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를 되돌아 봄

이영훈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09.07.31 15:43:35

반민특위의 좌절


▲ 반민특위에 의해 기소된 사람들이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 뉴데일리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포함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사에 대한 국민대중의 평가가 부정적으로 된 것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가운데 친일파의 주도로 나라가 세워졌다는 대중적 인식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친일파 문제는 60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무슨 계기라도 생기면 어김없이 불거져 나와 우리 건국사를 비판하는 가장 아픈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의 건국사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함에 있어서 친일파 문제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깊은 지혜가 요청되는 성찰의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인들이 이 문제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지 않고서는 해방전후사를 재인식하려는 우리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재인식》이란 책에 관련 논문이 없음에도, 자칫하면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 각오를 하고, 그 문제에 관한 장을 펼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야기합니다. “그때 말이야, 친일파를 적어도 천 명 쯤은 처형했어야 했어.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에 빚진 게 없는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그들을 감쌌는지 알 수 없어.”
이 같은 이승만 비판에 대해서, 저는 그 선의를 이해합니다만 솔직히 말해 무언가 거창한 민족의 영웅 서사를 추체험해 보고픈 푸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객관적 현실은 그러한 영웅 서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엄연했던 역사적 제약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니체가 운명에서 자유로워졌듯이 우리도 친일파 문제의 주박(呪縛)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겁니다.
1948년 9월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합니다. 그에 기초해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1949년 1월부터 활동에 들어갑니다. 동년 8월까지 599명이 특별검찰에 송치되고, 221명이 기소되었으며, 38명에 대한 재판이 종결되었습니다. 재판 결과를 보면 체형이 12명, 공민권정지가 18명, 무죄 내지 형면제가 8명입니다. 체형은 사형 1명, 무기징역 1명, 기타 징역 1년 내지 2년 6개월이며 집행유예 등입니다. 사형과 무기징역을 받은 두 사람은 곧이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석방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반민특위가 엄중하게 처벌한 친일파는 하나도 없는 실정입니다.
반민특위와 가장 심하게 대립한 세력은 경찰이었습니다. 당시 경찰의 절반 이상은 일정 때부터 경찰에 근무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습니다만, 1960년 조사에 의하면 당시까지도 경찰의 3할이 일정 때부터의 경력자였으니 그렇게 짐작해도 틀림없다고 하겠습니다. 해방 후 점령군으로 남한에 들어온 미군정의 입장에서 친일파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한반도에 진입하면서 큰 전투를 치렀다면 입장이 달랐겠습니다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미군정은 치안을 유지하고 공산 세력의 저항을 제압할 때, 그 방면에서 전문 능력을 지닌 일정 때의 경찰들을 채용함에 별로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경력 27년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한 노덕술 같은 고참 경찰도 있었습니다.
반민특위는 그를 포함하여 경찰 간부 세 명을 체포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집단이 격앙하고 드디어 1949년 6월 서울시경 국장의 지휘하에 경찰부대가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특위 요원을 연행하는 중대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공권력에 의한 백주의 테러였지요.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그러한 불법행위를 묵인합니다. 뒤이어 임명된 반민특위의 위원장은 처음부터 반민특위의 활동에 회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반민특위는 잔여 업무를 처리하고 같은 해 8월에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반민특위의 비극적인 좌절은 대다수 국민의 마음에 상처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 상처가 지난 60년간 아물지 않고 지금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분열의 근원으로서 친일파 문제

오늘날 역사가의 눈으로 반민특위의 활동에 관한 여러 자료를 읽어 본 소감은 한마디로 역부족이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반민특위의 특별검찰과 수사요원은 고작 수십 명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수만 명의 경찰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반민특위가 경찰을 이기기 위해서는 경찰의 지도부가 친일 경력과 무관한 깨끗한 사람들로서 반민특위의 활동에 도덕적으로 승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니면 경찰을 감독 지휘하는 대통령을 위시한 집권세력이 친일파 청산에 강한 정치적 의지를 가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조건들은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경찰의 대다수는 정도의 차는 있지만 친일 경력의 소지자였으며, 그들이 보기에 동료가 체포되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보기에 반민특위의 사람들조차 친일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재판한단 말이야.” 그들의 불평이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반민특위의 활동은 소수의 좌익들이 우익 진영에 압박을 가하는 정치공세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친일파 청산은 해방 직후부터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한 문제의 하나였습니다.
예컨대 1945년 10월 미국에서 막 돌아온 이승만과 조선공산당의 영수 박헌영이 장장 네 시간에 걸쳐 정치회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두 사람은 친일파 문제에서 입장의 큰 차이를 보입니다. 박헌영은 친일파를 근절한 다음 순전한 애국자로서 진보적 민주주의의 요소들만으로 이루어지는 ‘조건부 통합’을 주장하는 반면, 이승만은 “성스러운 건국 사업에 친일파를 제외하자는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지 않느냐”고 ‘무조건 통합’을 역설합니다.
제11장에서 소개한 1945년 9월의 스탈린 비밀지령에서도 명백히 나와 있습니다만, 당시 좌익세력이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내는 데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족주의적 감정에 호소하는 전략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와도 같은 정치적 자산이었습니다. 그에 비하자면 일본에 협력하면서 근대를 학습하고 실천해 온 우익세력의 대다수에게 친일파 문제는 처음부터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는 약점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친일파 청산은 그 순수한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좌우익 간의 첨예한 대립각을 이룰 수밖에 없는 문제였습니다.
좌우익만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우익끼리도 이 문제는 분열의 소지였습니다. 1945년 12월, 귀국한 임시정부의 요인을 환영하는 자리가 한민당의 간부에 의해 마련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임시정부의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들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장덕수가 “그럼 난 어김없는 숙청감이군 그래”라고 받아쳤습니다. 이에 신익희가 “어디 설산(雪山, 장덕수의 호)뿐인가”라고 맞받았지요. 이를 보고 있던 송진우는 “여보 해공(海公, 신익희의 호), 표현이 좀 안됐는지 모르지만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시정부를 누가 오라 하였기에 그런 큰 소리가 나오는 거요”라고 말하면서 “중국에서 궁할 때 뭣을 해먹고서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어”라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어느 책에서 이 해프닝을 접하고 저는 마음이 심히 언짢았습니다. 그렇게들 모두가 분열돼 있었던 겁니다. 제11장에서 지적한 그대로입니다만, 해방공간에서 사람들은 민족이니 계급이니 하는 외래 담론으로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몰면서 대립하였습니다. 사람들을 선진적인 정치적 통합으로 이끌 자율적 질서의 공동체는 그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초대 정부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하다가, 이후 1960년대에 경제기획원 차관까지 지낸 어느 분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정부의 관료들은 친미파, 친중파, 친일파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친미파는 미국에서 돌아온 소수의 고위직이었고, 친중파는 중국에서 임시정부와 함께 돌아온 사람들로서 정치적 명분이 강한 사람들이었지만 실무 능력이 거의 결여된 사람들이었으며, 수적으로 가장 많은 친일파는 일본에 유학했거나 국내 대학의 출신자들인데 정치적으로 취약한 입장이나 실무 능력은 가장 우수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갈등 구조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선택은 낮과 밤으로 교묘하게 달라졌습니다. 제주도와 여수·순천에서는 남로당이 일으킨 반란이 전개 중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반민특위의 활동은 정부의 실무 관료들을 동요시켰습니다.

박흥식의 재판기록


▲ 박흥식의 종로 화신백화점. ⓒ 뉴데일리

반민특위의 활동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재판을 받은 38명의 재판기록을 찾았습니다. 모두 다 읽을 수는 없고, 제 전공인 경제사와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는 박흥식을 선택했습니다. 화신백화점을 경영한 당대 최고의 조선인 사업가였지요. 반민특위가 제일 먼저 체포한 사람도 그였으며, 제일 먼저 재판을 시작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그였습니다. 그만큼 그는 친일파의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박흥식이 체포된 죄목은 반민법 4조 7항에 “비행기, 병기 또는 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였습니다. 그는 1944년 10월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해방될 때까지 비행기 제작에 종사하였는데, 그 죄목으로 체포된 것입니다.
재판의 결과는 무죄였습니다. 재판관이 우익이어서 그랬을까요. 취조기록과 재판기록을 직접 읽은 저로서도 판단이 쉽지 않군요. 국민 대중의 정서를 고려하고 또 비행기 공장을 경영한 것은 사실이니까 법에 따라 얼마간 징역형을 살게 하는 것이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그의 죄상이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어마어마하여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그런 성질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재판기록을 읽은 저로서는 그 점만큼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비행기 공장은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사령관과 참모장의 수차에 걸친 강요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 점은 전쟁이 끝나자 일본군 참모장이 박흥식에게 비행기회사의 자본금 2,500만 원을 전액 변제한 데서 확인됩니다. 박흥식은 시키니까 할 수 없이 했지, 원래부터 사업가가 제 정신으로 할 사업은 아니라고 진술했습니다. 만들 비행기도 일종의 글라이더로서 목제 비행기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얼토당토 않은 일에 그는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것 같습니다. 우선 1천여 명의 공원들을 모집해서 일본 나고야와 만주 션양에 있는 비행기공장에 연수를 보내고, 상하이에서 비행기 부품을 깎을 선반 수백 대를 구입하여 창고에 보관해두고, 공장의 터를 닦고 인부들의 숙소를 짓다가 부품 못 하나 만들지 못하고 해방을 맞은 것이지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일본군이기에 전쟁이 끝나자 박흥식에게 일본으로 망명할 것을 권유합니다. 박흥식이 거절하면서 변상을 요구하니까 위와 같이 준 것이지요.
박흥식을 취조한 특별검찰은 노일환이란 국회의원이었는데, 나중에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된 좌익의 인물이었습니다. 취조기록에 나타난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는 두 사람의 논쟁 아닌 논쟁은 오늘날에도 그 의미가 간단하지 않군요. 이 책의 4장과 5장에서 소개한 식민지 수탈론과 근대화론의 대립이 벌써 그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노일환은 “당신이 성공한 것은 일제의 부당한 비호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추궁합니다만, 박흥식은 그에 대해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노력으로 일본인들의 신용을 얻었을 뿐”이라고 변명합니다. 박흥식은 처음 인쇄업과 종이 무역을 해서 돈을 법니다. 그러다가 은행에 보증을 선 친구가 파산한 일이 생겼습니다. 박흥식은 순순히 그 친구를 대신해 적지 않은 부채를 은행에 상환합니다. 그러자 일본인 은행장이 장래가 촉망되는 조선의 젊은이라고 극구 칭찬하면서 박흥식의 뒤를 적극 밀기 시작합니다. 박흥식은 자신의 이러한 행적을 소개하면서 어디까지나 자신의 신용과 노력으로 사업을 일구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노일환은 “당신이 민족 수탈의 상징인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의 감사로 취임하였는데, 그것은 반민족행위가 아니냐”고 추궁하였습니다. 박흥식이 조선 총독의 권유로 동척의 감사로 들어가는 것은 1941년경이었습니다. 박흥식은 “당시 동척은 민족의 수탈과 무관한 금융기관이었다”고 반박합니다. 이 점은 오늘날에도 납득이 쉽지 않을 강변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말해 경제사 전문가로서 저는 박흥식의 주장에 공감합니다. 동척은 1908년 일본 농민을 조선에 이주시킬 목적으로 세워진 국책회사였습니다. 그렇지만, 이주 실적은 고작 4천 호를 넘지 못했습니다. 일본자본주의가 워낙 급성장을 하는 통에 일본에서조차 노동력이 부족해진 까닭이었죠. 그러자 동척은 농지를 구입하여 농장경영을 행합니다. 1925년 당시 전국 80여 곳에 농장을 설치하였는데, 경지면적은 도합 7만여 정보였습니다. 이후 점차 농장경영을 축소하면서 주로 토지담보의 금융업으로 활동의 중심을 바꿉니다. 거래 상대의 7~8할은 일본인들이었습니다. 결국 박흥식은 농장경영과 일본인을 상대로 한 금융업이 왜 민족경제의 수탈이냐고 반박한 셈이지요.
노일환이 다시 박흥식을 추궁하기 위해서는 동척이 농지를 구입할 때 값을 치르지 않고 마구잡이로 빼앗았다든가, 다른 지주보다 소작농의 대우에서 악독하였다든가, 조선에서 금융업을 한 것 자체가 수탈이라든가 등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그런 증명은 불가능한 성질입니다.
제4장에서 식민지수탈론을 비판하면서 한 이야기입니다만, 일제는 토지를 마구잡이로 빼앗는 야만적인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누차 강조합니다만, 식민지 지배의 일환으로 대량의 자본이 건너와 손에 물을 묻히고 좁쌀을 줍듯이 저가의 토지를 대량 매수한 것 자체가 이미 식민지적 수탈이지요. 그러나 그것을 두고 법정에서 불법이니 수탈이니 이름을 붙여 처벌하기는 곤란한 법이지요.

▲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나치스에 협력한 자를 즉결처형하는 장면. ⓒ 뉴데일리

요컨대 박흥식을 법정에서 처벌할 실정법상의 근거는 취약하였습니다. 그의 주요 죄목인 비행기회사는 그의 의지가 아니었고 강요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피고의 해명과 변호인의 주장은 그러하였습니다. 그것을 뒤집을 증거는 법정에 제출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한편의 희극과도 같은 재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정치적으로 또 군사적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지요. 인류의 역사는 그러한 초법적인 상황을 몇가지 실례로 전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연합군이 프랑스를 회복하자 뒤를 따른 드골의 군대와 레지스탕스들이 나치스 협력자 수만 명을 인민재판에 붙여 처형한 것이 그 좋은 예로 자주 거론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광복군이 연합군의 뒤를 따라 들어와 권력을 장악하였다면 그러한 초법적 상황이 벌어졌겠죠.

역사의 아픔을 정신혁명으로

다시 이태준의 《해방전후》란 소설입니다. 일제의 압박을 피해 시골로 피신한 주인공은 그곳의 김직원이란 유생과 일제의 패망이 멀지 않았음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국경 바깥에서 삼십 만 대군의 독립군이 일본에 선전포고까지 하였다지요. 해방될 조국의 국호는 고려민국이라고 합니다. 김직원은 감격에 가슴 벅찬 듯 후 한숨을 쉬면서 눈물까지 글썽거렸습니다. “삼십 만! 제법 대군이구려! 옛날엔 십 만이라두 대병인데! 거 인제 독립이 돼 가지구 우리 정부가 환국할 땐 참 장관이겠소! 오래 산 보람 있으려나보!”
그렇지요. 그런 식의 민족의 영웅 서사가 실현됐다면 친일파 청산이 왜 어려웠겠습니까. 친일파들은 혼비백산하여 일본으로 도망쳤을 겁니다. 망명을 권유받은 박흥식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개인자격으로 환국한 광복군의 수는 고작 기백 명을 넘지 못했고, 제가 만날 수 있었던 그 중의 몇 사람은 곧장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후 3년간 남한을 통치한 미군정은 친일파의 숙청에 거부감을 표하면서 선거에 의한 대의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는 할 일이 아니라는 미국다운 입장을 취합니다. 그 사이 경찰과 군대는 친일 경력의 인물로 채워졌습니다. 그런 마당에 반민특위로 모인 소수의 급진적 민족주의자와 좌익세력이 이미 손에 총을 쥐고 있는 경찰과 군대의 친일인사를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처벌할 수 있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의 그랬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만, 그러한 역사적 당위는 역사적 현실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마치 《해방전후》의 삼십 만 대군이라는 영웅 서사가 역사적 현실이 아니었듯이 친일파 청산이라는 대의명분은 자력으로 해방을 맞지 못했다는 엄연한 역사적 제약 앞에서 실현될 수 없는 꿈에 불과하였습니다.
이제 반민특위의 좌절에 정치적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 대통령이 누구보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였음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미국에 40년 가까이나 살면서 끝내 미국의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에 절망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를 친미 사대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부당한 비난입니다. 그는 사사건건 미국과 대립하고 갈등을 빚었습니다. 최근에 공개된 1958~1959년도 국무회의 회의록을 보면 그의 반미 감정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입니다. 또한, 그는 지독히도 반일주의였습니다. 집권 내내 그는 일본이 미국의 양해를 얻어, 두고 간 재산을 찾으려 다시 쳐들어온다고 믿었습니다. 그에 대비하여 그는 돈이 없어 해군을 만들 수 없는 처지에 민간 상선이라도 많이 만들어 두어야 한다고 각료들을 채근했습니다. 그렇다면 일찌감치 국내에 잔류한 친일파의 상징적 인물들을 극형으로 처리하는 편이 정치적으로 득책이라는 판단도 들었을 법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끝내 친일파의 청산에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는 해방 직후부터 민족의 ‘무조건 대통합’을 주장했습니다. 냉정한 현실주의자인 그는 자신의 정치적 우군이 일제와 협력한 근대화세력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무조건 대통합’은 그렇게 계산된 정치기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뿐이었을까요.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하자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신중하고 가볍게 처리해 달라고 부탁하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주권을 회복하였다면 이완용·송병준 등 반역 원괴(怨魁)를 다 처벌하고 공분(公憤)을 씻어 민심을 안정케 했을 것인데, 그렇지 못한 관계로 또 국제 정세로 인하여 지금까지 실시를 연기하여 왔으나(하략).”
그렇게 그는 우리 힘으로 주권을 회복하지 못한 역사의 아픔을 이야기했습니다. 《해방전후》의 김직원처럼 그 역시 전통 유생 출신이지만 삼십 만 대군의 영웅 서사를 꿈꿀 정도로 낭만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민족의 거의 절반이나 차지하는 친일파를 단죄하는 것은 또 하나의 부질없는 분열과 혼란을 의미할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역사적 아픔을 냉정한 현실주의적 판단과 정치기술로 승화시켰던 것입니다.
그가 구성한 초대 내각에 두세 명의 친일파가 포함되었다는 여론이 일자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악질적인 독립운동 방해자 이외에 친일파란 있을 수 없다.” 실제로 악질적인 친일파가 정부에 중용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 점에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제9장에서 썼습니다만 건국에 참여한 사람들의 친일이라 해봐야 테크노크라트형에 불과한 차원이었습니다. 자꾸 반복되고 있습니다만, 그들은 개항기 이래 문명개화파의 후예들로서 외래의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 의해 대한민국이 세워진 것은 문명사의 대전환이란 관점에서 정당하였고 또 필연이었습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친일파 문제에 대한 성명을 발표합니다. 왜정 때에 아무리 고등관을 지낸 사람이라도 건국 사업에 참여하여 큰 공적을 세우면 그 사람은 이미 친일파가 아니요, 두드러진 친일 사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일본말을 자주 입에 올리면서 일본음식을 좋아하고 일본에 자주 들락거리면서 속으로 일본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그들이야말로 청산될 친일파라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건국을 위한 미래지향적인 정신혁명으로서 친일 청산이지요.
제가 찾은 정답은 바로 그것입니다. 정신혁명으로서의 친일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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