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도 다시 한번'의 서사구조 분석

박정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09.08.06 18:28:22

TV 드라마를 너무 안 봐 사회적 공통감을 상실하는 것이나 아닌지 문득 두려워 요즘 몇 편의 드라마를 조금씩 보았다. 그 중 많이 본 것이 ‘미워도 다시 한번’.  실제 모 백화점 회장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주인공 설정이 관심을 끌기도 했고, 최명길과 김용림의 완벽한 연기에 감탄하기도 했다. 초반에 본 것도 아니고, 마지막 회를 보지도 않았으며, 중간에 많이 본 것도 아니다. 다 해서 5~6회 보았을까. 그래도 신문기사를 통한 2차 정보와 함께 한국 드라마의 성격을 파악하는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출생의 비밀

앞서 여러 드라마들이 그랬듯이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도 플롯의 중요한 실마리는 ‘출생의 비밀’이다. 백화점 재벌의 후계자인 이민수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어머니가 혼전 임신으로 낳은 사생아이고, 그가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는 인기 TV 앵커우먼 최윤희도 실은 가난한 가게집 딸이 아니라 백화점 회장의 남편인 박상원과 톱 여배우인 전인화 사이의 버려진 사생아이다. 그러니까 결혼한 두 젊은 남녀는 법적인 아버지와 생물학적인 아버지라는 형태로 결국 한 아버지를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드라마 작가들이 출생의 비밀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고 있고, 출생의 비밀이 밝혀질 때마다 시청률이 오르는 것을 보면 출생의 비밀은 한국 드라마의 핵심적인 키워드인 듯하다. 사람들은 뭔가 감추어진 비밀이 밝혀질 때 짜릿한 재미를 느낀다. 그것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에 나와 있는 것으로 2천3백년간의 세월의 무게를 견뎌내고 입증된 인간의 서사욕구이다.   

‘알아봄’과 ‘뒤바뀜’은 플롯의 양대 요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예술 창작, 특히 비극에 관한 이론서다. 그에 따르면 비극에는 여섯 개의 구성 요소가 필요한데 이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건들을 조직하는 플롯이다. 플롯은 한 스토리 안에서 서로 인과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사건들의 구조를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 에피소드식의 단순한 플롯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에피소드식이란 여러 사건들이 인과관계 없이 나열되어 에피소드들이 개연성도 필연성도 없이 연속되는 것을 말한다. 플롯 중에서도 특히 연극에 재미를 주는 것은 복합적인 플롯이다. 관객의 기대를 벗어나는 뜻밖의 사건들이 서로 필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일어날 때 연극의 효과가 가장 크다.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는 사건들은 우연의 결과로 일어난 사건보다 훨씬 강렬한 경이감을 불러일으킨다.

복합적인 플롯은 ‘알아봄’과 ‘반전(反轉)’이라는 두 개의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우선 ‘알아봄’(recognition)이란 말 그대로 무지에서 앎으로의 변화를 말한다. ‘발견’, ‘인지’, ‘깨달음’, ‘진실의 드러남’, ‘비밀의 폭로’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은 이 ‘알아봄’의 전형적인 예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어 등장 인물들이 새삼 서로 친밀하거나 적대적인 관계를 갖게 되고, 그로 인해 그들의 행복이나 고통에도 변화가 생긴다. 

‘반전’(reversal)이란 필연성이나 개연성에 의해 앞선 사건들의 흐름을 정반대로 뒤집어 놓는 ‘뒤바뀜’을 뜻한다. ‘알아봄’과 ‘반전’은 당연히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가장 효과적인 ‘알아봄’은 ‘반전’과 직접 결합하여 발생하는 경우다. 가장 강렬한 극적 반전을 야기시키는 ‘알아봄’은 동서고금을 통해 역시 출생의 비밀이다.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 왕>은 이 모든 요소가 모두 들어있는 전형적인 예다. 프로이트가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성적 끌림을 설명하기 위해 이름붙인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바로 이 고사를 근거로 한다.


▲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외디푸스 ⓒ 뉴데일리

외디푸스왕의 경우

테베 왕의 아들인 외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버려진다. 코린트의 왕에 의해 거두어져 성장한 그는 예언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국을 떠나 여행하던 중 길 위에서 한 행인과 싸우다가 그를 죽이게 된다. 살해당한 사람이 그의 아버지인 라이오스 왕이지만 그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테베에 도착하여 사람들을 괴롭히던 괴물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맞춤으로써 스핑크스를 죽게 한다. 감사의 표시로 테베 주민들은 오이디푸스를 왕으로 선포했고, 그는 여왕인 조카스트와 결혼한다. 

신탁은 실현되었다. 페스트가 창궐하여 많은 사람이 죽자 오이디푸스는 신이 분노하여 그렇다고 생각하고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밝혀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꼼꼼한 조사 끝에 바로 자기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엄청난 비극 앞에서 왕비 조카스트는 목을 맸고, 외디푸스는 자기 눈을 찔러 스스로 장님이 되었다. 그리고 딸 안티고네의 손에 이끌려 광야를 헤맨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으로 여겨졌던 외디푸스는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한 순간에 운명이 뒤바뀌어 왕에서 눈 먼 거지 신세로 떨어졌다. 

이처럼 ‘알아봄’과 ‘반전’은 플롯의 구조 자체에서 생겨나는 것이라야 한다. ‘반전’‘은 행동의 방향이 완전히 반대가 되는 것인데, 이 때 앞뒤의 사실들은 서로 인과 관계가 있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할 개연성과 필연성으로 탄탄하게 결합된 ‘알아봄’과 ‘반전’큰 연민이나 두려움을 자아낸다. 비극은 바로 이런 종류의 사건들의 모방이다.
 
‘알아봄’의 여러 종류

첫째로 무슨 징표를 통한 ‘알아봄’이 있다. 가장 쉬운 ‘알아봄’의 방식으로, 이는 기술적으로 가장 열등하고 주로 능력 부족 때문에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무슨 사정이 있어 아이를 내다 버릴 때 요람이나 요 속에 목걸이 따위를 함께 넣어 출생 사실을 알리는 징표로 삼았다는 흔한 이야기는 징표를 통한 ‘알아봄’의 전형이다.

소포클레스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튀로>에서는 튀로가 몰래 낳은 아들들을 어떤 배에 띄워 보냈는데 나중에 그 배가 징표가 되어 장성한 아들들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몸의 상처가 징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모진 시련의 방랑 끝에 혼자 고향 이타카 왕국으로 돌아왔으나 신변에 위험을 느껴 변장을 한다. 그러나 그의 발을 씻기던 늙은 유모가 발에 있는 상처를 보고 그를 알아본다. 다음에 그는 자신의 충복이던 돼지치기와 소치기에게 자기 상처를 보여주어 자기의 정체를 알린다. 이 ‘알아봄’이 있은 다음 오디세우스가 승리하는 반전이 일어난다. 

우리 역사 속 전설에서도 징표의 ‘알아봄’은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고구려 2대왕 유리의 전설이 그것이다. 동부여에서 도망쳐 고구려를 창건한 주몽은 떠나기 전 아내에게 아들이 크면 ‘일곱 모가 진 돌 아래 부러진 칼 조각’을 찾아오라고 말한다. 어느 날 문득 ‘일곱 모가 진 돌’이 주춧돌임을 깨닫고 유리는 그 밑에 묻힌 칼 조각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가 부러진 칼 조각을 맞춤으로써 친자 확인을 한다. 

‘미워도 다시 한번’의 최윤희가 자신이 업둥이임을 알게 되는 것은 결혼할 때 열어보라고 죽은 어머니가 이모에게 맡긴 상자 속의 편지를 통해서이다. 별로 긴장감이 없는 느슨한 설정이다. 
 
프로프의 <민담 형태학>(Morphologie du Conte)

소련의 형식주의자 블라디미르 프로프(Vladimir Propp, 1895-1970)는 1928년에 <민담 형태학>이라는 저서에서 여러 나라의 민담이 등장 인물과 셩격은 각기 달라도 모든 이야기에 공통된 31가지의 기능이 있음을 밝혀냈다. 우리의 <콩쥐팥쥐>와 프랑스의 <신데렐라>가 매우 유사한 것에 놀라움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교류가 전혀 없는 단절된 문화권 사이에 왜 이와 같은 민담의 유사성이 보이는가? 발생론을 구조적 관점으로 대체한 프로프의 이 31가지 기능이 바로 구조주의 문학 혹은 문학 기호학의 출발점이다.

프로프에 의하면 모든 민담들은 대체로 31가지 기능이 공통적인 순서로 전개된다. 한 이야기 안에 31가지 기능이 다 들어 있는 수도 있고 그 중의 몇 가지만 들어 있는 수도 있다. 중요한 것만 예로 들면

우선, 이야기는 가족 묘사로부터 시작된다/ 곧 이어 멀리 떠남 혹은 금지의 기능이 작동된다/ 금지는 위반된다/ 영웅(주인공)이 어떤 증표를 받는다/ 영웅은 변장하고 집에 돌아온다/ 가짜 영웅이 나타난다/ 사람들이 진짜 영웅을 알아본다/ 가짜 영웅은 거짓이 탄로나고 처벌 받는다/ 영웅은 결혼하여 왕좌에 오른다.

대강 이런 식이다. 오디세우스가 변장하고 돌아와 마침내 가짜 왕을 물리치고 왕의 자리를 되찾는 것도 이런 구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서도 알아봄과 반전이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프로프 이론의 기원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레마스의 행위자 모델

기호학자 그레마스(Julien Greimas, 1917-1992)는 프로프의 이 분석을 토대로 행위자 모델을 만들어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이야기에는 이야기 안에서의 역할과 관계에 따라 규정되는 전형적인 인물들이 있다. 이 전형적인 인물을 그는 행위자(actant)라고 부른다. 행위자의 명칭은 이야기 안에서 “누가 무엇을 부족해 하는가?”, “누가 무엇을 획득하는가?”, “누가 탐구 작업을 통해 부족에서 획득으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가?”, “누가 탐구를 도와주는가?”, “누가 탐구를 방해하는가?”라는 다섯가지 질문에 의해 정해진다. 

무엇을 부족해 하는 사람이 발신자(destinateur)이고, 그가 결핍을 느끼는 것은 대상(objet)이다. 이 ‘대상’ 혹은 ‘원하는 것’을 획득하는 사람은 수신자(destinataire)이다. 탐구의 모험을 통해 부족에서 획득으로의 이행을 실행시키는 사람은 영웅(heros, 주인공, 주체)이다. 탐구를 도와주는 사람은 원조자(adjuvant)이고, 탐구를 방해하는 사람은 반대자(opposant)이다. 

그레마스의 설화성(說話性)(narrativity)의 정의도 흥미롭다. 하나의 텍스트 안에 설화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안에 이야기(narrative, récit)가 들어 있다는 의미다. 그럼 이야기란 무엇인가? ‘옛날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어떤 것을 떠올리는가? 남루한 소녀 신데렐라가 마지막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왕비가 된다.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막내 왕자가 흰 티티새를 잡는 모험을 통해 왕으로 등극한다. 수준 높은 문학작품이건 대중소설이건 또는 영화건 만화건 간에 모든 이야기의 공통점은 거기에 서로 정반대가 되는 최초의 상태(situation initiale)와 최후의 상태(situation finale)가 있다는 점이다. 

가치가 부여된 어떤 대상이 있고, 이것을 소유한 사람, 혹은 소유하지 못해 박탈감과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이 최초의 상태와 전혀 다른 새로운 상태로 이행하여, 결핍이 소유로 바뀌는 과정이 있을때 우리는 거기에 설화성이 있다고 말한다. 

단순하게 말해 보면 설화란 출발 상태(état de départ)에서 새로운 상태(état nouveau)로 이어지는 서사적 도정(parcours narratif)이다. 출발 상태에서는 가치가 부여된 대상이 박탈되어 있었으나, 점차 소유가 결핍으로, 빈곤이 부유로, 무지가 지식으로, 불행이 행복으로, 도덕적 결점이 도덕적 덕성으로 바뀌는 등 정반대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이야기 구조가 바로 설화성이다.


▲ 무도회에서 왕자와 춤추는 신데렐라 ⓒ 뉴데일리

가족소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해서 TV 연속극이 문학적 권위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2천3백 년 전 당시에는 최고의 이론이었을지 몰라도 인지(人智)가 발달하고 예술이 세련되면서 플롯의 구성은 저급한 대중문학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19세기에만 해도 <몽테크리스토 백작>같은 통속 소설은 흥미진진한 플롯이 있지만, 예컨대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같은 소설에는 플롯 같은 것이 아예 없다.     

프로프의 민담 분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거의 모든 민담에서 이야기 줄거리는 공주를 결혼시키는 문제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들의 결혼 문제가 주요 사건이고 목적인 우리 TV 드라마들은 아직 전래 동화 수준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불륜, 배다른 남매로 밝혀지는 출생의 비밀 등 진부한 스토리가 반복되는 그 획일적인 드라마들이 저급하면 어떻고 대중적이면 어떤가? 다수의 시청자가 열광한다면 거기에는 우리 사회 전반의 어떤 원형적인 욕구가 숨겨져 있음에 틀림없다. 프로이트의 ‘가족 소설’이론이 그 해답일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프로이트가 임상경험을 통해 이름을 붙였고, 나중에 마르트 로베르(Marthe Robert)가 소설의 기원을 설명하는 유용한 개념으로 썼던 ‘가족소설’(roman familial, family romance)은 가족의 일상사를 명랑하게 다룬 소설이라는 상식적 의미의 가족 소설이 아니다.

가족소설이란 자신을 업둥이라고 상상하는 것

프로이트는 대부분의 소아 신경증 환자들이 자신의 부모를 친부모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마치 소설을 쓰듯이 가공의 가족관계를 상상 속에서 만들어내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가공적이고 허무맹랑하고 기묘한 이야기로부터 프로이트는 인간은 누구나 어린 시절에 그런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생각해내지만 자라면서 그것을 잊어버린다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상적인 발달이 그로 하여금 그 이야기에 집착하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게 되자마자 그 이야기를 억제한다는 결론을 끌어내게 되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스스로 업둥이라고 생각하는 현상은 어린아이들에게 있어서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경험이다. 다만 어른이 되어서까지 그것을 계속 믿는다면 그것은 병적인 것이다. 결국 ‘가족소설’이란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그렇듯이 인간이 성장해가면서 당연하게 맞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하는 하나의 심리적 기제다.

가족소설에 이르는 과정

어린이가 그의 ‘가족소설’에 이르는 것은 단지 거짓말 취미와 장난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목가적인 가족의 평화가 무너진다는 것을 처음으로 감지했을 때 그 실망을 극복하기 위해 가족소설을 꾸민다. 그의 첫 번째 실망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온다.

태어나서부터 어린시절까지 어린이는 부모에게 절대적인 권능의 옷을 입힌다. 부모를 이상화하고 신성시한다. 그러나 어린이는 자라고, 그에 대한 보살핌도 점차 약해지면서, 아이는 자신에 대한 가족들의 사랑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더구나 동생이라도 생겨서 가족의 사랑을 하나 혹은 여러 신참자들과 나누어 가져야 한다면, 그는 자신의 소중한 어떤 것을 약탈당했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아이는 이제 집안에서 유일하게 사랑받는 사람도 아니고 완전무결하게 어떤 이익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작은 신 혹은 어린 왕도 아니다. 게다가 아이 편에서도, 그의 어머니 아버지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사회적 경험이 시작되면서 세상에는 다른 부모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 부모들 가운데는 자신의 부모보다 더 머리 좋고, 더 선량하고, 더 재산이 많거나 혹은 더 높은 신분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 

좀 전까지 그의 모든 판단을 지배했던 맹목적인 숭배는 끝난다. 감정적인 실망과 굴욕감은 부모에 대한 이제까지의 믿음을 비판정신으로 대체한다. 어쨌든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유아적 낙원을 포기할 수 없는 그는, 자신의 소원에 보다 잘 어울리는 세계에 도피함으로써, 다시 말해 공상 속으로 도피함으로써 정신적 분열을 모면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스스로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들, 혹은 하나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잘못 태어나고 운이 없고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의 설명할 수 없는 수치를 설명하기 위해 생각해낸 하나의 전기적인 우화이다. 그 이야기가 그에게 위로받고 복수할 수단을 준다.  

그의 부모들이 절대적 신이 아니라 한갓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한 이래 그의 부모들은 너무나 낯설게 보여서 어린이는 이제 그 부모들을 자기 부모로 알아볼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이 자신의 진짜 부모가 아니라, 다만 자기를 받아들여 키워준 사람들일 뿐이라고 결론짓는다. 

가면이 벗겨진 옛날 우상의 낯선 감정을 이렇게 해석하는 그는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부모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며 스스로를 업둥이로 생각한다. 그리고 당연히 왕족이거나 귀족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권력이 있는 그의 실제 부모가 언젠가 화려하게 나타나 마침내 그를 본래의 가족으로 되돌려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가족소설이다. 대부분의 동화는 가족소설이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떠돌이 곡예사에게 팔려 전국을 떠도는 <집 없는 천사>의 주인공 레미는 나중에 거대한 부호의 잃어버린 아들로 밝혀진다.
 
가족소설로서의 TV 드라마

화려하고 유능한 TV 앵커지만 가난한 홀아버지의 딸인, <미워도 다시 한번>의 최윤희는 알고 보니 거대 재벌 상속녀의 남편이 친부이고, 미와 명성을 겸비한 톱스타가 친모다. 

드라마마다 반복되는 재벌가의 아들과 가난한 집 딸의 결혼 스토리는 우리 사회 사람들의 재벌에 대한 강렬한 선망, 부와 명성을 거머쥔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채울 길 없는 욕망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가진 권력과 부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처럼 집요하게 신데렐라 판타지로 도피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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