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5일자 오피니언면 '오늘과 내일'란에 이 신문 황호택 논설위원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와 비논리>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영희 씨의 회고록 ‘대화’는 요즘 논란이 일고 있는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을 출간한 한길사에서 나왔다. ‘대화’는 이 씨가 대담 형식을 통해 진보적 지식인으로서의 삶과 학문을 되돌아본 책이다. 이 씨가 1970, 80년대에 저술한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는 ‘해전사’와 마찬가지로 대학가에서 널리 읽히며 1980년대의 주요한 흐름을 형성했다. 중국이 ‘죽(竹)의 장막’으로 가려져 있던 시대여서 이 씨의 책을 통해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을 이해한 사람이 많았다.

    필자는 1980년대 후반 중국에 처음 들어가 지식인들에게서 문화대혁명 체험담을 듣고 이 씨의 책에 나오는 기술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문화대혁명 깃발이 오르면서 베이징대 교수들은 머리에 자루를 뒤집어쓰고 학생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사상 개조를 받기 위해 시골로 하방(下放)됐다. 목사들은 교회를 빼앗기고 강제노동을 했다. 학생들은 공부를 중단한 후 홍위병 완장을 차고 편을 갈라 총싸움을 벌였다. 중국을 황폐화한 10년 내전이었다.

    이 씨의 회고록 ‘대화’에는 30년 전 문화대혁명을 잘못 평가했음을 인정한 대목이 있다. ‘30년 전의 평가와 실제적 검증 사이의 괴리는 전 세계 중국 현대사 연구자들에게 거의 공통된 사실이오. 외국 학자들에 비해 월등히 열악하고 한정된 범위의 정보밖에 없던 나에게는 그 후 알려진 이른바 ‘홍위병’의 반(反)문화적 파괴 행위로 말미암은 여러 가지 부정적 사실은 정확히 파악할 방법이 없었어요.’

    이 씨는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스탈린과 달리 마오쩌둥의 개인숭배는 괜찮다고 평가했다. ‘스탈린은 당과 정부로 구성된 관료화된 권력체제의 거대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앉아 숭배를 강요했지만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통해 스스로 지휘한 당 관료 기구의 타파(打破)로써 민중과 자기를 직결시켰다.’ 비(非)논리다.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누가 됐든 권력자에 대한 개인숭배는 나쁜 것이다.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아 개혁개방으로 나서면서 중국은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중국의 국민총생산(GNP)이 2025년경 미국에 근접하리라는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이 씨가 덩샤오핑을 보는 눈은 회의적이다. 그는 ‘대화’에서 ‘문화대혁명 때 덩샤오핑이 번번이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 노선을 가는 사람)로 비판받고 거듭 낙마한 것은 반대 세력의 탓만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덩샤오핑을 나는 좋지 않게 평가했어요. 본국의 혁명 동지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프랑스 유학생들이 분초를 아껴 기술과 학문을 배울 때, 덩샤오핑은 브리지 게임(카드놀이)에 탐닉했어요. 적수가 없을 정도로 브리지 게임의 명수였어요. 나는 덩샤오핑에게 호감이 가질 않았어.’

    조선일보 박승준 중국전문기자는 ‘전환시대의 논리’는 팩트의 오류투성이라고 지적했다. 자잘한 팩트도 정확해야 하겠지만 더 중대한 것은 관점의 오류이다. 이 씨의 글은 전반적으로 문화대혁명을 추동(推動)하던 쪽의 시각에 가깝다. ‘브리지 게임의 명수’ ‘썩은 주자파’ 덩샤오핑의 실용주의가 경제대국 중국을 만들어 냈다. 이 씨는 ‘죽의 장막’이라는 신화(神話)는 일방적인 미국의 주장이라는 측면이 강하다고 했지만 중국은 마오쩌둥의 사후(死後)에야 본격적인 개방 정책을 펴 장막을 걷어 냈다.

    ‘해전사’나 ‘전환시대의 논리’는 편향된 해석의 문제도 있지만 이 씨의 회고처럼 정보의 제한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오류도 있었을 것이다. 30년 동안 새로 축적된 연구 업적과 자료를 통해 오류를 시정하고 재인식을 시도하는 것은 학문의 다양성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더욱이 1980년대 학계와 젊은 세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이라면 회고록에서 몇 문장으로 해명하고 넘어가는 것으로는 모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