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백한다'…어느 386의 체험기 <3>

1980년대 전반기 학생운동의 중추 ‘패밀리’

이강수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09.06.03 17:36:14

첫  경험

대학 입학 후, 첫 ‘데모’를 경험한 것은 83년 4월 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 3월 말이었을 수도 있다. 워낙 많은 세월이 지난 탓에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중간고사 이전이었다는 사실이다. 뒤에 운동권 학생이 된 이후에는 시험 따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으나, 당시만 하더라도 대학입학 이후 첫 중간고사에 엄청(!)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지금도 정확히 기억한다. 사실 첫 데모 경험 자체가 중간고사와 관련이 있었다.

4월 초(혹은 3월 말) 어느 날 오전 수업을 마친 뒤, 중간고사 관련 정보를 얻을 목적으로 과사무실을 방문했다. 과사무실에 앉아 있는 선배들에게 중간고사 준비를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더니, 외계에서 온 괴물을 본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너무 민망해서 말도 제대로 이을 수 없었다. 학점 따위(?)에나 매달리는 ‘속물’로 비쳐졌다는 생각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한 81학번 선배가 점심 사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따라 나섰더니, 과 사무실에 있던 82학번 선배들이 대거 쫓아 나오는 것이었다.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우선 당시 사회대 건물에서 가까운 제2식당이나 제4식당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학생회관에 위치한 제1식당으로 가는 것이었다. 또 학생회관에 도착하니, 평상시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붐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적막감이 흐르고 있었다.

데모 피해 도망치다 잡혀 생고생

점심시간의 대학식당이란 시끌벅적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 아니 식사를 하는 학생들도 거의 없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에 학생회관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와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옆에 있던 선배들이 어느 테이블로 달려 나갔다. 어느 여학생이 메가폰을 들고 테이블 위에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와 거의 동시에, 의자들이 공중에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위 ‘사과탄’(사과 모양의 수류 최루탄)이 터졌다. 눈을 뜨기는커녕,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서둘러서 학생회관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 시위는 10분, 아니 5분도 지속되지 못한 채 끝났다. 도서관 계단 쪽에서 바라보니, 사복경찰들이 한 여학생을 대기시켜 놓은 경찰차에 강제로 태우고 있었다. 그 여학생은 뭔가를 외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경찰들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제기랄! 소리도 한번 제대로 못 지르는 데모는 왜 하는 거야? 그리고 점심 사준다더니…. 이것 사기 아냐?” 누구를 향한 것인지 조차 불분명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만 하더라도 데모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재다짐하고 있었다.

5월24일. 이 날만은 날짜도 정확하게 기억한다. 지난 첫 데모 목격 사건 이후, 의식적으로 운동권으로 보이는 선배들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날 도서관 쪽에서 데모가 터진 것으로 보고, 아예 정반대 방향인 사범대 쪽의 소위 ‘깡통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데모가 소강상태인 것으로 보고, 수업에 들어가려고 사회대 건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짭새다! 짭새!(경찰을 비하해서 부르는 말)”라는 소리가 들렸다. 사회대 건물 곳곳에서 난투극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데모대가 건물 쪽으로 들어가니까, 경찰이 쫒아 들어온 것이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전경들이 사회대 건물 안에 있던 학생들을 모조리 연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필자는 얼떨결에 화장실로 도망친 뒤, 문을 걸어 잠갔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화장실로 피신해 와 있었다. 그런데 밖에서 “문 열어! 개새끼들아!”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황급히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 내렸다. 다행히 높지 않았던 관계로 어렵지 않게 뛰어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무조건 사범대 쪽으로 달렸다.

개같은 세상 한번 해보자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뒤, 생각해 보니, 왜 내가 도망쳐야 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이날 저녁 봉천 4거리에 위치한 어느 중국집에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날 연행된 학생이 1000명은 넘을 것이란 이야기가 나왔다.(나중에 경찰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465명) 술이 몇 순배 돌자,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선창으로 이른바 운동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았다.(그 중국집은 2층에 위치해 있었다.) 전경차가 와 있었으며, 주변에 전경들이 쫙 깔려 있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경찰이 메가폰으로 외치고 있었다.

“너희는 완전 포위됐다.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한 사람씩 내려와라!”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취해서 잘못 들은 것이겠지….”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은 현실이었다. 이날 함께 술을 마시던 학생 전원이 관악경찰서로 연행됐다. 그리고 이름, 학번, 학과명을 적은 종이를 들고 사진을 찍혔다. 다시는 불순한 노래를 부르는 등의 불법 집단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반성문(?)도 썼다. 다음날 새벽 필자는 훈방됐다.

“시팔! 이런 개새끼들! 그래 내가 깨지나 네놈들이 깨지나, 어디 해 보자!”

필자는 그날 당장 학교에 들어가서 한 선배를 만났다. 그리고 이른바 운동권 지하서클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일이 있더라도, 이 개 같은 세상은 반드시 부숴 버릴 거야”라고 결심했던 것이다.

'패밀리'의 기본 단위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소위 ‘패밀리’(Family)라는 개념이다. 당시 학생운동의 중심에는 이른바 ‘패밀리’ 혹은 ‘집’이라고 불리는 지하 이념써클이 있었다. 패밀리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패밀리의 기원은 1971년 위수령으로 인해 학내 이념서클이 금지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내 이념서클이 불법화되자, 이 서클들이 지하화된 것이다.

패밀리의 기본단위는 3학년 1,2명과 2학년 2~4명, 그리고 1학년 5~8명 정도로 구성된 Team이었다. RP(ReProduction, 재생산)책이라고 불린 3학년 팀장의 주된 임무는 1학년과 2학년의 의식화 세미나를 주도하는 것이다. 1학년 세미나에는 2학년도 참여하는데, 2학년은 여기서 조교 역할을 담당한다. 4학년은 Team에 직접 소속되지 않는다. 왜 4학년이 직접 참여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여기서는 단지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서울대의 대표적 패밀리는 ‘농법’, ‘후경’, ‘경법’, ‘농경’ (이상 MC계), ‘애플(Apple)’, '게이트(Gate)’, ‘아카’ (이상 MT계) 등이 존재했다.(MC니 MT니 하는 용어에 대해서도 나중에 설명하겠다.) 이같이 일반인이 무슨 뜻인지 알아보기 힘든 명칭을 사용한 것은 공안당국으로부터 보안을 유지하고, 나아가 은어를 사용함으로써 내부성원 사이에 비밀결사체적 신비감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또 당시 대학가에 유행하던 약어(略語)화 경향도 한몫 했다.

농법은 ‘농업법학연구회’, 후경은 ‘후진국경제연구회’, 경법은 ‘경제법학회’, 농경은 ‘농업경제연구회’ 등의 약칭이고, 애플(Apple)은 ‘사회과학연구회’의 준말인 ‘사과’에서, 게이트(Gate)는 ‘대학문화연구회’의 준말인 ‘대문’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고 아카의 본 명칭은 ‘흥사단 아카데미’로, 흥사단 아카데미 일부가 좌경이념 지하 서클화된 부분이다.

386시대 한국의 주요 인맥 형성

이렇게 패밀리에 대해서 길게 언급하는 이유는 패밀리가 1980년대 전반기 학생운동의 중추신경을 담당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른바 ‘386세대’의 부상과 함께, 패밀리 동문회는 현재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명문고 동창회가 한국사회의 주요 인맥을 형성했던 것처럼, 현재 과거 학생운동권의 패밀리가 주요 인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패밀리 친구는 자취방에서 함께 라면을 끓여 먹으며 이념서적을 학습하고, 또 함께 거리에 나가 가두시위를 벌인 ‘끈끈한 동지애’로 무장된, 말 그대로 ‘같은 집 식구’였다. 따라서 이들은 동일한 문화적 정서와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 특히 우리 세대는 고교 평준화시대이다.

따라서 일부 비평준화 지역 지방 고등학교를 제외하고는 특정 고등학교의 인재풀이 그리 넓지 못하다. 또 대학교의 같은 과 동문들의 경우는 특정 분야에만 집중돼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양한 인재풀을 제공하지 못한다. 반면 이른바 ‘명문 패밀리’는 정치, 경제는 물론 문화와 의료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넓은 인재풀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패밀리 동문회가 활발히 움직이는 것은 물론, 특정 인물을 언급할 때, 어느 패밀리 출신인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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