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국주의의 조건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군사력이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중국과 서유럽의 군사력은 비등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영국을 필두로 서유럽의 여러 나라가 산업혁명을 수행하고 난 19세기부터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지요. 동아시아에서 서유럽의 제국주의 지배 체제가 성립한 것은 필경 그 때문이었습니다. 서유럽의 무기는 막강하였습니다. 예컨대 1898년 영국군은 20정의 기관총을 가지고 불과 몇 시간 내에 1만 1,000명의 수단인을 사살하였습니다. 영국군의 사상자는 불과 348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제국주의의 상징은 총이였습니다. 이외에도 제국주의를 가능케 한 것으로 전신, 증기선, 철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 교통·통신혁명으로 제국주의의 군대는 신속하게 원주민의 저항을 진압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식민지 지배의 경제적 수익성을 드높일 수 있었습니다. 키니네의 발견이 제국주의를 가능케 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지요. 유럽인들이 열대 지역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말라리아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키니네의 덕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제국주의의 지배는 물리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일제의 조선 지배를 보더라도 총으로 상징되는 물리적인 힘이 노골적으로 동원된 것은 3·1운동 당시의 1회로 국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국주의의 지배는 정신적이며 문화적인 것이기도 했습니다. 제국주의는 새로운 질서였습니다. 제국주의는 진보의 화신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제국주의는 자기 자신을 새로운 문명의 메신저로 선전합니다. 그리고 식민지의 많은 사람이 그러한 선전에 동의하게 됩니다. 그들은 슬슬 제국주의의 협력자로 변해 가지요. 그들은 그들의 협력으로 그들의 민족이 제국과 같은 선진 문명으로 발전해 갈 것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협력했던 것이지요. 따지고 보면 식민지에서 제국주의자들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손에 총을 들고 있긴 했지만 그들은 낯선 지방에서 다수의 적대적인 원주민에 둘러싸여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의 식민지 지배가 가능하였던 것은 그들에게 우호적인 다수의 협력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협력자를 더 이상 끌어낼 수 없거나 협력자들이 등을 돌릴 때 제국주의는 위기에 처합니다. 그러니까 제국주의의 역사는 동시에 협력자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식민지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은 가장 많을 때 75만여 명으로서 전체 인구의 2.7%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주로 도시와 항구에 거주하였으며 내륙이라도 철도가 통하는 지역을 멀리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순 농촌부로 들어가면 한 면에 주재소 순사, 소학교의 교장과 교사, 수리조합과 금융조합의 직원 등을 합쳐 그 수가 대여섯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총독부의 지배체제는 꽤 강건하게 효율적으로 작동하였습니다. 다수의 자발적인 협력자 덕분이었습니다. 이제까지 한국의 역사가들은 민족의 부끄러운 면이라 하여 이에 대해 잘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만,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되풀이되고 있습니다만 민족만이 역사의 주체는 아니지요. 역사에 있어서 궁극의 주체는 개별 인간입니다. 그렇게 역사에 대한 시선을 조정한 다음 식민지기를 살았던 인간들의 삶 자체를 중심에 놓고 역사를 풀어가야 마땅하지요.

    중인 출신의 협력자들

    협력자들은 주로 전통 조선시대에 신분이 억눌린 계층에서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전장에서는 경상도 예천의 어느 마을에서 을사조약 이후 상민들의 신분이 해방되어간 예를 들었습니다만, 비슷한 이야기는《재인식》2권의 말미에 실린 편집자들의 대담 가운데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일제가 망하자 양반 마을에서는 환성이 울려 퍼졌지만 상민 마을에서는 조용했다는 겁니다. 서북인들, 곧 평안도 출신의 사람들에게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가 망하자 평안도 사람들은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고 합니다. 조선왕조는 평안도 사람들을 차별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과거시험의 기회가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집단적으로 차별받은 주민이라면 왕조의 멸망을 기뻐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협력자를 대표한 세력은 주로 아전(衙前)이라는 구래의 중인 신분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대를 이어 군현의 행정 실무를 담당한 계층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셈을 할 줄 아는 전문적인 지식인이었지만 그들의 사회적 진출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양반관료로부터 심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1876년 개항 이후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자 그들은 다른 어느 계층보다 재빨리 그에 적응합니다. 원래 실무와 정보에 밝았던 그들이었지요. 그들은 상인으로 또 지주로 변신하여 경제적으로 성공하였습니다. 이후 식민지기의 농촌사회는 이들 중인출신의 신흥지주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반면에 구래의 양반신분으로서 시대의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사람은 적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민족이 지배하는 식민지기는 하늘의 도가 무너진 난세와 같았습니다. 이에 정통 양반신분의 사람들은 대개 은둔의 생활 자세를 보이거나 소극적으로 시세에 적응할 뿐이었습니다.
     신흥지주들은 대체로 그들의 사회적 성공을 가져다 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협력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직접 총독부의 관료로 진출하거나 각급 협의회의 위원으로 활약하였습니다. 예컨대 1925년 전국에 군수를 지낸 250명의 조선인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중인 출신이었습니다. 신흥지주들은 대체로 그들의 자식을 일본으로 유학시켰습니다. 일본으로 간 그들의 자식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중심인 일본의 신문명에 압도되면서 일제의 협력자로 키워집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역사의 진행은 언제나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지요. 유학생들이 배우게 되는 새로운 문명의 기초 가치는 무엇입니까.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정신이지요. 그것은 곧 부당한 차별에 대한 저항이지요. 유학생들은 그렇게 민족의식을 자각하면서 민족의 장래를 기획하고 실천하는 민족적인 지식인으로 바뀝니다. 그들의 정신세계에서 협력과 저항의 경계는 분명치 않았습니다. 한국의 근대 문화와 학문은 대부분 이 같은 정신세계의 일본 유학생들로부터 나왔습니다. 역사학의 최남선, 문학의 이광수, 한글학의 최현배, 경제학의 백남운 등, 예를 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지경입니다.

    협력과 저항의 역설

    우리의《재인식》에는 이 같은 협력의 실태와 정신세계에 관한 좋은 논문들이 몇 편 실려 있습니다. 우선 이혜령 교수의 <한글운동과 근대미디어>라는 논문을 소개하겠습니다. 한글운동이라 하면 사람들은 식민지기의 대표적인 민족운동의 하나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논문을 읽으면 반드시 그렇게만 이야기할 수 없는 복잡한 식민지기의 현실을 접하게 됩니다. 한글학자들이 한글의 맞춤법을 통일하고 그것을 보급하는 데는 총독부와의 협력이 절실하였습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한글학자들이 서로 다른 방식의 맞춤법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최현배와 같이 한글파에 속한 학자들은 ‘ㅆ’이나 ‘ㄶ’과 같은 쌍받침이나 겹받침의 사용을 주장한 반면, 정음파의 학자들은 그러한 복잡한 받침의 사용에 반대하면서 소리 나는 대로 적을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양파의 팽팽한 대립은 1930년 2월에 한글파의 주장대로 한글 맞춤법이 통일됨으로써 끝이 납니다. 총독부가 한글파의 손을 들어 주었던 것이지요. 정음파의 저항은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성경이 원래 정음파의 맞춤법으로 쓰였으니까요. 그렇지만, 통일 맞춤법의 보급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장소는 학교였습니다. 그 학교가 총독부의 통제 하에 있고 총독부가 한글파의 손을 들어 준 이상 한글파의 승리는 거역할 수 없는 대세였습니다. 결국, 기독교계도 1937년이면 한글파의 맞춤법 통일안을 수용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맞춤법의 통일과 한글의 보급이라는 민족운동은 총독부의 지배정책과 긴밀한 협력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저항과 협력의 경계는 불분명하였고 구체적 현실에서 양자는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저항이 협력이기도 하고 협력이 저항이 되기도 하는 역설적인 관계는 조선처럼 제국주의의 완전 식민지였던 곳에서는 거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 식민지에서 제국주의의 지배는 정신과 물질에 걸쳐 또는 시간과 공간에 걸쳐 포괄적이며 총체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몇 년 전에 저는 이성시 교수의 <조선왕조의 상징공간과 박물관>(《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휴머니스트, 2004)이라는 논문을 읽으면서 그러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제는 조선왕조의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세 왕궁을 박물관, 미술관, 동·식물원으로 민간에 개방합니다. 민간은 이전의 왕궁이란 성스러운 공간이 이제는 일제의 완벽한 통제하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됩니다. 그 박물관에 진열된 역사적 유물의 상당 부분은 일본의 일류 고고학자들이 직접 발굴한 것입니다. 아니면 넘어지거나 반쯤 묻혀 있거나 깨진 것들을 모아서 정리하고 보존한 것들이지요. 그 유물을 통해 일제는 너희 조선도 우리 일본처럼 얼마나 훌륭한 문화였던가 하고 이야기를 건넵니다. 그것을 보는 조선인의 심정은 어떠했습니까. 깨어지고 흩어진 자신의 역사를 정리해 준 일에 감사하면서도 다른 한편 일본이 자신의 역사를 마음대로 재단하고 있음을 보고 부끄러워했지요. 실제로 최남선 선생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일제의 고적조사사업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일본인의 손을 통해 처음으로 조선인 생명의 흔적이 천명된 것은 얼마나 큰 민족적 수치인지”라고 탄식해 마지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경주의 석굴암이 일본인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된 것이고 그때 일본인들이 석굴암이야말로 동양예술의 진수라고 흥분해 마지않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오히려 부끄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친일 내셔널리스트

  • 다시《재인식》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조관자 교수의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는 친일파의 대표 주자로 알려진 이광수의 정신세계를 분석한 것입니다. 일본 유학생 출신의 이광수는 잘 알려져 있듯이 근대 문학을 개척한 선구자이자 당대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때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에도 참여하였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협력자로 돌아선 것은 적어도 개인적인 영달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흔히들 친일파라 하면 그렇게 알고 있지만, 조관자의 논문은 그러한 통설적 이해를 정중히 거부합니다. 오히려 이광수는 진지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름 아니라 일본을 조선이 본받아야 할 선진 문명으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선의 불결, 무질서, 비겁, 무기력 등에 절망합니다. 그러한 야만의 조선이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일본인처럼 깨끗하고 질서 있고 용감하며 협동하는 문명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길이야말로 조선 민족이 재생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그는 정직하였습니다. 조관자 교수는 그러한 정신세계의 이광수를 ‘친일 내셔널리스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친일을 하는 민족주의자! 이 얼마나 모순된 표현입니까. 그러나 저는 그러한 모순된 표현에서 이광수만이 아니라 식민지기를 살았던 대다수 지식인의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서 협력과 저항은 신구 두 문명이 격렬히 충돌하는 고통이었으며, 그 속에서 문명인으로 소생하기 위한 실존적 선택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식민지기의 그러한 정신세계는 최경희 교수의 논문 <친일문학의 또 다른 층위ㅡ젠더와《야국초》>에서 더없이 섬뜩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저는 경제사 전공자로서 문학사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습니다만, 이 논문을 읽다가 어느 대목에서 전율을 느꼈습니다. 최정희라는 여류 작가의 《야국초》라는 소설은 1942년 어느 조선인 어머니가 열 살 날 아들을 데리고 일본군 지원병 훈련소를 방문하여 아들에게 훈련소를 견학시키면서 아들이 나이가 차면 일본군으로 보낼 것을 다짐하는 내용입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일제는 1944년부터 조선에서도 징병제를 실시할 계획을 발표합니다. 이러한 시국에서 최정희의 《야국초》는 두말할 필요 없이 선전의 목적으로 쓰인 친일문학이지요. 그렇지만, 최경희 교수는 정치적 입장이 그렇다고 하여 소설의 저변에 깔린 문화적 요소의 의미마저 모조리 무시해서는 곤란하다고 하면서 종전까지 소홀하였던 여성의 시각에서 소설을 다시 읽자고 제안합니다. 그 어머니는 간호부라는 직업을 가진 신여성으로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어느 조선인 유부남과 사랑을 나누었습니다만, 아기를 임신하자 남자는 배신하고 맙니다. 어머니는 낙태의 유혹을 이기고 아들을 사생아로 낳지요. 어머니가 그 아들을 일본군에 보내려고 하는 것은 그 아들을 비열하고 무책임한 조선의 사생아가 아니라 정직하고 책임 있는 제국의 아들로 바치고자 하는 뜻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배신한 조선의 남자에게 복수하는 겁니다. 바쳐진 아들은 결국 전쟁에 나가 죽게 되겠지요. 어머니는 그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결국, 이 소설은 단순한 친일 선전문학이 아니라 남성과 제국의 횡포에 속절없이 순응하며 희생할 수밖에 없는 식민지 여성의 절망과 죽음을, 나아가 작가 최정희 자신의 정신적 죽음을 그린 것입니다. 제가 전율을 느낀 것은 최경희 교수의 섬세한 분석이 이 대목에 미칠 때였습니다. 다시 말해 협력은 절망이고 죽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저항이 아닙니까. 협력과 저항의 경계는 그렇게 다시 한번 애매해졌습니다.

    제국의 이등시민으로서

    이광수나 최정희와 같은 적극적인 협력자들이 조선이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순수하고 정직한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조선의 자손들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것은 당시 일본제국의 판도가 공간적으로 대폭 확장하고 있었던 객관적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931년 일제는 만주를 침략하여 만주국을 세운 다음, 1937년에는 중국과 전면전을 벌여 중국의 주요도시를 점령하였으며, 1941년부터는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벌여 동남아시아와 호주를 제외한 남태평양 전역을 장악하지요. 일본제국은 실로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빛나 보였습니다. 그 일제로부터의 독립은 실현 불가능으로 보였습니다. 그 대신 넓어진 제국의 판도는 조선인에게는 자연스럽게 제국의 이등시민 지위를 부여하였습니다. 원래 내선일체(內鮮一體)라 했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조선인 스스로 이등시민을 자처하면서 반도를 벗어나 만주로, 중국으로, 동남아로 활발히 진출하였던 것이 1930~40년대였습니다.

  • ▲ 대동아공영권의 판도. ⓒ 뉴데일리
    ▲ 대동아공영권의 판도. ⓒ 뉴데일리

    그 점을 잘 보여주는《재인식》에 실린 논문이 김철 교수의 <몰락하는 신생ㅡ만주의 꿈과 《농군》의 오독>입니다. 이 논문도 문학에 문외한인 저에게 큰 자극으로 읽혔습니다. 이 논문에서 김철 교수는 식민지기의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져 온 이태준의 소설 《농군》이, 실은 일제의 만주개발 정책에 잘 부응한 국책소설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친일문학을 지금까지 민족문학으로 간주했다니, 그럴 수도 있는가 싶을 정도로 어이가 없습니다만, 김철 교수의 해부는 날카롭기 짝이 없습니다. 1938년 이태준은 몇 사람의 문인과 동행하여 만주를 여행합니다. 만주로 이민 간 조선 농민의 마을을 시찰할 목적에서였지요. 그 마을은 1931년의 이른바 만보산(萬寶山)사건으로 유명한 그 마을이었습니다. 1931년 만보산에 들어온 조선 농민은 만주의 밭을 논으로 개간하기 위해 20여 리나 떨어진 강에서 물을 끌어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토민이라고 무시한 주변의 중국 농민과 충돌이 발생합니다. 중국 농민들의 땅을 함부로 침범했던 것이지요. 중국 농민들이 들고일어나 수로를 파괴하자 조선 농민들은 일본영사관에 도움을 요청하여 중국인들을 물리칩니다. 그 과정에서 쌍방에 사람이 죽거나 다친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7월 국내의 조선일보가 만주의 중국인들이 조선 농민을 습격하여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는 오보를 내지요. 그러자 전국 도처에서 화교들에 대한 물리적 공격이 벌어집니다. 평양이 가장 심하였는데, 무려 127명의 화교가 살해당하고 393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것이 만보산사건의 전말입니다. 그 사건 7년 뒤 만주를 여행한 이태준은 ‘식민지 모국의 지식인’처럼 만주의 이 도시와 저 도시를 이국취향으로 즐겼을 뿐 아니라 만보산에 들러 만주 개척의 성공 실태를 확인하고 만족스러워합니다. 만주는 그렇게 조선 농민의 덕분에 마적이나 출몰했던 황무지에서 풍요로운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소설《농군》은 겉으로 보기엔 고향을 떠나 험한 만주 땅에서 힘써 개간에 성공하는 한 진취적인 조선 농군을 다룬 민족소설 같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김철 교수는 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시대적 맥락을 위와 같이 짚어 냄으로써 민족소설로 알려져 온 것을 단번에 친일 국책소설로 뒤집어 버렸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이 한반도로 건너와 여기저기에 농장을 차리던 때를 떠올렸습니다. 그 때 주변의 조선 농민과 많은 충돌이 발생했는데 그 역시 수리 시설 때문이었습니다. 1930년대가 되자 만주에서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였군요. 앞에서는 일본인이 조선인을 멸시하였는데, 뒤에서는 조선인이 중국인을 멸시하고 있군요. 비슷한 이야기를 싱가포르의 수상 리콴유의 자서전 《일류국가의 길》(문학과 사상사, 672쪽)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리콴유는 자기의 한국인에 대한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했을 때 한국인 ‘외인부대’가 뒤를 따라 들어왔는데 몹시 거칠었고 일본군만큼이나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는군요. 아마도 일본군의 뒤를 따른 조선인 군속들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제국의 판도가 넓어지면서 조선인은 다른 약소민족에 대한 억압자로 변신하고 있었습니다. 협력의 전선이 국제적으로 확장되면서 협력의 내용까지 바뀌어 간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 다룰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그러한 예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