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한국 유학생이 하버드 경영대학원에 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학생회장이야말로 실력만으로 되지 않는 것인데, 특히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에 온 유학생이 당선 되었다는 건 그야말로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저기서 앞서가고 있는 한국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뉴스에 오르내리는 재원들뿐 아니라 내 주변에도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젊은 한국인들이 많습니다.그들을 그렇게 훌륭한 사람으로 만든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 자신감과 자긍심입니다.

    나는 절대 지지부진하게 살지 않겠다는 자기존중, 나는 반드시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긍심,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겠다는 자신감.
    이 자신감과 자긍심은 부모의 끊임없는 관심과 칭찬에서 생겨납니다.
    칭찬 받고 자란 아이들이 자신에 대해서도, 세사에 대해서도 긍정적입니다.
    늘 꾸중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알게 모르게 열등의식이 생기기 마련입니다.그 열등의식은 부정적 사고관을 갖게 하고, 나아가 사회에 대해 반항하는 성격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내가 재직하던 학교에 이민 온 한국학생이 있었습니다.
    현식이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미국 온지 1년도 안돼 각 과목에 B학점을 받았습니다. 전 과목 B학점의 성적표를 자랑스럽게 부모에게 보인 날, 현식이는 아버지에게 매를 맞았습니다.

    “내가 이민 와서 죽을 고생을 해가며 너를 키우는데 고작 B학점이냐? 옆 집 동우는 All A를 받아 왔는데 너는 왜 B냐?”

    그날 이후부터 현식이는 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비뚤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공부도 잘 하고 선생님 말도 잘 듣던 모범 학생이 갑자기 성적도 떨어지고 행동도 삐딱해지는 게 이상해서 하루는 현식이를 불러 물어 보았습니다.
    “공부 안하기로 작심했어요.”
    “그게 무슨 소리니?”
    “죽어라 공보했다고요. 정말 힘껏 노력했다고요. 그런데 아빠한테 All A 못받았다고 얻어 맞았다고요. 공부 않겠어요. 낙제생이면 어때요? 아빠한테 앙갚음 하는 길은 낙제라고요.”
    그건 네 스스로 네 자신을 망치는 거라고 나는 현식이 두 손을 꼭 잡고 타일렀습니다.
    “싫어요, 공부 안할거에요. 도망가고 싶어요. 아빠도 엄마도 미워요. 난 정말 미국에 오고싶지 않았다고요. 나 땜에 미국 왔다는 말 듣기 싫다고요.”
    흑흑 흐느끼는 현식이 모습이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여담이지만 당시 현식이 같은 아이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나의 소설 <억새바람>도 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늘 꾸중만 받고 자란 아이들은 “나는 별 볼 일 없다”는 자기 비하의식이 알게 모르게 자리 잡습니다.
    “나는 참 소중한 존재다.”
    “나는 꼭 훌륭하게 자라서 사회에 필요한 존재가 되겠다.”
    이런 자기 사랑과 자기 존중에서 올 바른 가치관이 만들어 집니다.
    어느 날, 딸 애 집에 갔을 때였습니다. 다섯 살짜리 손자가 달려 나오면서 하는 말, “할머니, 나는 나쁜 애예요. 엄마가 그랬어요. 난 ‘bad boy'라고요. 벽에다 낙서를 했거든요. 엄마가 새로 페인트 한 벽에다...난 정말 bad boy죠.”
    그날 나는 딸에게 단단히 일렀습니다. 아이들에게 ‘bad'라는 말을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나는 정말 좋은 사람.나는 정말 똑똑한 사람.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런 의식을 엄마가 심어 주어야 합니다. 이 의식이 일생을 좌우 합니다. 아이들에게 당당한 가치관을 심어주려면 엄마 스스로도 당당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엄마이어야 합니다.
    30,40대 여성들 뿐 아니라 60이 넘은 한국 여성들 중에도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나의 여고 동창친구만 해도 현재 미주 프랑스 은핵 지점에 부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가 아이들을 키울 때, 남편은 대학원 학생이었습니다. 한정된 수입으로 살림이 빠듯한 친구는 둘째 아이를 가져 배가 한창 불러올 때, 두 살짜리는 유모차에 태우고 남의 집에 아이 보아주러 다녔습니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힘든 환경에서 남편은 공부를 계속해 대학교수가 되었고 내 친구는 아이들이 성장한 다음에 직장생활을 시작하여 지금의 부사장 직위에 오른 것입니다.
    뉴욕 맨해튼 한 복판에 있는 친구의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깔려있는 핑크 카펫 위를 걸어서 영화배우들처럼 잘 생긴 젊은 남녀들이 수십명 앉아있는 방을 지나 친구 방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절로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맨해튼 중심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층빌딩, 저마다 똑! 소리가 날 정도로 잘 난 젊은 은행원들을 거느린 보스가 내 친구! 한국 여자라는 사실이 눈물 날 정도로 자랑스러웠습니다.

    만약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 그 친구가 그저 집에 주저앉았다면 오늘의 그 자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친구 역시 박사 과정에 있는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직장생활을 계속하여 워싱턴에 있는 IMF에 국장직까지 올랐습니다.
    그 친구 둘 다, 파출부라든가 가정부라든가, 그런 도움 전혀 없이 살림해가며 아이들 키우며 자신의 실력과 직업을 키워 낸 결과 성공한 여자들입니다.

    엄마가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여성이기에, 엄마가 그렇게 국제수준에 손색없는 실력과 교양을 겸비하였기에, 두 집 자녀들은 지금 어김없이 훌륭하게 성공했습니다. 잘 난 여성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나는 해낼 수 있다는 신념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집념과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1994년부터 시작해 방학기간 동안 서울에서 여러번 교사 연수회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영어선생님들에게 영어 교수법을 강의할 때 이야기입니다. 쉬는 시간이면 선생님들이, 특히 젊은 여선생님들이 내 방문을 자주 노크하곤 합니다. “의논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선생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젊은 여선생님들의 고민은 주로 ‘교사직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고 언제쯤 그만둬야 하는가’ 였습니다. 문제는 자녀들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이 마땅치않아 고민하는 거였습니다.

    내 딸들보다 더 어려보이는 여선생님들에게 내 생각을 전했습니다.
    지금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마세요. 한국 교사 월급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설혹 그 월급봉투를 고스란히 애보는 사람에게 준다할망정 포기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금방 자랍니다. 아이들이 자라난 후, 더군다가 아이들이 엄마 품을 떠난 후, 엄마에게는 긴 긴 세월이 남아 있습니다. 그 긴 긴 세월의 공백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아무리 힘들어도.”
    이것은 나의 진심에서 울어난 간곡한 충고였습니다. 젊은 여성들에게 이런 충고를 할 때마다 내 눈앞에 맨해튼 친구, 워싱턴 친구가 떠오릅니다.
    (주)교원이 주최하는 강연을 다닐 때, 대구지역 국장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10년전 직장생활을 시작하겠다 했을 때, 남편의 반대가 심했다고 합니다. 여자가 벌어야 얼마나 번다고 직장 나가겠다는 거냐. 집안에 들어앉아 애들이나 잘 키워라...하지만 그녀는 일을 시작했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그 지역 국장이 되었습니다.
    “선생님, 요즘엔 글쎄 나 찾는 전화가 오면 남편이 뭐라는 줄 아세요? ‘국장님, 지금 안계십니다’ 한다고요. ‘집사람 없습니다’하던 사람이 ‘국장님’으로 변했어요. 밖에서 외식하려고 만날 때 날 몰라 볼때도 있다니까요. ‘어유, 당신이야? 이렇게 멋진 여자가?’ 그런다고요.”
    실화입니다. 그 김국장이 10년 전,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을 시작하는 결단을 내렸기에, 지금은 남편이 명퇴당할까 봐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기죽지 말고 사표 내요, 내가 벌 테니까” 큰소리까지 친다고 합니다. 일하는 엄마는 이렇게 경제력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앞서가는 의식을 갖게 됩니다. 밖에 나와 활동을 하면 알게 모르게 주워듣는 지식과 상식이 많아집니다.
    한정된 울타리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집에서 살림만 하는 엄마가 직장생활하는 엄마보다 아이들을 더 잘 키운다는 건 편견입니다. 솔직히 나는 엄마들이 직장을 가지지않았다 해서 보다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에게 할애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우리 엄마는 정말 존경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의 모델은 우리 엄마다.”

    자녀가 이렇게 느낄 수 있도록 자신을 위해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엄마라면 자녀들의 가치관 교육이 따로 필요 없을 지도 모릅니다. 불행하게도 “나는 이 다음에 커서 내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미국 학교에서 아이들과 상담해보면 의외로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엄마의 삶이 너무 소모적일 때, 너무 허망해 보일 때, 아이들은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일 이외에 자신만의 삶을 가지고 있는 엄마.

    수입이 필요없는 경우라면 봉사활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고학력 부유층 여성들이 특별하게 할 일 없이 나날을 보내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에게도 사회에게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여성들도 많이 있습니다. 내 여고 동창들 중에는 직장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이 봉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한국 역사와 문화, 그리고 불교, 유교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한 다음에 전국 사찰 안내자, 박물관 해설자로 봉사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병원의 장기간 입원환자들, 찾아오는 가족도 친척도 뜸한 외로운 화자들을 찾아 보살피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가까운 친구 한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쓰나미가 휩쓸고 간 동남아 지역에 가서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며 지내고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미국 노인정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말 벗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영어로 의사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는 한국인들에게 한국 음식을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하고 한 날 미국 노인정에서 미국 음식을 먹는 한국 노인들을 보면 무엇이든 한국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어진답니다. 그 의기가지 없는 한국 노인들이 자신이 만들어간 음식을 맛있게 먹을 때, 이 여성은 남을 도울 수 있는 자신의 건강이 고마울 뿐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예로 든 이 여성들은 환갑도 지난 한국여성들입니다.
    자원봉사를 언급하면 구름잡는 이야기를 한다고, 한국 현실에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나 한다고, 어이없어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무엇이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봉사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산교육을 받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처럼 그런 엄마 한테서 아이들은 사람은 나누면서 살아야한다는 기본 정신을 배웁니다.

    봉사활동이 학교 성적표에 반영되는 제도가 언제부터인지 한국에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그 후 얼마 가지 않아 신문에서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어떤 엄마가 동창 친구인 의사를 찾아가 자기 아이가 그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한 것처럼 서류를 꾸며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를 읽으며 그 엄마의 아이가 엄마한테서 무엇을 배울까 두려웠습니다.

    그런 엄마에게서 자라난 아이가 무엇을 배울까요?
    엄마가 존경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아이들이 올바르게 성장합니다.
    신세대 여성들은 자아추구와 자기개발에 힘쓰는 여성이어야 합니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세계화의 흐름속에서 엄마는 자신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과 편견의 벽을 허물고 사고방식과 가치관의 영역을 세계 속으로 넓혀야 합니다. 이러자면 용기가 필요하고 그 용기를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나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작업이 나를 세계화 시키는 작업입니다.

    엄마의 세계화.

    재래식 사고방식에서 탈피하는 것입니다.
    옛날 여성들, 나의 할머니 어머니 시대의 여성들은 의존적인 삶을 살아 왔습니다.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뿌리 깊게 박혀있던 남존여비 사상 때문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도 한국은 너무나도 가난했기 때문에 의식주 해결 문제가 절박했고, 그런 환경에서 여성의 자아 확립이라든가 자기 개발 같은 건 상상조차 못 할 사치였습니다. 자식이 효도를 하면 천만다행이지만 요즈음 한국 뉴스를 보면 자식에게 학대 받는 노인들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것이지만 내 자식이 부모 학대하는 자식이 되지 말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신세대 여성들은 더 이상 누구에겐가 기대어 살다 인생을 마감하는 여성이 되어선 안됩니다. 남편도, 자식도, 그 누구도 나의 인생을 백퍼센트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보장해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내 생명의 주인은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중장년이 되어 “나는 지금까지 왜 이러고 살았지?” 아쉬움과 후회로 우울증까지 걸리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자녀들은 다 출가하여 곁을 떠났습니다. 하루가 지루하고 길기만 합니다. 뭔가 특별나게 할 일도 없습니다. 사우나나 찜질방에 가서 하루를 보낸다 해도 매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골프 또한 매일 칠 수도 없습니다. 딸 아들도 품안에 자식이라고 너무 자주 연락하거나 찾아가면 눈치가 보입니다.훗날, 이런 여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젊은 엄마들은 자기 개발에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책임질 수 없는 사람,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반드시 남에게 의존해야 하는 사람. 의존적인 존재는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 동등을 요구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인격적인 모독과 학대를 당하면서도 생계 때문에 매달려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로 끝나야 합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컴퓨터의 벽을 넘긴 사람도 있습니다. 미국사람이 아닙니다. 한국 남성입니다. 한국 디지털 대학 2005년도 최고령 졸업생 김석준씨는 “생이 다하는 날까지 배우고 싶은 게 꿈”이라고 했습니다.
    예순이 넘었는데 자전거 경기자가 된 한국여성이 있습니다. 이혜순씨는 이혼하고 혼자가 된 후 미국에 이민 와서 온갖 궂은 일을 다해가며 혼자 벌어서 자식들을 대학까지 졸업시키고 자신도 공부하여 나중에는 세계금융 수도인 뉴욕에서 회사 부사장까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더 늙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54세에 자전거 전문경기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환갑이 넘었지만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에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70세에 은퇴한 변호사 샘 피터스는 평생 꿈이던 노래공부를 시작해 코러스 멤버가 되어 카네기 홀에서 합창공연을 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나이 들어서 자녀들에게 ‘지겨운 엄마’ ‘지겨운 시어머니’가 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자녀들의 사생활을 지나칠 정도로 참견하고 간섭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살아온 생활의 전부가 가족이었기 때문에 자녀들이 결혼했어도 간섭, 간섭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본인은 그것이 간섭이고 참견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럴 수 있어?” 괘씸해하며 눈물을 흘리는 엄마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친구들에게도 친척들에게도 자존심 상해 하소연도 못하고 혼자 속을 푹푹 끓이다가 끝내 홧병이 되어 각종 질환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손자손녀들 돌봐주는 것이 의무인 할머니.이 또한 나의 세대로 끝나야 합니다. 나는 예순 생일에 큰 딸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엄마, 이제부터는 오직 엄마 자신만을 위해 사세요. 엄마가 80까지 100살까지 사신다해도 80이 넘으면 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지금처럼 여행다니며 하고 싶은 것 다해가며 사시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아빠에게도 우리에게도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엄마가 원하는 삶을 사세요. 설혹 아빠나 우리들이 섭섭해 한다해도 상관마세요. 엄마에겐 하루하루가 금싸라기 같은 세월입니다. 엄마 자신만 생각하세요.”

    자식도 손자도 남편마저도 ‘나 다음’이라고 간곡하게 당부하는 딸애의 말이 오래 가슴에 여운을 남깁니다. 누구의 딸이었다가 누구의 부인이었다가 누구의 엄마, 그리고 누구의 할머니로 살다가는 여자의 인생은 지금 60이 넘은 내세대로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나의 생명을 멋지고 값지게 살아 줄 의무가 있다.” 사르트르의 말입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엄마를 아이들은 좋아합니다. 남편도 속으론 좋아합니다.
    “엄마, 나도 엄마 같은 사람으로 키워주세요”라고 말하는 엄마가 되십시오.

    김유미작가의 홈페이지 www.kimyum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