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6일자 사설 '들으면 들을수록 더 아리송한 대통령 말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대통령은 25일 신년 회견에서 “(18일의 신년연설은) 우리 재정의 규모와 복지지출의 실상을 설명한 것뿐인데 이것을 바로 증세 논쟁으로 끌고 가서 정략적 공세에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그 문제의 신년 연설에서 “2030년 장기 재정계획을 세워보면 아무리 재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지출구조를 바꾸더라도 재원이 절대 부족하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했었다. 대통령의 말은 보통 국민의 상식으로 누가 들어도 증세 필요성을 제기한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그랬던 대통령이 이제 와서 재정 관련 통계수치를 국민 앞에 펼쳐놓고 세미나를 한 것뿐인데 일부 불순세력이 대통령이 실제 정책으로 추진하려 한 것처럼 부풀렸다고 말한다. 대통령이 일과시간도 아닌 한밤중 10시에, 그것도 청와대 집무실도 아닌 백범 기념관을 연설 장소로 잡고, 지상파 3개 방송의 황금 시간대를 독점하면서 국민에게 고했던 그 연설이 결국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식의 경제학 강의였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지금 와서 경제학 강의라고 밝힌 그 연설의 배경과 관련, “대통령이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더라도 국민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책은 실현될 수 없다. 모든 문제에 대해 대통령이 먼저 답을 내놓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나라가 뒤집힐 것 같은 소동을 겪으며 대통령을 뽑는 것은 국민 사이에 이해가 갈리는 정책 문제에 대해 대통령이 판단하고 결정한 뒤 국민을 이끌고 가라고 리더십을 위임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거꾸로 나는 결정할 수 없으니 국민들끼리 백화제방 백가쟁명 식의 논쟁을 벌여 결론을 내리면, 그때 자신이 나서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일부 지역의 부동산값이 다시 들썩이는 것은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부동산 정책을 무력화하기 위해 집요한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대통령의 이런 인식은 경제학의 기본 원리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국민의 판단과 행동의 배후에서 애써 악의를 읽어 내려는 태도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자기 집 마련을 위한 실수요에 의해 거래되는 아름다운 ‘부동산 시장’과 투기 세력들이 거래하는 추악한 ‘부동산 시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대다수 국민은 집에서 살기 위해, 거기다 더해 그 집값이 다른 집값만큼 오르길 기대하는 두 가지 생각으로 집을 사고판다. 현실이 이런데도 하나밖에 없는 부동산 시장을 ‘아름다운 시장’과 ‘추악한 시장’이 따로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추악한 시장’은 때려잡겠다고 나서니 ‘아름다운 시장’을 포함한 시장 전체가 죽어버린 것이다.

    대통령은 “부동산 정책을 시장원리에 따라 ‘완벽하게’ 만들면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정책에는 ‘완벽’이란 것이 없는 법이다. 절도를 막기 위해 모든 절도범을 사형에 처한다고 하자. 그럼 절도는 줄어들지 모르지만 다른 문제를 낳게 된다. 그래서 정책의 목표와 그 목표 달성에 동원하는 수단 간에는 균형과 조화가 필요하다. 이걸 판단하는 안목이 바로 국가운영의 경륜이라고 하는 것이다. 정부의 다주택 보유 중과세, 고가 부동산 양도세 중과세 정책이 시장원리에 따라 ‘다른 아파트는 다 팔고 강남 아파트 한 채만 갖고 버틴다’는 생각을 낳게 했고 그 결과 강남 아파트값만 치솟고 있는 것은 정책 목표와 그에 동원하는 수단의 선택에 무리를 범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지난 18일 연설에선 “IMF위기 때문에 양극화를 비롯한 경제 형편이 어려워진 것”이라고 했고, 25일 회견에선 “지난 3년간 고생할 만큼 하고 이제 회복의 길로 들어섰다. 작년 4분기 성장률이 당초 예상을 크게 웃도는 5.2%를 기록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IMF위기를 겪었던 태국은 2003, 2004년 6.8%, 6.1% 경제성장을 기록, 우리 성장률 3.1%, 4.6%를 크게 웃돌았다. 이런 낮은 경제성장률이 기업 등 민간 부문의 책임인지 정책의 잘못에 따른 정부의 실패 때문인지는 따질 필요도 없이 자명한 일이다. 

    대통령은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임명 논란에 대해선 “어느 나라 대통령이 장관 임명하는데 당의 토론에 부치나. 처음부터 못 들은 척하고 바로 임명하면 됐을 텐데 유보했다가 문제를 키웠다. 유 장관 임명에 반대하는 것은 과반수 목소리도 아니고 열린우리당의 다수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리서치 앤 리서치’ 조사에서 1·2 개각이 “잘못됐다”(51.4%)는 응답이 잘됐다(12.5%)는 응답의 네 배를 웃돌았다. 유 복지장관 반대 서명을 한 열린우리당 초·재선 의원만 34명이었다. 대통령은 “어느 나라 대통령이 장관 임명하는데 당에 토론을 부치느냐”고 했지만 도대체 어느 나라 대통령이 오기 싸움하듯 자기 당이 그렇게 반대하는 인물의 장관 임명을 밀어붙이는지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정말 걱정스러운 것은 이 나라 국정의 총책임자인 대통령이 “자신은 끊임없이 그 시기의 여론과 일치하지 않는 선택을 해왔지만, 그런 선택을 국민에게 포괄적으로 인정받아 대통령이 됐다고 생각한다”면서 앞으로도 그런 길을 가겠다고 밝힌 대목이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앞으로도 단단히 각오하라고 이렇게 친절하게 미리 귀띔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지 근심해야 할지 모를 일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