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9일자 오피니언면 '오늘과 내일'란에 이 신문 황호택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 여러분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언론사에서 경험이 풍부한 게이트 키퍼(문지기)들은 기사의 사실과 균형을 검증하고 핀트를 적절하게 조정하는 기능을 한다. 합리적이고 꼼꼼한 게이트 키핑이 실종되면 오류의 쓰나미가 언론사 전체를 덮쳐 버릴 수 있음을 MBC ‘PD수첩’이 보여 주었다.

    그러나 게이트 키핑이 잘못돼 특종이 사장(死藏)되거나 기사의 참신성을 퇴색시키는 경우도 있다. 일선 기자들이 쓴 기사는 언론사 게이트 키퍼들이 ‘상식적으로 공유한 생각’이라는 장벽을 뛰어넘기 어렵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허스트 인터내셔널 뉴스 서비스의 햇병아리 기자로 영국 총선을 취재했다. 케네디 기자가 런던에서 뉴욕으로 처음 보낸 기사는 윈스턴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의 총선 패배를 예측한 것이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처칠이 선거에서 질 것이라는 분석은 게이트 키퍼들의 상식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뉴욕 본사의 게이트 키퍼들은 케네디의 기사에 ‘정신이 나갔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처칠은 1945년 7월 총선거에 패배해 총리직을 내놓았다. 

    이런 사례도 역(逆)으로 언론 보도에서 ‘문지기 역할’의 중요성을 말해 준다. 공기(公器)로서 국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할 때 보도의 다각적 사전 검증은 필수적이다. 

    한국 언론 특유의 PD저널리즘은 제작 특성상 게이트 키핑이 약하다. PD들은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고 게이트 키핑을 ‘창작에 대한 간섭’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노조 입김이 센 회사에서 노조위원장 출신이 사장이고, 역시 노조위원장 출신이 책임 PD를 하는 프로그램이라서 그런지 사후 수습 과정에서도 합리적인 논의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 같다. 

    황우석 서울대 석좌교수 연구팀 연구원의 난자 제공도 연구 및 치료용 난자의 부족에 초점을 맞추어 보도했더라면 여론의 역풍을 피하며 진실은 진실대로 밝히고 줄기세포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노련한 게이트 키퍼들의 역량은 바로 이런 데서 발휘된다. 

    미국에서는 보수적인 기독교계와 공화당 정권이 줄기세포 연구에 반대해 과학자들은 연방기금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 기독교 근본주의는 공화당이 집권을 하면 더욱 고개를 든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줄기세포 연구에 공식적으로 반대한다. 

    미국의 줄기세포 연구가 보수 우파에 발목 잡혀 있는 사이에 황 교수팀이 연구를 빨리 진척시켜 확실한 기술 우위를 선점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민주노동당 같은 좌파가 다리를 건다. 반미를 부르짖다가 줄기세포 연구에서는 미국의 근본주의 보수 세력과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한국 좌파의 이념적 좌표가 혼란스럽다. ‘PD수첩’의 PD도 대학 시절 민중민주(PD)계열에서 활동했던 386이라고 한다. 

    황 교수가 PD수첩팀에 줄기세포 5개를 순순히 넘겨주고 가짜 가능성이 제기되는데도 침묵한 것은 수수께끼다. PD수첩팀의 전방위 취재에 황 교수가 과학 외적인 위협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에 가서 “황우석을 죽이러 왔다”고 할 정도로 취재 윤리를 무시한 사람들이 황 교수에게 어떤 위협을 가했는지 알 수 없다. 이들은 직업윤리나 적법절차(due process)를 무시하는 결과지상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정상적인 게이트 키핑의 부재는 진보나 좌파 쪽으로 갈수록 두드러진다. 이 정부가 들어선 후 386 윗세대의 게이트 키퍼들은 독재정권에서 침묵했거나 오염됐다는 이유로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경륜을 갖춘 게이트 키퍼들의 쓴소리는 ‘수구꼴통의 헛소리’가 돼 버린다. 

    우리 사회는 지금 문지기의 실종에 따른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