군사원조를 요청했으나 한번 철수한 미국은 마이동풍이었기 때문이다.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자 뜻밖에 중공군의 참전으로 38선일대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때, 사불여의(事不如意) 소련이 51년 6월21일 휴전을 제의했다. 2차 대전에 이은 한국전쟁으로 지친 미국과 연합국도 이에 호응, 7월10일부터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 ▲ 1953년 6월18일 한밤중의 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면 못할 결단이었다. ⓒ 뉴데일리
    ▲ 1953년 6월18일 한밤중의 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면 못할 결단이었다. ⓒ 뉴데일리


    그러나 통일의 기회를 놓친 이승만은 휴전을 결사반대했다. 전 국민과 함께 단독 북진통일 운동을 전개했다. 1952년 미국대선에서 한국휴전을 공약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아이크)가 당선되었다. 이승만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미국의 휴전협상을 사사건건 반대했다.
    미국은 또 다시 이승만 제거계획을 은밀히 추진했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맥스웰 테일러 장군은 한국군의 모 장성을 동원, 이승만 제거작전을 세웠다. 이 음모는 결국 실패했지만 후에 널리 알려졌다. 그만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전후정책 수행에 치명적인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휴전조인을 몇 달 앞둔 시점에서 미국은 곤경에 빠졌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휴전조인을 강행할 경우 이승만대통령이 단독 북진한다면 휴전은 깨질 것이다.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은 그렇게 위협적이었다.
    결정타는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포로수용소 안에서 반공포로들은 공산포로들에게 매일 살해당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들 반공포로 2만 7천여명을 극비리에 전격적으로 석방시켜 버렸다. 휴전조인 한달 전인 53년 6월18일의 일이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놀랐다.

    "적군과 싸우기 보다 이승만과의 싸움이 더 힘들었다"

    당황한 미국은 부랴부랴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미국으로 초청했지만 그는 “나는 못 간다. 국무장관 덜레스를 보내라”고 버티었다. 미국은 어쩔 수 없이 국무차관보 월터 S. 로버츠를 대신 서울로 보냈다. 이승만은 로

  • ▲ 이도형 한국논단 대표 ⓒ 뉴데일리
    ▲ 이도형 한국논단 대표 ⓒ 뉴데일리

    버츠에게 휴전 수락 조건을 제시했다.
    1.한미 방위조약 체결 2.장기경제 원조 및 첫조치로 2억달러 공여 3. 한국군 증강계획의 지속  4.한미고위급회담 정례화 등이다. 미국은 결국 이 조건들을 수락하고 말았다.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유엔군사령관 마크 W. 클라크 대장은 말했다. “싸워서 이기기보다 평화를 얻는 게 더 어려웠고, 적군보다 이승만대통령이 더 힘들었다.”고.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이익을 위해 우방 미국의 세계전략을 여러번 수정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미국과의 투쟁으로 태어났고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