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6일자 오피니언면 '아침논단'에 소설가 이청준씨가 쓴 '사학의 역사와 긍지'라는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새 ‘사학법’을 둘러싼 논란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상황이다. 현실 진단과 이해(利害)가 다른 사회 집단 간 혹은 정치세력 간의 힘겨루기가 주요인인 듯싶다. 이 뻔한 명분다툼을 마무리 지을 온당한 길은 없는가? 그 해법을 위해 여기 우선 필자가 접해온 고향 지역 사학의 역사와 성격을 짚어본다. 

    인구 500명 안팎의 남해안 마을(전남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에 1906년 개신교 교회가 세워졌고, 그를 발판으로 이후 한 세기 만에 이 마을 가계(家系) 출신 목사를 34명이나 배출하는 기록을 낳았다. 우리 초기 기독교가 도회지역뿐 아니라, 열악한 삶의 벽촌 간에서도 같은 시기에 선교활동을 시작한 결과로, 이는 기독교정신의 선양과 교세의 확산만을 뜻하지 않는다. 

    개화(開化)의 세기에 즈음하여 신학문에 목말라하던 벽촌 청소년들에게 교회는 대처의 성경학교나 신학교를 찾아 새 배움의 길로 나아가는 향학(向學)의 관문이었고, 그 연찬과 목회자의 길은 동시에 지역주민 교육과 사회 교화의 역(役)을 겸한 터이기도 하였다. 

    요즘 말하는 ‘종교계 사학’의 숨은 뿌리로서 건학(建學) 100주년을 맞은 대도시의 여러 학교재단들과 함께 당당하게 우뚝 선 한 시골 교회의 교육사적 기여 사례인 것이다. 

    지역의 범위를 조금 넓혀, 8·15 해방을 맞아 새 독립정부가 수립되고서도 그 고을 면내(面內)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초등학교 의무교육제 시행으로 중학교 진학 희망자는 많은데, 나라 재정은 도회 학교 진학이 어려운 이 시골 아이들을 들밭 길에 내팽개쳐둘 수밖에 없는 형편. 이를 지켜본 한 청년 독지가가 염전(鹽田)사업을 하는 고을 유지의 지원을 얻어 지역 사립중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2001년 공립학교로 재편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50여년간 이 학교에서는 1만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어느 해 봄, 필자는 이 중학교를 거쳐 서울에서 학업을 마친 나이 든 선배들이 갓 상경한 동문 후배들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다짐하는 말을 들었다. “선배가 없는 우리는 이 서울 거리에서 아까운 세월을 많이 헤맸다. 너희에겐 우리가 그 헛된 방황이 없게 하겠다.” 

    그리고 선배들은 지금까지 활발한 장학사업과 동창회 활동 등으로 후배들을 지속적으로 후원하며, 지역사회와 나라의 일꾼으로 함께 힘을 합해 가고 있다. 한 시골 사립학교가 디딤돌이 되어 수많은 벽지 젊은이들이 뒷날 그 ‘헛된 헤맴’조차 값질 만큼 자신의 삶과 우리 사회의 뜻 깊은 주체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 지역 사례를 길게 소개한 것은 먼저 우리 사학이 공교육 못지않게 뿌리가 깊고 국가 사회에 대한 기여가 절대적이라는 점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이는 우리 사학이 대학교육의 태반을 감당해온 점, 특히 초기 여성교육의 요람 격인 기독교 사학들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더욱 기념비적이라 할 만하다. 

    다음으로 명념할 바는 우리 사학이 기독교뿐 아니라, 불교나 유교 등 각기 그 종교적 신념이나 가치관에 바탕해 있는 이념적 특성이다. 을사늑약을 전후한 일본의 종교침략 책동 앞에 우리 고유의 종지(宗旨)를 이어 지키기 위한 불교계의 도제(徒弟) 양성 교육운동은 물론 서당(書堂)과 향교(鄕校), 서원(書院)으로 이어진 입신양명의 꿈과 의로운 선비정신의 전통이 깔린 민족사학의 경우에도 그 종교적 특성은 역연하다. 

    그 태생적 특성은 또한 우리 사학의 가치 다양성과 자율성을 담보하는 소이이기도 하다. 3·1구국정신에 이어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한 일제하의 기독교나 ‘사찰령’을 앞세운 총독부의 폭압 앞에 정교(政敎) 분립의 원칙을 내세우고 나선 선각자들의 불교유신 정신은 각기 그 사학의 독자적 이념과 자율성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사학재단과 긴 역사 가운데에 도에 넘는 사익(私益) 추구와 운영비리 사례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이제라도 분명히 바로잡혀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이 힘들게 쌓아온 우리 사학의 역사를 오손하고 명예와 긍지를 빼앗는 노릇이 돼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학 고유의 교육정신과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쪽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