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일자 오피니언면 '아침논단'란에 소설가 이청준씨가 쓴 글입니다. 네티즌 여러분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어느 마을 사람들이 과일을 먹기 위해 배나무를 심었더니 웬일로 사과가 열렸다. 마을에선 이 과일을 무엇이라 부를까 생각하다 배나무에 열렸으니 ‘배’라 부르자 했다. 그런데 마을에 진작부터 자라온 진짜 사과나무의 열매가 문제였다. 사람들은 이번에도 의논 끝에 배나무에 열린 ‘배’열매와 같은 과일이니 이 역시 ‘배’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웃동네 사람들이 이들을 보고 “너희는 사과를 배라고 말하는 바보들”이라 비웃었고, 이에 화가 난 마을 사람들은 말썽의 화근을 없애기 위해 진짜 사과나무들을 모조리 베어 없애 버렸다.

    지난 1972년의 이른바 ‘10월유신’ 1년 전에 쓴 필자의 우화소설 ‘미친 사과나무’의 줄거리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한 구실로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것을 내세워 “서구식 민주주의는 몸에 맞지 않으니 우리는 우리 몸에 맞는 민주주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우겨대던 강압적 상황을 두고 그 말값의 왜곡 현상이 불러올 비극을 은유한 것이었다.

    “말은 존재의 집”이라는 철학적 명제는 말과 실체와의 상호 약속관계를 잘 함축하고 있다. 말의 질서 위에 운행되는 우리 삶이나 세상은 말로 이루어진 약속제도인 셈이다. 그 약속관계가 깨어지면 사물을 분별할 수 없는 혼란과 불신, 가치관의 전도를 겪게 되고, 우리 생존의 질서가 무너지는 허무주의적 암흑 상황을 낳게 된다.

     필자가 우화소설을 쓸 당시 우리는 오래잖아 그런 세상을 맞게 됐다. 국가 안위를 위해 언론과 표현의 자유와 같은 민주적 권리의 일부도 유보해야 한다는 ‘유신세력’의 선언과 함께 모든 언로가 막힌 가혹한 검열제도 아래에서 우리는 시중을 떠도는 ‘유비통신’ 따위 유령 정보에 의지하며 말의 진실에 얼마나 목말라했던가. 

    그러다 집권층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그 암흑세상 자체를 뒤엎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믿음을 잃은 말이 사람들 간의 불신을 낳고 세상을 병들게 하며, 그 폭력과 야만의 현실 앞에 말의 신실성(信實性)을 지켜야 하는 우리 책임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똑똑히 보여준 셈이었다. 말의 신뢰성을 통해 말 자체를 지켜내야 할 책임은 그 어느 곳보다 우리 사회와 삶에 큰 힘을 미치는 정치성 토론 마당이나 권력성 발화(發話)의 경우에 가장 무겁고 클 것이다. 정치도 다름 아닌 말의 약속과 그 실천제도일 뿐이다. 정치인의 말은 곧 그의 정치다. 

    1983년 노벨상을 받은 영국 작가 윌리엄 골딩의 ‘후계자들’에는 인간 역사에서 말의 발생이 권력자의 명령과 지배수단에 연유한다는 시사가 보인다. 뭇 독재자들의 말에서 보듯, 이는 지배적 폭력성을 부정할 수 없는 권력언어의 태생적 속성을 말함이다. 오늘의 시민사회에서도 그 속성은 여전할 것인 바, 책임 또한 그만큼 크고 절박해야 함이 당연하다.

    그런데 지금껏 우리 귀에 익어온 정치마당의 말들은 어떤가. ‘청문회’라면 모르쇠와 오리발 내밀기, 도청 수사 등 갖가지 부정비리 의혹사건에선 고구마 줄기처럼 이어지는 거짓말 덩어리와 꼬리 자르기·덮어씌우기 수법들을 먼저 떠올리는 우리다. 뿐인가. 뻔한 위장과 편나누기와 아전인수식 민심 해석, 궤변과 적반하장과 구정물 끼얹기, 나만 옳다는 독선적 우김질과 윽박지르기, ‘아니면 말고’ 식 시침떼기와 말 바꾸기와 둘러쳐 넘기기… 등등의 화법(話法)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놀라는가. 큰 선거철마다 헤쳐 모여 식 새판짜기 정당을 만드는 정가의 물거품 같은 공약과 정강정책들은 또 어땠던가.

    “기도 잘하는 사람 신앙심이 의심스럽다”는 어느 목사의 우스개처럼, 진실이 담기지 않은 허울뿐인 말은 이미 말이 아니다. 심지어 ‘역사’나 ‘정의’ ‘민족’과 같이 명분이 크고 그럴싸한 말이라도 실체적 진실이 지켜지지 못할 경우엔 우리에게 약이 되기보다 거꾸로 세상을 무너뜨릴 독이 될 뿐이다.

    말이 무너지면 세상도 무너진다. 우리 모두를 위해 말의 참값과 책임이 지켜져야 한다. 이는 우리 생존과 사회존립의 원칙 문제다. 고귀한 정신에 빛이 있듯이 참된 말에는 향기가 있다. 말이 참되고 아름다우면 우리 삶과 세상도 참되고 아름다워질 것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