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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6일자 오피니언면에 전 청와대 국방보좌관인 김희상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소장(명지대 교수)가 기고한 '핵 앞에서 남북정상이 웃으며 악수?'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우리는 ‘이제야말로 한반도에 평화가 오는가’ 환호작약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시점, 북한은 우리의 자유와 생명을 노리고 열심히 핵무기를 만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생각하면 실로 어이없고 참담한 일이다. 결국 북한은 이때 안으로는 ‘한반도 비핵화’의 약속을 깨고 밖으로는 5억 달러의 헌금을 받아가며, 북한 최고인민회의의 공식 비준까지 받았던 ‘남·북 기본합의서’를 사문화(死文化)시켰다. 북한은 이렇게 정상회담 하나를 빌려 1992년 남북 간에 합의한 작은 평화의 족쇄들을 알게 모르게 한꺼번에 끊어 내 버린 것이다. 남북 간 협상의 한계, 특히 정상회담을 보는 김정일의 시각과 태도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런데도 지금 정부에서는 제2의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온갖 공을 다 들이고 있다고 한다. 특히 숨겨 두었던 통일부의 계획이 들통나면서 이 정부의 정상회담에 대한 집요한 의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6·25가 남침인지 아닌지를 말하기 어렵다’면서 ‘핵을 개발해서 굶주리는’ 북한도 우리 책임이라는 사람이 그 수장이 아닌가? 때마침 북한도 어떻게 하든 우리 대통령 선거에 개입하려 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충격적이기도 하다.
사실 많은 전문가들이 한국 내 친북세력을 활용하는 정치적 조작과 심리전, 남북 간의 긴장을 활용하는 군사적 책략, 심지어는 테러와 사회교란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다양한 도발적 접근들을 우려하고 있는 시점이다. 남북정상회담은 그 좋은 배경을 만들어 주고, 성과를 키워 줄 것이다. 앞으로 더욱 더 한국 정치에 입을 달며 사회적 영향력을 키우고 이래저래 북한 간접침략의 효율성을 드높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정상회담은 무엇보다도 북한의 핵 개발을 기정사실화할 우려가 크다. 무릇 정상회담은 어떤 경우이건 실패해서는 안 되는 회담이다. 그래서 내실이야 어찌되었든 항상 서로 웃으며 따뜻하게 손을 맞잡아 끝내는 것이 정상회담이다. 김정일이가 핵 폐기라도 약속 해준다면 모르거니와, 기껏 립서비스 정도로 남북의 정상이 웃고 손을 맞잡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끝난다면 자연스럽게 북한 핵은 기정사실이 되거나, 북한 핵 폐기를 위한 국제적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저들의 핵 만들기를 돕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결국 우리의 목을 우리 스스로 조르는 격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남북 간에 얽혀 있는 어떤 난문제가 거론된다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오히려 평양에서는 정상회담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한다. 짧은 잔여 임기와 낮은 국민적 신뢰도 때문에 쓰임새가 별로 없다고 본다는 말도 있다. 북한이 우리보다 우리 상황을 더 정확히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이런 북한을 끌어들이기 위해 거론된다는 안건들을 보면 그 저의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북핵 사태가 진행 중인 지금, 이런 정상회담이란 발상 자체가 결코 지혜롭지 못하다.
“야전(野戰)에서 얻지 못한 것을 (협상)테이블 위에서 얻을 수는 없다.” 백선엽 장군이 6·25전쟁 휴전회담을 회고하며 한 말이다. 또 ‘협상에서 북한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협상 자체를 거절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대북 협상 전문가의 조언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정상회담을 서두르기보다는 먼저 북한이 핵을 폐기하도록 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할 때이고, 회담의 성공 자체를 위해서도 좀 더 여유로울 필요가 있는 그런 때인 것이다. 적어도 오늘의 사사로운 승리를 위해 내일의 국가적 생명과 민족적 운명을 농단하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