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본주의적 사고방식

    앞서도 지적했습니다만, 한 나라가 잘못 세워졌다는 주장이 나라 밖이 아니라 나라 안에서, 그것도 명망 있는 학자들에 의해서, 심지어 대통령을 위시한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음은 다른 나라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참으로 특이한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이 지구상에 어디 그런 나라가 있습니까. 모든 나라는 자기 나라가 정의로운 역사에 기초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의식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애국심으로 심어 주고 있습니다. 나라의 역사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쓰는 식으로 날조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게 국가의 역사를 신성시하는 국가주의적 발상은 위험합니다. 그렇지만, 나라의 역사에 자긍심을 갖는 건전한 애국심의 국민을 교육하는 일은 국가에 부과된 포기할 수 없는 사명의 하나이지요. 국가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숨겨서는 안 됩니다. 드러내고 비판을 해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와 국가의 도덕 수준을 드높이기 위한 성찰의 일환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사회의 지도자들이 자기 나라가 잘못 세워진 나라라고 생각하는 데는 무언가 특수한 문화사적 내지 정신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저는 그 한 가지로서 19세기까지 지배적이었던 성리학의 영향을 들고 싶습니다. 성리학은 일종의 근본주의적 철학입니다. 거기서는 사물의 인과가 오직 어떤 근본적인 한 가지 요인으로 설명됩니다. 예컨대 지난 60년간 한국의 정치가 혼란스럽고 사회가 부패한 것은 애초에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그 좋은 예입니다.

    최근에 어떤 영향력 있는 사람은 한국에서 아파트 투기가 자꾸 일어나는 것도 친일파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지요. 그런데 그런 명제들은 경험적인 자료로 증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반증(反證)이 가능한 경험적인 근거 위에서 제기된 과학적인 명제가 아니지요. 그것들은 일방적이며 선험적이며 종교적입니다. 그러한 비과학적인 사고방식과 명제들이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라면 제대로 근대화된 사회라고 할 수 없지요. 중세사회와 근대사회의 중간에 놓여 있는 과도기 사회이지요. 솔직히 말해 한국사회는 아직 근대화의 역사가 짧기에 이러한 과도기적 특질을 자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의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근본주의적 명제 하나를 들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주저하지 않고 우리 한국인은 유사 이래 반만년 전부터 하나의 민족이었다는 한국의 민족주의, 그것을 들겠습니다. 민족의 분단을 초래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건국은 처음부터 잘못이라든가, 통일이 되기 전에는 역사는 미완성이라는 식의 《인식》의 주장도 크게 보면 다 민족이라는 근본주의적 명제에서 파생하는 것입니다. 이들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한국에서 민족은 국가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국가를 부정하는 이야기가 민족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만 보통의 한국인들은 그에 대해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만큼 오늘날 보통의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이기 이전에 한민족이란 민족의 일원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저도 젊은 시절에 몇 번 경험했습니다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부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대학시절에 그 노래를 부르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통일의 전사가 되겠다고 속으로 맹세했습니다. 저의 이러한 체험은 보통의 한국인이면 누구에게나 한두 번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감히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근본주의적 열정과 감성의 체계로서 민족주의는 대한민국을 세계의 선진사회와 선진국가로 발전시키기에 역부족이며, 자칫 잘못하면 대한민국의 선진국 진입을 가로막는 역사의 족쇄로 작용할 위험성이 크다고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부터 그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 봅시다. 우선 민족이란 무엇입니까. 세계 곳곳에는 수많은 민족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모두에 합당한 민족의 정의를 내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찍부터 여러 사람이 그런 시도를 해봤지만 모두 실패하였지요. 그래서 우리 사회의 통념에 따라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의하도록 합시다. 민족이란 단일 인종으로서 단일 언어를 쓰고 단일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면서 스스로 공동의 운명공동체라고 믿는 주민 집단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집단의식은 그에 상응하는 상징이나 신화를 발달시킵니다. 신화는 대개 민족의 성립과 관련된 건국신화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우리 한민족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의 아들 단군의 자손이다. 우리는 한 핏줄, 곧 한 겨레이다. 바로 그런 것 말입니다.
    오늘날 보통의 한국인들은 이러한 민족의식을 너무나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과연 5천 년 전부터 한국인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하나의 공동체였을까요. 막상 이렇게 따지고 물으면 아무도 확실하게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모두 그렇게 믿고 있지요. 그것이 바로 민족이 지닌 신화로서의 힘이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오늘날 한국의 민족주의는 20세기에 들어와 일제의 억압을 받는 고난의 시기에 생겨난 것입니다.

    백두산은 언제부터 민족의 영산이었나?
    그 점을 명확히 하려고 저는 《재인식》에 실은 저의 논문, <왜 다시 해방전후사인가>에서 백두산을 예로 들었습니다. 오늘날 보통의 한국인들에게 백두산은 민족의 영산입니다. 국사교과서가 그렇게 가르쳐 왔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교과서가 생각납니다만, 교과서의 맨 뒷장을 보면 ‘우리의 맹세’가 있는데, 그 가운데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자”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곧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 주장이지요. 어쨌든 어린 저에게 백두산은 처음부터 영산이자 영봉이었습니다. 제가 백두산에 오른 것은 나이 39인 1990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백두산 정상의 천지를 보고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같이 간 동료 교수 가운데는 그 진한 감동을 한시로 지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단군 할아버지가 이  곳에 강림하셨으니 여기서 우리 민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 기상을 이어받아 만주 고토를 수복하자. 대강 이러한 내용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을 뒤지면 전혀 딴판입니다. 1778년, 조선왕조 정조 연간에 서명응이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고급관료가 백두산에 올랐습니다. 백두산 꼭대기에서 그는 이곳은 중국 땅도 아니고 조선 땅도 아닌 아득한 변방으로서 천 년에 한두 사람이 올까 말까 한 곳인데, 마침 내가 올라와 보니 이 큰 연못의 이름이 없구나, 하늘이 내게 이름을 지으라는 뜻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태일택(太一澤)이라고 하였습니다. 태일이란 삼라만상이 태극에서 발원하였으니 삼라만상은 원래 태극으로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서명응은 백두산 꼭대기의 뻥 뚫린 화산구와 그에 담긴 큰 연못을 보고 만물의 근원인 태극을 연상하여 그런 뜻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과연 당대의 성리학자다운 발상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서 오늘날 백두산 천지에 올라 여기가 단군 할아버지가 강림 한 곳이라고 흥분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서명응 이외에 18~19세기에 걸쳐 서너 사람이 백두산에 올라 글을 남겼는데, 자세한 것은 제 논문을 직접 참조해 주십시오. 어떤 사람은 백두산을 천하 으뜸인 중국 곤륜산의 맥을 정통으로 이은 산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은 백두산 위에서 조선 땅을 내려다보며 ‘기자(箕子)의 나라’가 조그마하게 펼쳐 있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이렇게 조선시대의 백두산은 성리학의 자연관과 역사관을 대변하는 산이었습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조선의 문명이 중국 고대의 성인 기자가 동쪽으로 건너와 세운 기자조선에서 출발한다고 믿었습니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이 남으로 내려와 마한으로 흡수되었고 그 마한이 신라로 흡수되었으니 조선 역사의 정통이 기자조선에서 마한으로, 신라로, 고려로, 그리고 조선왕조로 이어졌다는 것이지요.

    조선왕조의 역사학은 이러한 기자정통설을 신봉하였습니다. 조선왕조가 단군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만, 소홀히 여겨 뒤편으로 제쳐 놓았지요. 18세기가 되면 단군의 고조선이 조선 역사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약간의 변화가 나타납니다만, 그래도 문명의 정통은 기자조선에서 출발한다는 기존의 역사관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앞서 본 대로 백두산을 두고 곤륜산의 적장자라 하거나 조선왕조를 ‘기자의 나라’라고 했던 것도 다 그러한 역사관 때문이지요.
      그렇게 조선시대의 역사관이 중국 중심이었다면, 그 시대에 오늘날과 같은 민족의식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관련하여서 한 가지 예를 더 들지요. 15세기 초 세종 연간의 일이었습니다. 기자정통설이 막 성립하던 시기였지요. 당시의 양반 학자들이 왜 기자정통설을 도입했던가, 그 이유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는 인구의 3~4할이 노비라는 천한 신분이었습니다. 양반들은 그들이 노비를 마음대로 지배해도 좋을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봉착했습니다. 그러자 기자 성인이 캄캄한 야만의 동쪽으로 오셔서 8조금법을 내렸는데, 그 가운데 도둑질한 사람을 노비로 삼는 법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노비란 원래 성인의 가르침을 어긴 야만인이고 우리 양반은 성인의 가르침을 깨우친 문명인이다, 그래서 양반이 노비를 지배하는 것은 세상의 풍속을 바로 잡도록 한 성인의 뜻이었다. 이런 식의 논리가 개발된 것이지요. 기자정통설이 출현한 현실적 이유는 이와 같습니다. 그러한 사회에서 서로 다른 신분의 인간들이 우리의 하나의 혈연으로서 운명공동체라는 의식을 나누어 가졌을까요. 저는 천만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이라는 말의 유래

  • ▲ 1968년 국민교육헌장 선포식 ⓒ 뉴데일리
    ▲ 1968년 국민교육헌장 선포식 ⓒ 뉴데일리

    조선시대에 민족이란 말은 없었습니다. 민족이란 말은 20세기 초에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지요. 연후에 최남선 선생이 1919년 3·1 독립선언서에 그 말을 씀으로써 비로소 대중화되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포라는 말이 있지 않았느냐. 이런 반론이 예상되는군요. 조선시대에 동포라는 말의 쓰임새는 아래의 세 가지였는데, 모두 오늘날의 민족이란 뜻과 무관하였습니다.

    첫째는 같은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난 형제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동포의 원래 뜻이지요. 둘째는 임금님의 동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임금님의 신하로서 임금님이 낳은 아기와 같다는 뜻이지요. 셋째는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늘이 나은 자식과 같은 뜻의 동포입니다. 퇴계 선생의 《성학십도》에 나오는 “사람들은 나의 동포”(民吾同胞)라고 한 말이 그 예입니다. 이에 따르면 조선인이나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나 모두 동포이지요.
    그렇다면, 겨레라는 말이 있지 않았느냐는 또 하나의 반론이 예상되는군요. 그에 대해서는 겨레라는 말은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이 민족이라는 외래어에 대항하여 조선시대의 겨레붙이라는 말에서 고안해 낸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겨레붙이는 피붙이, 곹 일가친척이란 뜻입니다. 그렇더라도, 다시 말해 말이 없었더라도, 민족이란 의식만큼은 있었다는 최후의 반론이 예상되는군요. 글쎄요. 철학자들은 언어를 개념의 틀 또는 의미의 감옥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말이 없는데 개념이 있을 수 있을까요. 어쨌든 어느 분이든 조선시대의 것으로 민족에 해당하는 말을 찾아내면 저는 저의 주장을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요컨대 한국의 역사에서 민족이라는 집단의식이 생겨나는 것은 20세기에 들어 일제하 식민지기의 일입니다. 일제의 억압을 받으면서 소멸의 위기에 봉착한 조선인들은 그들을 하나의 정치적 운명공통체로 새롭게 발견하면서 민족이란 집단의식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으로 변하는 것은 바로 그 과정에서이지요. 제가 아는 한, 백두산을 신성시한 최초의 사람은 최남선 선생입니다. 그는 백두산에서 발생한 불함(弗咸)문명이 조선 문명의 근원이라는 학설을 만들어 냈는데, 그것을 증명하려고 1927년 백두산에 오릅니다. 그때 《백두산근참기》라는 책을 짓는데, 제목 가운데의 근참(覲參)이란 단어에서 명백하듯이 그에게서 백두산은 이미 민족의 성소였습니다. 그에게서 백두산은 소멸해가는 조선인들이 다시 태어날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백두산의 영산화 작업이 해방 후 남한과 북한에서 각기 어떠한 모양으로 전개되었는지는 《재인식》에 실린 저의 논문을 참조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