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백한다'…어느 386의 체험기 <1>

"동지는 주사의 세례를 받지 못했군"

이강수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09.06.04 17:50:11

“이강수씨... 맞죠?... 저 기억하시죠?...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다음 약속까지 남은 시간을 때울 겸, 꽃샘추위로 얼은 몸도 녹일 겸, 커피 점문점에 들어가 카페 라떼 한잔을 즐기고 있었을 때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이었다. 어디서 봤을까? 그를 기억해내는 데는 그러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반가운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 그의 근황이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 주길 바라는 마음이 보다 강했다. 그런데 그가 다가와서 말을 거는 것이었다. 그것도 내 자신도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혹은 잊어버리고 싶었던) 과거의 내 이름을 부르면서...

 1986년 3월 어느 날. 서울대 사회대 83학년 운동권 학생이었던 필자는 압구정동의 어느 카페에서 타임지와 프랑스어 사전, 그리고 빨간색 모나미 볼펜을 테이블 왼편에 둔 채, 초조하게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시간이 약 10분 쯤 지났을 때, 한 젊은 남자가 들어와 이리저리 살피더니 필자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강수씨, 맞죠?” 이것이 그와의 첫 대면이었다.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구면이었다. 시위현장에서 여러 번 본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인문대 83학번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정식으로 인사한 적이 없었기에 본명 같은 것은 알지 못했다.

 “강수 동지의 투쟁성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사의 세례’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재교육 대상으로 분류됐으며, 당분간 저와 1대1로 학습이 진행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주사의 세례’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사(主思)는 북한의 주체사상의 약어(略語)였으며, 세례(洗禮)란 종교의식 용어였던 것이다. 즉 “주사의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주체사상 신봉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필자에게 4벌식 타자기로 조잡하게 타이핑된 복사물을 건네줬다. 이날 받은 문건은 ‘주체사상에 대하여’ ‘주체사상에 대하여 해설’ ‘항일무장투쟁사’ 등 3건이었다. 주체사상 세례를 위한 교리문답 기본 교재를 받은 것이었다.  

그날 그와의 만남은 짧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문건을 준 그는 필자에게 청계천 상가에서 단파 라디오를 구입할 것을 지시하고, 라디오 청취 주파수와 청취 시간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다음 약속시간과 장소, 제2선 및 제3선 약속을 정했다. 마지막으로 재접선 요령을 재확인한 뒤 헤어졌다.

여기서 제2선, 제3선이란 첫 번째 약속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서, 2번째 3번째 약속을 미리 잡아 놓는 것을 말한다. 서로 가명(혹은 조직명)을 사용하고,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 같은 조치가 필요한 것이었다.(물론 아는 사람이 접선 장소에 나타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당시 운동권 바닥이 그리 넓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곤 했다.)

예를 들어, 1차는 압구정동 A카페 10일 18시, 2차는 강남역 B커피숍 15일 19시, 3차는 신촌 17일 15시라고 정했다고 가정해 보자. 10일 18시에 나타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1차, 2차, 3차를 다시 잡는다.(기존에 잡았던 2차, 3차는 무효다.) 그런데 1차에 안 나타나면 2차에 나가고, 또 2차에도 안 나타나면 3차에 나가면 되는 식이다. 문제는 3차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다.  이 경우가 발생하면, 일단 ‘사고’로 간주하고 ‘비상’에 돌입한다. ‘사고’란 공안당국에 검거됐거나, 이를 피해 ‘도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비상사태’에 돌입하게 되면, 일단 주변을 정리하고 ‘도주’했다가, 재접선을 시도하게 돼 있었다. 재접선 요령은 간첩 영화에 나오는 것과 유사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았다. 특정 영화관 안의 특정 공중전화 부스에 놓여있는 전화번호부 책, 특정 페이지를 살펴보면, 음어로 된 제1, 제2, 제3 약속이 지정돼 있는 식이었다. 1983년3월 이 남자와의 만남도 재접선 요령을 통해 이뤄진 것이었다.
 
 “미 제국주의와 미제의 하수인 파쇼 괴뢰도당의 악랄한 탄압을 뚫고 한국민족민주전선의 구국의 목소리 방송은 오늘도 재개됩니다. 여기는 서울입니다.”

지도원이 정해준 시간에 정해진 주파수를 맞춰 보니, 이 같은 소리로  방송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방송 목소리는 서울 말씨였으며, 방송은 서울의 소위 투쟁소식으로 시작됐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았다. 

 “오늘 오후 2시 서울대 민주학우 500여명이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미제축출, 파쇼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날 XXX투쟁위원회 위원장 000학우는 도서관 2층에서 ‘미제용병 교육반대’를 주장하는 유인물을 뿌리며, 이날의 투쟁을 선도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보도의 신속성과 정확성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학생시위 소식은 빨리 전해지지 않았다. 인터넷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보도가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학생시위 소식은 대형 사건이 아닌 이상 방송에 보도되지 않았으며, 중앙 일간지들이 사회면 1단 기사로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날 조간신문이 나오기도 전에 북한에 위치한(‘민민전’ 방송과 일부 친북세력들은 ‘민민전’ 방송이 서울에서 방송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것이 사실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방송이 한국 대학가의 시위소식을 한국 언론이 보도하기 전에 먼저 전하다니… 한 100명 쯤 모였으면 500명이 모였다고 하는 등, 시위 주최 측에서 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숫자를 부풀리기는 했지만, 언제 어디서와 같은 기본 사실관계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현장 취재(?)가 이뤄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도원이 듣고 학습하기를 원했던 것은 보도가 아니라 교양강좌였다. 마치 방송통신대학 강의가 이뤄지듯 주체사상과 항일무장투쟁사 등에 대한 라디오 강좌가 진행되고 있었다. 강의내용은 매우 평이했으며, 별다른 지적 자극을 주지 못했다. 그동안 ‘지하대학’에서 학습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과 이론에 비해 조잡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특히 당시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를 자처하고 있었던 필자로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주체사상” 운운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뛰어 넘기는커녕, 조잡한 변형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었다. 그래도 주체사상 부분은 조금 나은 편이었다.

항일무장투쟁사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무장부대가 북한을 해방시켰다는 대목에서는 황당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진짜 재미있는 것은 당시 필자의 심리 상태였다. 머리가 주체사상을 거부하면 할수록, 그것은 필자의 '쁘띠'(petit-‘소부르조아를 의미하는 petit bourgeois의 약어)적 속성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특정 종교인이 종교교리에 대해 의구심이 일어날 때, 스스로의 신앙심 부족 탓으로 돌리면서, 자학하는 경우와 유사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지만, 하루 빨리 ‘주체의 세례’를 받아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밤새 주체사상과 항일무장투쟁사를 학습했다.

다음 만남에서 지도원이 “질문할 내용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럼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약어)과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지도력을 인정합니까?” 지도원이 이렇게 다시 물었을 때, 필자는 “네”라고 대답했다.

동화 ‘벌거숭이 임금님’ 이야기와 마찬가지였던 것이었다. 벌거숭이로 보이는 것은 내가 ‘나쁜 놈’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숨겨야 하기에 “아름다운 옷”이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벌거숭이 임금님’ 이야기를 떠올린 것은 한참 지난 뒤였으며, 당시 필자는 ‘아름다운 옷’을 보지 못하는 필자의 잘못된(?) 눈을 원망하고 있었다.  [이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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