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5일자 오피니언면 '이홍구 칼럼'에 이 신문 고문인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올린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국내정치부터 외교문제까지 매사가 순조롭게 풀리기보다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만 가며 설상가상으로 예기치 않은 천재지변까지 덮쳐 민심은 점점 멀어져 가니 앞으로 남은 3년의 임기를 어떻게 버틸 수 있을지 매우 걱정스럽다'. 이것은 며칠 전 토머스 폴리 전 미국 하원의장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당면한 작금의 참담한 입지를 걱정하며 한 이야기다. 미국 내외의 수많은 부시 비판자는 그가 이라크 전쟁의 수렁으로 조금씩 더 깊이 빠져들수록 동정보다 오히려 쾌재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을 둘러싼 부시 대통령의 실정(失政)이 미국 여론을 양분하고, 급기야 고립주의적 충동을 자아낼 수 있다는 폴리 전 의장의 진단을 예사롭게 넘겨버릴 수는 없다. 미국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은 고별 연설에서 다른 나라, 다른 대륙에서의 분쟁에 개입하지 말 것을 국민에게 간곡히 당부했다. 그러한 고립주의는 2세기에 걸쳐 미국 외교정책에서 중요한 원칙의 하나로 작용했다. 이제 이라크 전쟁을 둘러싼 여론의 양극화는 향후 미국의 세계전략이 고립주의와 개입주의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논리를 시사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와 달리 아직도 개별적인 독립국가 체제에 의한 경쟁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아시아의 경우 각자 미국과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야 하는 단계에 돌입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아시아 강대국인 중국과 일본이 상호 불신이 깊어지는 가운데도 각기 미국과의 협조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미국인보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미국의 국력과 전략적 위치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겠다.

    지난주 베이징(北京)에서 만난 중국 지도자들은 예외없이 중국의 평화적 발전을 기약하며 미국과 대결이 아닌 협조관계를 유지하겠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놀랄 만한 고도성장에서 비롯된 자신감과 여유가 냉철하게 현실적 판단을 하도록 지혜를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강해진 중국의 국력과 영향력을 자랑하기보다 오히려 직면한 난제와 한계성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7위지만 가구당 수입은 109위에 머물러 있으며, 매년 새 일자리를 2000만 개씩 창출해야 하고, 중국 해군이 작전 가능한 권역은 200해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라는 등 아직도 갈 길이 먼 나라임을 자인하고 미국과의 평화적 협조관계 유지가 선택이 아닌 필수조건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미국 의회에서 중국에 대한 오해나 편견이 적지 않은 듯싶어 주미대사관의 인원과 예산을 늘리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그들의 전략적인 판단을 실증하고 있다.

    한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이끄는 일본은 미일동맹 유지·강화에 전력투구해 온 지 이미 여러 해가 됐다. 아시아 이웃 나라와의 우호관계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일본의 국가적 위상을 재정립하겠다는 고이즈미 총리의 자세가 부시 대통령의 인기·영향력 하락과 겹쳐질 때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속단하기 어렵지만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의 여러 지도자 사이에서, 그리고 미국의 일본 전문가 사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폴리 의장이 우려한 대로 미국 여론에서 고립주의적 경향이 짙어진다면 한미동맹 관계를 중심으로 국가발전을 도모해 온 우리로서는 누구보다 민감하게 전략적 구상을 가다듬어야 한다. 중국과 일본이 미국과의 협조관계 강화에 주력하는 상황에서 맥아더 동상 문제 등으로 국론이 분열되는 안타까운 장면을 더 이상 연출할 여유는 없다.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일수록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처할 준비를 서두르는 것이 생존의 지혜다. 가깝게는 6자회담의 부진이나 결렬, 멀게는 한미동맹, 미일동맹을 뛰어넘는 미중합작, 즉 제2 닉슨 쇼크의 가능성도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