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9일자 오피니언면 '중앙포럼'란에 이 신문 정치부분 전영기 부장대우가 쓴 '고건, 충실함과 허전함'입니다. 네테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007년 12월 19일의 대선 투표용지엔 고건 이명박 박근혜 세 사람이 올라갈지 모른다. 현재의 차기주자 '빅3'가 모두 살아남는 경우다. 이명박 박근혜가 출전한다면 한나라당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다는 얘기다. 고건이 나선다면 그가 여권, 혹은 비한나라당 세력의 대표선수 자격증을 땄다는 걸 뜻한다. 야는 분열하고 여는 통합되는 시나리오다. 1여-2야 구도에선 1여가 승리한다. 이는 1987년 1노-3김(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 선거전 이래 확립된 대선 승패의 법칙이다.

    이런 3강 구도의 형성 확률은 얼마일까.

    3강 구도 성사 여부는 '한나라당 이명박-박근혜'조와 '비한나라당 고건-정동영'조의 예선 토너먼트전에 달려 있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워낙 빅 매치다. 1987년의 김영삼과 김대중 같다. 그래서 경선 없이 둘 다 본선에 나설 수 있다. 3강 구도를 관측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건과 정동영은 어떨까. 고건은 지지율이 힘이고 정동영은 세력이 강하다. 두 사람의 우열은 5.31 지방선거에서 가려질 것이다. 호남이 승부처다. 민주당이 차지하고 있는 광주시장·전남지사와 열린우리당이 확보하고 있는 전북지사의 문제다. 고건과 정동영은 호남이 근거지다. 전주북중 선후배 사이다. 둘 다 호남에서 배타적인 지지가 필요하다. 정치운명적으로 모순관계다. 김대중·노무현 후보도 호남의 절대적 지지를 기초로 대통령이 됐다. 호남 유권자들은 이를 '전략적 투표'라고 불렀다.

    둘의 경쟁은 링 위의 격투방식이 아니다. 축구의 승부차기처럼 순서가 있다.

    정동영이 먼저 공을 찬다. 민주당이 지키는 광주시장이나 전남지사에 한 골이라도 넣었다고 치자. 그러면 호남의 대표권은 자연스럽게 정동영 쪽으로 쏠린다.

    정동영이 골을 못 넣으면 지방선거 뒤엔 고건이 공을 찰 것이다. 대선 주자가 없는 민주당, 정동영의 실패로 흔들리는 열린우리당, 충청권에 둥지를 튼 국민중심당을 끌어 모으겠다는 승부킥이다. 고건발 정계개편은 이것을 말한다. 12일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모양이다. 아마 깊은 얘기는 못 나눌 것이다. 정동영은 지방선거 전을 말하고 싶어하는데 고건의 생각은 선거 후에 가 있기 때문이다.

    고건에겐 98%의 충실함이 있다. '정성을 다하면 국민이 감동한다'는 지성감민(至誠感民)의 충실함이다. 청렴·전문성·통합·신뢰·소신·원칙·실용의 안정감이다. 이 덕목들이 혼돈의 시대에 지친 정치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았다. 장외 정치인의 불가사의한 지지율은 여기서 나왔다.

    2%의 허전함도 있다. 그를 2인자처럼 보이게 하는 요소다. 눈 위에 첫발자국을 남기지 못하는 이미지다. 안정적 관리자형, 행정형 리더십의 건조함 같은 것이다. 예컨대 고건은 서울시장을 두 번 하면서 지하철 5, 6, 7, 8호선 160km를 동시에 착수하고 완성했다. 서울을 세계 5대 지하철 도시로 만든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명박의 '화려한 청계천'은 각광받지만 그곳으로 안내하는 '지하의 인프라'는 기억되지 않는다. 청계천 복원은 1%의 가능성에 도전한 정치행위지만, 2기 지하철 건설은 법령과 지위에 의지한 행정행위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소비자의 마음속 저 깊은 곳엔 창조와 도전, 야성에 대한 갈망이 있다. 이 때문에 지지율 조사에선 이렇게 답변하고 투표소에선 저렇게 표를 찍는 일이 벌어진다. 마음에 몇 겹의 꺼풀이 있는 것이다. 고건이 차기 정치에서 성과를 내려면 유권자 마음속 저 깊은 곳을 건드려야 한다. 더 선명하고, 더 내던지고, 더 도전적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