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1일자에 실린 사설 '한-미 대통령 정반대로 말하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부시 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달러위조 문제에 대해 타협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미국은 부시 대통령의 말대로 ‘미 금융기관은 북한의 돈세탁창구로 지목된 방코델타아시아(BDA)와 거래할 수 없다’는 내용의 행정명령을 준비 중이다. 이 조치에 대해 미 의회조사국 연구원은 “궁극적으로 북한과 거래하는 모든 금융기관은 미국과 거래할 수 없게 해 금융기관들이 미국과 북한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앞서 가진 신년회견에서 “미 정부가 북한에 압박을 가하고 붕괴를 바라는 듯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한미간에 마찰이 생길 것”이라며 ‘한미 마찰을 피하려면 대북 압박을 포기하라’는 메시지를 미국에 전했다. 이에 대해 부시 대통령은 ‘한미 마찰을 감수하고서라도 북한을 압박하겠다’고 답한 것이다. 

    그동안 한미관계에 대한 우려가 나올 때마다 부시 대통령은 “한미관계는 중요하다”고 말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관계는 건강하다”고 했었다. 한쪽 대통령은 질문을 피해가고, 한쪽 대통령은 사실을 덮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으며 우리 국민들은 그래도 우리 대통령 말이니 믿어 보자는 측과, 밖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한미 갈등론과 한미동맹 이상론(異狀論) 때문에 대통령 발언을 믿지 못하는 측으로 갈렸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국민들은 그때그때마다 반신(半信)과 반의(半疑) 사이를 오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국민들은 양국 대통령이 신년 회견에서 완전히 상반된 소리를 하는 것을 보고 오늘의 한미 관계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자신의 눈과 귀로 확인했을 것이다. 

    외교는 실무급에서 이견이 발생하면 장관급에서, 장관급에서도 안 되면 정상들이 나서서 봉합하고 정상화시키는 것이 수순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미는 외교의 마지막 수문장인 양국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까지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공식 라인이 작동하지 않을 때 테이블 밑에서 대신 말을 이어줄 양국간 비공식 파이프는 진작에 망가져 버렸다. 

    한미 관계가 이 지경을 맞은 것은 이 정부가 지난 3년간 겉으로는 실사구시를 내걸고 실제론 ‘당당한 외교’니 ‘자주국방’이니 하는 몇 마디 겉치레 구호를 외치는 대가로 외교의 실질을 포기하는 외교를 펼쳐 온 결과다. 전세계 국가들이 유일 초강대국의 단극체제 속에서 국익 극대화를 위해 총력을 쏟고 있는데, 대한민국 혼자 대학 캠퍼스 대자보 수준의 논리를 앞세워 흐름을 거슬러 온 것이다. 그 결과가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한국 외교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