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라이트 교과서의 공동집필자인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지난 4월 29일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4700여 명의 친일파 명단을 발표한 것과 관련,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의 한국인이 지난 20세기와 대화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 교수는 경제연구소인 자유기업원에 17일 기고한 글을 통해 친일인명편찬위원회의 역사 평가 방식은 "소수의 친일파에 의해 대한제국이 패망했고 일제강점기에 친일과 반일의 경계가 명확했으며 해방 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해 사회 부조리가 심화됐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며 이 같이 말했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역사인식 60년도 더 돼"

    이 교수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역사인식은 낡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해방 후 친일파를 하루라도 빨리 청산하는 것이 새로운 국가 건설에 요구되는 필수 과제라고 생각했지만 세월이 60년도 더 지난 오늘날에까지 세 가지 전제가 타당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선 " 과거사에 대한 정보가 일층 풍부해진 것이 한편의 원인이라면, 과거사로부터 얻고자 하는 교훈의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소수의 친일파가 대한제국을 패망하게 만들었다는 인식의 문제점으로 당시 정국 상황을 인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조선왕조의 경제는 19세기말까지 장기적으로 침체하고 그에 따라 사회적 혼란이 점점 심해졌다. 이 같은 도전을 맞아 조선왕조의 정치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했으며, 조선왕조는 개항(1876) 이후의 내외 도전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고 말했다.

    그는 "한 나라가 망한 것을 두고, 소수의 정치가가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식으로 그 원인을 찾는 것은 엄밀히 말해 전근대적 역사인식"이라고 지적했다. 

    "일제강점기 저항과 협력 경계 불투명"
    "대다수 사람들 달라진 세상 적응하며 살아"


    이 교수는 일제강점기때 친일과 반일의 경계가 명확했다는 이분법적 사고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그는 "일제시대 협력과 저항의 경계선이 불투명했던 이유는 국내ㆍ외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이 오늘날 우리가 전선이라 부를 정도로 강력하게 또 지속적으로 전개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대다수 사람들은 달라진 세상에 적응하며 살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대다수 일제강점기에 적응하며 살았던 민중을 친일파로 보는 시선을 경계했다. 그는 "그들의 일부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문명인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드높일 뿐 아니라 장차 우리 민족이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독립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그 시대는 오늘날의 강렬한 민족의식을 지닌 한국인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안개 자욱한 새벽길의 혼돈이었다"고 말했다. 

    "해방 후 자생적으로 부일자 축출"
    "계승된 12만의 하급 공무원은 친일파 아냐"


    이 교수는 해방 후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주장을 부정했다. 그는 "1948년에 세워진 대한민국이 반민족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거나, 반민족 친일파가 지배세력으로 군림한 나라였다는 인식도 실제로는 공산당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건국에 저항했던 정치세력이 과대 포장한 선전구호에 불과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악질적인 부일자는 해방 후 지방 단위에서 자생적으로 축출됐으며 일제시대 지주들은 농지개혁으로 해체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총독부가 구축한 ‘식민지 국가’의 행정·치안·징세·사법 기능이 대한민국으로 계승된 것은 사실"이라며 "이 과정에서 약 12만에 달했던 총독부 각급 관서의 하급관료·경찰·군인·교사·기술직 등이 대한민국의 공무원이 됐다. 그것을 두고 친일세력이 나라를 세웠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