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적 민족주의 비판

    《재인식》에 실린 논문의 주제는 아닙니다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과 관련하여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펼치려면 한 가지 피해갈 수 없는 문제가 있군요. “조선왕조는 왜 망하였나”라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이 문제만 나오면 사람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집니다. 잘못 말했다가 큰 봉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그런 사람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역사학자들은 조선왕조가 망한 원인에 대해 잘 이야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역사교과서를 보더라도 조선왕조가 망한 원인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문맥 그대로라면 일제가 쳐들어왔기 때문에 조선왕조는 망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어김없는 사실입니다만, 의미 없는 동어반복에 불과하지요. 그런 식이라면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겠다는 무책임한 자세에 불과합니다. “일제가 쳐들어왔는데 왜 막지 못했는가”하고 진지하게 되물어야 합니다. 조선은 큰 나라입니다. 일본에 비해 국토가 2/3나 되고 인구가 1/2이나 되지요. 그런 큰 나라가 왜 그렇게 맥없이 무너졌던가. 고통스럽지만 그러한 질문을 성찰의 화두로서 던져야 합니다.
     역사학자들이 그러한 질문을 잘 던지지 않은 것은 한 가지 그럴듯한 모범답안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한영우 교수가 그의 《다시 찾는 우리역사》(경세원, 1997)에서 제시한 ‘선량한 주인’과 ‘강포한 도둑’이라는 비유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 의하면 조선왕조의 문화와 도덕은 아름다운 보석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조선왕조의 문민정치는 이미 서유럽의 근대 민주주의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지요. 그러한 조선왕조가 망한 것을 두고 조선왕조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강포한 도적’은 놓아 두고 ‘선량한 주인’만을 탓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이라는 겁니다. 도둑이 들어왔으니 싸움을 하자고요. 그것은 무(武)를 중시하는 야만인들이나 하는 일이죠. 다시 말해 조선왕조는 너무나 선량하여 강포한 외적을 막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같은 한 교수의 ‘선량한 주인론’은 20세기 전체의 역사적 이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발전할 논리적 필연을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주의 깊게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요컨대 강포한 도적이 든 이후 조선의 선량한 문화는 모조리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이 점은 해방과 건국 이후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개발에 성공해서 그런대로 물질은 얻었습니다만, 그 대가로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와 정신은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난 20세기는 좌절과 상실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교수는 저 아름다웠던 조선왕조의 이념과 도덕을 다시금 친근하게 쳐다볼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같은 한영우 교수의 근·현대사 해석을 문화적 민족주의라고 규정하고 싶습니다. 전장에서 소개한 대로 《인식》 여섯 권의 현대사 해석은 마오쩌둥의 혁명이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급적 민족주의 또는 좌파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해 한 교수의 민족주의는 전통시대의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화적 민족주의 또는 우파 민족주의라고 부를 수 있지요. 우파라는 규정에 대해서는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제가 보기에 한 교수의 ‘선량한 주인론’은 보통의 한국인들이 쉽게 공감하는, 좀 더 강하게 표현하면 그들의 역사에 대한 욕구를 시원하게 채워 주는, 그래서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요사이 전통시대 특히 18세기의 문화에 관한 연구서가 대중적인 베스트셀러의 목록에 자주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 우리 문화는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하였나. 이미 그때에 현대 문명이 앓고 있는 인간 소외의 문제를 해결할 담론들이 활발히 펼쳐지고 있었어.” 대개 이런 내용이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런 연구들이 오늘 날 한국의 인문학계에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대중적 기반은 이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기분 좋아하며 기꺼이 책을 사보는 중산층에 있다고 하겠는데, 그들의 정치적 성향은 대개 우파이지요. 그래서 우파 민족주의라고 한 것입니다.
     문화적 또는 우파 민족주의의 사회적 기반은 계급적 또는 좌파 민족주의보다 훨씬 넓습니다. 계급노선에 기초한 좌파 민족주의는 이미 사회주의 국제체제가 붕괴한 마당에 점차 그 영향력을 잃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아직 한국의 현실 정치와 남북관계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문화적 민족주의라는 우군이 있기 때문이지요. 실은 문화적 민족주의의 정치적 성향은 대단히 불안정하고 기회주의적입니다. 우파인 이상 그들의 현실 인식은 대개 보수적입니다.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민족문제와 관련된 이슈가 제기되면 쉽게 좌파 민족주의에 동조하지요. 그쪽으로 휩쓸려 버리는 겁니다. 최근에 어느토론회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한국의 중산층은 “오른쪽으로 살면서 왼쪽으로 생각한다”(live right, think left)고 하는 군요. 그렇게 한국의 중산층은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인 정체성 위기의 상태입니다.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자신도 헷갈리지요. 지식인들도, 교수라는 사람들도 대개 마찬가지예요.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여서 여기서는 이 말, 저기서는 저 말,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 중요한 이유를 저는 문화적 민족주의의 기회주의적 속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환경 파괴와 경제위기

  • ▲ 구한말 서울 근교. 농부들 뒤로 헐벗은 산이 보인다 ⓒ 뉴데일리
    ▲ 구한말 서울 근교. 농부들 뒤로 헐벗은 산이 보인다 ⓒ 뉴데일리

    과연 조선왕조의 문화는 우수하였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조선왕조 시대에 이룩된 문명의 성과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현대문명을 절반도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 가족, 촌락, 단체, 관료제, 시장, 사유재산 등의 여러 문명의 요소에서 조선왕조는 세계적으로 비교적 높은 수준에 있었지요. 저는 그런 생각으로 지난 세월에 적잖은 논문을 써왔습니다. 그것들을 종합한 것으로 <민족사에서 문명사로의 전환을 위하여>(《국사의 신화를 넘어서》,휴머니스트, 2004)라는 논문이 있으니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명의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 국가라는 형태로 통합했던 또 다른 차원의 문명 수준에서 조선왕조는 오늘날의 근대국가와 큰 차이를 보입니다. 큰 단절이 있지요. 그렇게 연속은 연속대로, 단절은 단절대로 종합적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한쪽만 보는 것은 부당합니다. 양편을 골고루 공정하게 살펴야 합니다. “조선왕조는 왜 망하였나”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러한 균형 잡힌 시각에서 차분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왕조가 망한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한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몇 백 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희귀한 사건입니다. 정치에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지요. 그래야, 한 나라가 망하는 법이지요. 여기서 그 모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 그럴 장소도 아닙니다. 다만, 어느 정도의 추상 수준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한두 가지만 지적한 다음, 그것에 내포된 역사적 의미를 성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제 전공과 관련하여 지난 몇 년간 경제사 연구자들이 새롭게 밝혀낸 사실부터 소개하겠습니다. 18세기 중반 이후 한반도의 환경이 파괴되어 갔습니다. 산이 헐벗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인구가 늘어나 식량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자 나무를 베어내고 산지를 개간하였습니다. 또 온돌 난방에 필요한 연료인 장작의 수요도 증가하여 나무를 베었지요. 그렇게 산림이 점점 황폐해져 19세기 말이 되면 북부 고원지대와 강원도의 깊은 산속을 제외한 대부분의 산지가 발갛게 헐벗고 말았습니다. 19세기가 되면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거의 사라집니다. 그것도 산림이 황폐해져서 그랬지요. 산림이 황폐하자 조금의 비에도 홍수가 생겨 토사가 논밭으로 흘려내렸습니다. 그 결과 농업생산이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도합 열셋 정도의 사례가 발굴되었는데요, 18세기 중엽에 비해 19세기 말이면 거의 1/3 수준으로 토지생산성이 감소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농업생산이 감소하자 분배를 둘러싸고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심화하였습니다. 특히 조선왕조의 각종 조세가 감면되지 않아 농가의 큰 부담이었습니다. 1840년대부터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민란의 물결은 1860년대부터 더욱 거세게 일어 1894년 동학농민봉기에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조선왕조의 정치적 통합력은 현저히 약해졌지요. 저는 동학농민봉기의 1894년을 전후하여 조선왕조는 사실상 해체되고만 형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거세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미 19세기 초부터 그러한 방향의 변화가 진행되어 왔던 것이지요. 이 같은 19세기의 경제적 침체와 정치적 혼란은 조선왕조의 일만도 아니었습니다. 19세기의 중국도 그러하였습니다. 화북지방의 중국에서도 산림의 황폐에 따라 운하와 수로가 막히고 그에 따라 시장이 축소되고 생산이 감소하여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심화하였습니다. 인류의 긴 역사에서 보면 이렇게 어느 문명이 어느 발전단계에서 자연자원의 고갈로 쇠퇴의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 조선왕조가 망한 것도 크게 보면 이 같은 인류사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서글프지만 대범하게 그 점을 전제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성리학의 정치원리

    그런데 어느 문명이 해체되는 것은, 아주 예외적으로 홀로 고사(枯死)하는 예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는 이미 쇠약해진 단계에서 다른 강대한 문명의 충격을 받아 성공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 잘 아시는 대로 20세기의 위대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는 문명과 문명의 접촉과정을 도전(challenge)과 응전(response)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강대한 문명으로부터 도전이 주어졌을 때 성공적으로 응전한 문명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문명은 소멸합니다. 성공적인 응전에는 창조적 소수의 지도적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도전의 성격을 이해하고 올바른 대응을 강구하는 것은 대중이 아니라 소수의 창조적 지성이지요. 그리고 대중이 창조적 소수의 지도를 신뢰하고 따라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좋은 순환의 신뢰관계가 성립해 있는 문명은 응전에 성공하여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대조적으로 창조적 소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또한 대중이 그에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 문명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메이지유신의 일본이 전자의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조선왕조는 후자에 속하지요. 김옥균을 위시한 이른바 개화파라는 창조적 소수가 없지 않았습니다만, 그들의 세력은 너무나 미약하였고 또 대중이 그들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 ▲ 문명개화파의 선구자 김옥균 ⓒ 뉴데일리
    ▲ 문명개화파의 선구자 김옥균 ⓒ 뉴데일리

    그렇게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이 제국주의의 침입에 성공적으로 응전하지 못한 이유는 앞서 설명한 대로 이미 오래 전부터 체제의 혼한이 있어 온 데다 인간, 사회, 국가, 세계를 바라보는 그들의 질서 감각이 낡은 문명의 원리에 너무 깊숙이 고착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서 조선의 전통문명은 견고한 자기완결성을 특징으로 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조선왕조의 정치이념을 살펴봅시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의 정치원리에 기초하여 백성을 통치하였습니다. 거기서 왕은 하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자로서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누렸습니다. 하늘은 무엇입니까. 삼라만상을 만들어 낸 지극한 이치로서 앞서 잠시 언급한 태극이지요. 태극의 지극한 이치는 인간사회의 성립과 관련해서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도덕을 의미하였습니다. 왕은 하늘을 대신해서 이 도덕을 대변하고 수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백성이 그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자식이 그 부모에 효도를 다하고 아내가 그 남편을 정성으로 섬기면, 하늘도 부응하여 세상만사가 평화롭고 풍요로워진다는 것이 성리학의 정치원리였습니다. 이 성리학의 정치에서 백성은 왕의 발가벗은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왕은 어린 백성을 자애롭게 보살펴야 했고, 백성은 부모를 섬기듯 왕에게 충성을 바쳐야 했지요. 이렇게 가족제적 혈연 원리에 기초한 정치에서 백성은 정치적으로 무권리였습니다. 조선왕조의 시대에 나라[國]라 하면 어디까지나 왕과 양반관료들의 나라로서 곧 조정(朝廷)을 의미하였지요. 오늘날과 같은 민권사상이나 대의제적 정치에 입각한 국가관은 조선왕조와 무관하였습니다.

    중화제국의 국제질서

  • ▲ 청조 중화제국의 구조<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휴머니스트,145쪽 ⓒ 뉴데일리
    ▲ 청조 중화제국의 구조<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휴머니스트,145쪽 ⓒ 뉴데일리

    조선왕조를 둘러싼 국제질서도 크게 보면 같은 원리에 기초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세계와 같은 평등한 주권국가끼리의 국제질서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19세기까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는 중국이 중심이 된 중화제국이란 국제질서가 존재하였습니다. 이 국제질서에서 성리학이 이야기하는 하늘을 직접 대변하는 존재는 중국의 천자(天子)였습니다. 나머지 모든 나라의 왕은 천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하늘과 관계를 맺는 식이었습니다. 천자가 다스리는 중국은 나라라 하지 않고 천하(天下)라 하였습니다. 그 천하는 한족들이 사는 지역이 한가운데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3겹의 동심원이 둘러싼 형태였다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 바깥 고리는 동북·몽골·신강·티베트로 이루어진 이른바 번부(藩部)였습니다. 대개 이 고리까지가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루고 있지요. 다음의 바깥 고리는 조선과 베트남과 같은 조공국(朝貢國)이었는데 열둘 정도가 있었습니다. 이들 나라는 이후 제국주의의 침입을 맞아 중화제국에서 분리된 부분에 해당합니다. 맨 바깥의 고리는 호시(互市)라 하여 중국과 평등하게 교역하는 일본이나 로마 등 서유럽의 먼 나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천자의 덕화가 미치는 정도와 형식에 따라 동심원적 질서를 취하는 것이 천하로서 중국의 개념이었지요. 그 속에서 나라[國]라 하면 중국이 아니라 천자로부터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치는 제후(諸侯)의 조정을 의미하였지요.
     15세기 이후 조선왕조의 지배자들은 이러한 중화제국의 질서를 수용하였습니다. 왕이 바뀔 때는 천자로부터 책봉을 받았는데, 그것은 조선의 왕이 누린 움직일 수 없는 권위의 기초였습니다. 그 대가로 조선왕조는 1년에 4~5차례 중국에 조공을 위한 사신단을 파견하였습니다. 조선왕조가 자주독립하고 번영을 누린 것은 다름 아니라 이러한 중화제국의 국제질서 속에서였지요. 오늘날과 판이한 국제질서의 이러한 역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조선왕조의 역사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장에서 소개한 기자정통설은 그러한 국제질서를 뒷받침한 역사관입니다. 17세기 이후가 되면 같은 오랑캐 출신인 여진족이 청 제국을 세웁니다. 그러자 조선왕조의 지식인들은 소중화(小中華)라 하여 세계문명의 중심이 조선으로 옮겨왔다고 믿었습니다. 소중화 사상은 18세기 후반 중국의 발전상이 알려지면서 많이 후퇴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역설적으로 중화제국의 국제질서에 관한 전통적인 감각만큼은 더욱 공고해진 채로 끝까지 뻗쳤던 셈이지요.
     조선왕조의 시대를 이렇게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면, 조선왕조가 망한 원인과 그 역사적 의미가 어렵지 않게 이해됩니다. 조선왕조가 망한 것은 왕과 양반의 조정으로서 나라가 망한 것이지요. 백성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동시에 중화제국의 질서 속에서 위치한 한 제후의 나라가 망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나라가 망한 것은 그런 국가관과 국제질서의 감각을 해체할 만한 지성의 창조적 변화가 그 나라에서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너무나 단단한 갑옷과 같았습니다. 견갑(堅甲)으로 둘러싸인 전통문명은 보기에 따라 무척이나 아름답지요. 그러나 그에 현혹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대전환

    20세기의 한국사는 전통 왕조와 문명에 대한 이러한 시각 조정이 전제될 때 비로소 그 역사적 의의가 제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20세기의 한국사는 나라를 빼앗겼다가 독립운동으로 다시 나라를 되찾았던 역사만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문명사의 일대 전환이 있었던 겁니다. 중국문명권에서 이탈하여 서유럽문명권으로 편입된 역사가 20세기 한국의 역사입니다. 유교문명권에서 기독교문명권으로, 대륙농경문명에서 해양상업문명으로의 일대 전환이 있었던 겁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역사학은 세계적 수준에서 보면 너무나도 자명한 이 같은 관점을 무슨 영문인지 우리의 근·현대사에 적용하는 데 그렇게도 망설여 왔습니다. 문명사의 대전환을 직접 강요한 세력이 원래 같은 문명권에 속했던 일본이어서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워서 그랬던가요. 아니면 섬나라 오랑캐라고 가볍게 여기던 일본에 당한 자존심의 상처가 너무 깊었던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선량한 주인론’의 문화적 민족주의는 이런 식의 마음의 병을 어루만지는 자위행위에 불과합니다. 지금부터는 20세기의 한국사를 일본과의 관계로만 국한된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문명사의 대전환이라는 넓디넓은 시각에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달리 보입니다. 그렇게 과거를 훌훌 털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위한 기본 전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