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의 문명사적 의의

이영훈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09.07.14 14:48:09

헌법을 읽자


▲ 1948년 8월15일 중앙청광장에서 열린 정부수립식. ⓒ 뉴데일리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성립하였습니다. 그날에 세계만방을 향해 독립국임을 선포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국제(國制)는 자유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민주공화국입니다. 제헌헌법 제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헌법 제8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 평등하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 한다”고 하였습니다. 헌법 제9조는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 구금, 수색, 심문, 처벌과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 한다”고 하였으면, 헌법 제13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받지 아니 한다”고 했습니다.
독자 여러분 가운데는 제가 상식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불편해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말해 우리 주변에는 헌법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거나 한 번도 자세히 읽어 보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그러했습니다. 돌이켜 보니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16년간의 세월에 헌법을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읽어 보라고 권유한 선생님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우리나라 헌법을 읽어 본 것은 나이 50이 다 되어서였습니다. 성슌관대학교에서 재직할 때인데요, 법과대학의 어느 교수님이 《한국헌법사》(학문사, 2000)라는 책을 저술한 다음 저에게 한 권 주셨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을 차분하게 읽어 보았습니다. 저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문장도 좋지만 그 뜻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아, 이런 헌법을 이제야 읽다니.” 그런 반성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저와 같은 분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오늘이라도 서점에 들러 헌법사 책을 사서 제헌헌법 이래의 역대 헌법을 읽어 보도록 하십시오.

자유민주주의 국가

그럼 지금부터 대한민국의 건국에 담긴 커다란 역사적 의의에 관해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첫째,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을 기초로 해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한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조선왕조 시대에는 일반 백성의 정치적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의 헌법이라 할 만한 것으로 15세기의 《경국대전》(經國大典)이란 법전이 있는 줄 잘 아실 겁니다. 거기에 보면 일반 백성의 법적 지위는 ‘전부’(佃夫)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조금 생소한 말이겠습니다만, ‘전부’의 전(佃)은 남의 땅을 빌려서 경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전부’는 남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농부라는 뜻이 되지요. 요사이 말로 하면 소작농이 됩니다. 백성이 왜 소작농입니까. 다름 아니라 나라의 모든 땅이 임금님의 소유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조선왕조의 백성은 임금님의 은덕으로 임금님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농과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런 백성에게 무슨 정치적 권리가 인정됐겠습니까.
1899년 고종황제가 반포한 대한제국의 국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2조에서 “대한제국의 정치는 만세불변의 전제정치이다”고 선포한 다음, 제3조에서 “대황제께서는 무한한 군권(君權)을 향유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황제의 절대적 권리 앞에서 일반 백성의 권리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에 대해 고종황제는 “민(民)은 피치자로서 정치·결사는 물론 정치적 발언도 할 수 없다”고 명확히 입장을 표명한 바 있습니다.
당시 대한제국은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고 있었는데, 토지대장에서 일반 소유자를 가리켜 ‘시주’(時主)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자세히 그 뜻을 증명한 적이 있습니다만, 임시적인 주인이란 뜻입니다. ‘시주’의 반대말은 ‘본주’(本主)인데요, 전국 토지의 ‘본주’는 황제 자신이라는 뜻이 그 ‘시주’ 규정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대한제국은 황제의 무한 군권을 선포하면서 토지제도와 관련해서는 이 같이 백성의 권리를 제약하는 ‘시주’라는 규정을 만들어 냈지요.
뒤이은 일제하의 식민지기는 어떠했습니까. 앞서 제5장에서 이 시기에 근대적인 법과 제도가 이식되었다고 했습니다만, 정치의 영역과는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일제가 파견한 총독은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행사한 사람이었습니다. 삼권을 통합한 전제군주나 다를 바 없는 존재이지요. 조선인들은 세금을 내면서도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앞서도 지적하였습니다만, 가족주의 원리의 천황제 국가인 일본 자체가 아직 자유민주주의를 잘 몰랐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이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하게 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천황제 국가가 해체된 이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1948년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이 국민주권의 민주주의를 선포하였을 때, 그것은 한국의 역사만으로는 잘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한 정치원리는 1876년 개항과 더불어 바깥 세계에서 슬슬 들어온 것입니다.
국민주권의 정치원리를 최초로 제도화한 나라는 어딥니까. 다 잘 알다시피 1776년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이지요. 이후 미국의 민주주의는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 여러 나라로 건너가 점차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이 국민주권의 민주주의를 선포한 것은 그렇게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문명의 파도가 이윽고 극동의 한반도에까지 상륙했음을 의미합니다. 그 구체적인 국제정치적 역학과 관련하여 미국의 역할이 어떠했는지는 지적하기도 싱거울 정도입니다.
1954년 7월 3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취지로 이야기합니다.

미국도 원래 식민지 탄압에 신음했다. 미국의 독립은 타국의 영토와 민족을 지배하던 낡은 제국주의를 근멸시키고 수만 리 밖의 피압박 민족을 해방시키는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은 자유와 정의의 이름으로 세계 모든 국가와 국민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 한국 국민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맞이하여 그간 미국의 도움에 감사함과 아울러 우리도 독립과 자유의 정신을 앙양(昻揚)해 갈 것을 확언 하는 바이다.

저는 이 메시지에서 이 나라가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지를 더없이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초대 대통령의 진실한 마음을 읽었습니다. 이를 두고 약소국이 강대국에 바치는 외교적인 비사(卑辭)라 치부하지 마십시오. 제가 보기에 그것은 독립과 자유에 대한 신종선서(信從宣誓)와 같습니다.

자유시장 경제체제

둘째, 신생 대한민국은 개인의 재산권과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제헌헌법 제15조는 “재산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경제활동의 자유는 1962년 개정 헌법에서 보다 명확하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동 헌법 111조는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재산권과 경제활동의 자유는 시장경제의 바탕으로서 경제성장의 기초적 조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제적 번영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재산권에 기초하고 있지요. 그 재산권의 내용과 한계를 규정한 법률은 민법입니다. 민법이 어떠한 과정으로 성립했는지에 관해서는 제5장에서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다시 간략히 말씀드리면 1912년 조선민사령의 시행을 통해 일본의 민법이 조선에 이식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소유권 절대의 원칙’과 ‘계약 자유의 원칙’을 골간으로 하는 근대적인 재산세도가 유·무형의 재산권에 걸쳐 포괄적으로 성립하였습니다. 그 민법 또한 역사적 기원이 서유럽으로서 일본을 거쳐 들어 온 수입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식민지기에 성립한 근대적 재산제도를 신생 대한민국은 온전하게 계승하였습니다.
함부로 식민지적 잔재라 하지 마십시오. 그 기원이 서유럽이었던 만큼 그것은 세계인이 보편적으로 향유할 문명의 값진 유산이었습니다. 제9장에서 이야기했습니다만, 사회주의 북한은 1946년 일제가 제정한 민법을 포함한 일체의 법률을 폐기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북한이 문명의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고 말았던 비극에 대해서는 이미 지적한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한마디 덧붙일 것은 근대적인 재산제도가 안정적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실상의 사유재산이 전통사회에서부터 성숙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고 형식적인 제도만 성립할 경우, 그 제도는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한 경우를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후진국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부의 탄생》(시아출판사, 408쪽)이란 책에서 읽었습니다만, 지금도 페루의 리마에서 집 한 채를 구입하는 데 728가지의 절차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한 개인이 소유권의 주체로 성립해 있지 않고, 가족과 친족과 촌락 등 여러 사람이나 단체가 권리를 분할해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재산제도를 만들어 봤자 별 소용이 없는 것이죠. 오늘날 제3세계가 안고 있는 빈곤과 저성장의 주요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에 비하자면 19세기까지 조선의 전통사회에서는 사실상 근대에 준하는 높은 수준으로 재산권이 성숙해 왔습니다. 앞서 소개한 대로 15세기의 《경국대전》은 일반 백성을 소작농에 준하는 ‘전부’(佃夫)의 지위로 규정했습니다만, 이 규정은 17세기 이후가 되면 거의 효력을 상실합니다. 그 대신 토지대장에 ‘기주’(起主)라 하여 백성이 토지의 사실상의 주인임을 표시하는 규정이 나타나기 시작하지요. 그러다가 조금 전에 이야기한 대로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시주’ 규정을 만듭니다만, 그것은 대한제국과 더불어 곧바로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연후에 식민지기에 이르러 근대 민법의 도입으로 일반 인민이 오늘날과 같은 ‘소유자’라 하여 재산권의 주체로 확립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제헌헌법이 보장한 근대적인 재산권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전통으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유산이 있었고 그것이 일본을 통해 들어온 근대적 소유법제와 잘 어울렸다는 역사적 전제가 작용해서 가능한 일이었지요.

농지개혁

이상과 같이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경제적으로 자유시장 체제를 국제의 기본으로 하여 출발하였습니다. 건국의 역사적 의의와 관련하여 한 가지 언급을 빠뜨릴 수 없는 문제가 있군요.
농지개혁이 그것입니다. 종전까지 농촌사회는 지주제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토지를 가난한 소작농에게 빌려 주고 수확의 절반을 지대로 수취하는 생산관계가 지주제입니다. 그 역사적 기원이 15세기 조선왕조 초기로까지 올라갑니다만, 지주제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개항기와 식민지기에 걸쳐서입니다. 1936년 현재 전체 농가의 75%가 순소작이나 자소작으로 소작관계 농민이었습니다. 소작농들은 지주에 수확의 절반을 바치면서도 소작지를 떼이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했던, 사실상 농노나 다를 바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런 약탈적인 토지이용관계를 그냥 두고서는 근대국가에 합당한 인격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립적인 국민의 성립을 기대할 수 없지요. 농지를 경작 농민에게 분배하는 토지개혁은 시대적 당위로서 피해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제헌헌법은 농지개혁을 선언했습니다. 제86조가 그것입니다.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농지 소유의 상한은 3헥타르로 정한 다음, 그 이상의 모든 농지를 지주로부터 유상으로 수용하여 소작농에게 유상으로 분배하였습니다.
유상으로 수용하고 분배한 것을 두고 북한의 무상수용과 무상분배보다 덜 개혁적이었다는 주장을 가끔 듣습니다만, 이는 잘못입니다. 유상으로 수용하고 분배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인 사유재산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무상 개혁은 이 핵심 원리의 부정입니다. 그래서 농민에게 토지가 분배되었지만, 무상 분배인 한에서 그 소유권은 온전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산 것이 아닌데 어찌 온전한 사유재산이 되겠습니까. 당연히 북한 당국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준 다음 매매나 저당 같은 재산권의 처분 행위를 제한하였습니다. 그러고선 어떻게 되었습니까. 토지를 나누어 준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두 회수하여 집단농장체제로 가고 말았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에서 농지개혁이 시행된 결과, 농촌 주민은 모두 자작농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한국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 있은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국가가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준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722년 통일신라가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나누어 주었다”라고 한 기록이 처음입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으론 당시의 ‘백성’이란 농촌사회에서 중상층의 지위에 있던 농민을 가리키며, 하층 농민까지 분배의 대상이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은 유사 이래 농민이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게 된 일대 쾌거였습니다. 그 결과 어떠한 변화가 생겨났습니까.

애비는 종이었다

독자 여러분은 시인 서정주의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하는 <자화상>(1937)이란 시를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위대한 서정시인은 애비가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시인은 종의 신분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노비문서를 보면 수개(壽介)라는 점잖게 생긴 이름이 자주 눈에 뜨입니다만, 실제론 수캐라는 뜻입니다. 시인은 자신을 그 수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처럼 헐떡이며 나는 왔다.” 저는 아직 이렇게 자신의 천한 신분을 한 시대의 아픔으로 승화시켜 노래하는 고결한 영혼을 접한 적이 없습니다. 흔히들 시인을 친일파라고 욕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이 시 하나만으로도 그를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노비라 하니 생각이 납니다만, 1920년대 전라도 구례군 토지면의 유씨 양반가의 일기는 정월 초하루에 집안의 종들이 찾아와 사랑에 앉은 주인을 향해 세배를 드리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날 주인은 “비록 세상이 변하였지만, 주노(主奴)간의 상하 의리는 변하지 않는구나”라고 일기에다 적었습니다. 그렇게 해가 바뀌면 주인집을 찾아 마당에서 수캐처럼 엎드려 세배를 드려야 했던 것이 종놈의 처지였습니다. 그 종놈의 신분이 농지개혁으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농지를 분배받은 그들은 토지를 팔고 자기의 원래 신분을 모르는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새로 토지를 구입하여 독립자영농으로 열심히 일하여 꿈에 그리던 일가를 창립하지요. 그중에는 자식농사를 잘 지어 초등학교 교사까지 시킨 사례가 채집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사민평등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지요. 빈농의 자식이라도 머리만 좋으면 대학에 다니고 판검사도 하고 심지어 대통령까지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 제헌헌법이 선포하고 있는 그대로 어떤 형태의 차별도 특수계습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은 건국의 이념이 농지개혁을 통해서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농지개혁은 ‘나라세우기’(state building)와 더불어 전개되어야 할 ‘국민만들기’(nation building)의 첫걸음이었습니다.
 농지개혁의 효과에 관해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비판적인 견해가 우세했습니다. 정부가 직접 수용하여 분배한 토지가 전체개혁 대상의 절반도 되지 않은 가운데, 많은 토지가 지주에 의해 은닉되거나 사전에 소작농에게 고가로 강제 처분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최근의 여러 구체적인 연구는 지주가 사전 방매한 토지의 가격이 법정 상환가격보다 높지 않음이 일반적이었으며, 또 대량의 사전 방매도 결국 개혁의 강제성 때문인 만큼 크게 보아 농지개혁의 효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재인식》에 실린 장시원 교수의 논문, <농지개혁ㅡ지주제 해체와 자작농체제의 성립ㅡ>은 이러한 새로운 동향의 연구 성과를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농지개혁으로 지주제가 소멸하고 전 경지의 96%가 자작지로 바뀌었습니다. 농지개혁의 효과는 어느 정도 국가체제가 안정된 1950년대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농지를 소유하게 된 농민들의 생산의욕으로 농업생산력이 부쩍 증가하기 시작했지요. 역시 생산자 대중이 자기 재산을 갖게된 개혁의 역사적 의의는 깊고 큰 것입니다.

『 애비는 종이였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의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소경영적 개혁

장시원 교수의 논문에서 주목되는 한 가지는 농지개혁이 ‘소경영적 개혁’이라는 주장입니다.
너무 중요한 개념이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군요. 실은 토지개혁은 여러 후진국에서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공의 예가 드물지요. 예컨대 멕시코의 경우 1821년에 독립한 뒤 지금까지 세 차례나 큰 토지개혁이 시행되었습니다만, 매번 실패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이 가난을 못 이겨 얼마 있지 않아 토지를 다시 백인 지주들에게 팔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토지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토지를 분배 받은 농민들이 자립적으로 농업을 꾸려나갈 경제적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역사적 전제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설명할 여유는 없습니다만, 관련 연구에 따르면 17세기 이래 농민의 소농으로서의 자립성은 크게 높아져 왔습니다. 앞서 이 시기에 사실상의 사유재산이 발달했다고 했는데, 그것과 짝을 같이 하는 현상이지요. 19세기에 들어와 경제적으로 큰 혼란이 있었던 것은 제3장에서 서술한 그대로입니다만, 17~18세기의 전통사회가 이룩한 소농경영의 자립성은 세계적으로 꽤 높은 수준이었으며, 20세기의 식민지기를 거치면서 더욱 높은 수준으로 고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농지개혁은 이렇게 역사적으로 그 자립도를 높여 온 소농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였으며 그 이유로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그와 대조적인 또 하나의 실패를 사회주의의 토지개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북한이나 중국에서 강행된 집단농장이 인민들에게 기아의 비참한 선물을 안겼을 뿐임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소농경영의 높은 생산력을 강제로 파괴한 업보였지요. 북한은 아직 그 모양입니다만, 사회주의 중국이 덩샤오핑[鄧小平] 시대에 들어 인민공사를 폐지하고 개별 소농체제로 돌아가자 농업생산이 얼마나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습니까. 바로 그러한 전통사회로부터의 유산을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은 처음부터 잘 간직하고 발전시켰던 것이지요. 장시원의 ‘소경영적 개혁’이란 바로 그러한 뜻입니다.

전통에 바탕을 둔 문명사의 전환

이상을 토대로 1948년 8월 15일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건국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를 간략히 정리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이 기초하고 있는 자유, 인권, 국민주권, 사유재산, 시장경제 등의 문명은 원래 서유럽 기원으로서 20세기에 들어 일본과 미국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온 것입니다. 제3장에서 20세기의 역사를 대륙농경문명에서 해양상업문명으로의 전환으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만, 대한민국의 성립은 바로 그러한 문명사의 대전환으로 맺어진 결실입니다. 그렇지만 끝내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대전환의 역사적 전제로서 전통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사유재산제도와 농지개혁은 전통사회에서 근대에 준하는 재산권이 발달하고 농업경영의 주체로서 개별 소농의 자립이 추진되어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점에서 대한민국의 성립은 문명사의 대전환임과 동시에 전통의 발전적 계승이기도 했습니다. 진정 그러했기에 건국 초기의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된 1960년대부터 다 잘 아시는 대로 대한민국의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지요.
 건국사와 관련하여 한 가지 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을 주도한 정치세력을 동일한 시각에서 어떻게 재평가해야 좋을까요. 바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깊이 연관된 논의 과제입니다. 그를 위해 장을 넘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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