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7>분열되는 상해 임정

    방랑자 (27)       백범(白凡) 김구는 나보다 한 살 연하였는데 상해 임정 요원 중 내가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김구의 성품이 직선적이나 정직했기 때문이다. 매사에 정

    2011-01-04
  • <266> 임정은 망국 조정과 똑 같다

    방랑자 (26)독립군은 만주 땅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반년 전인 1920년 6월에 길림성 왕청현의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에게 패하여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에 격분한 일본군은 10월 2일, 마적단을 시켜 훈춘성을 공

    2011-01-03
  • <265> 사람은 저한테 좋은 소리만 듣는다

    방랑자 (25) 웨스트 하이카(West Hika)란 이름의 하물선에 탄 것은 1920년 11월 16일. 내가 그 날짜와 배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당시의 상황이 몹시 험난했기 때문이다. 하와이에서 대부분의 선편이 일본항을 경유했기 때문에 상해 직항편이 드물기도 했

    2011-01-03
  • <264> 현상금 걸린 임정대통령

    방랑자 (24) 내가 워싱턴을 떠나 하와이 호놀루루항에 도착했을 때는 1920년 6월 29일이다. 이때는 이미 대한민국의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비공식이나마 인정을 받고 있었던 터라 미국 경찰의 경호를 받았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 이

    2010-12-31
  • <263>임정 실세들의 사조직

    방랑자 (23) 「박대장께서는.」안영준이 머리를 들고 나를 보았다.「박사님께서 상해에 오실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여론에 밀려 박사님을 임정 대통령에 임명했지만 박사님께서 오시면 꼬투리를 잡아 자진 사퇴를 시키고는 정권을 잡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허, 임정 대통령이

    2010-12-30
  • <262> 상해의 비판자들

    방랑자 (22) 1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승전국 대열에 낀 것은 영국과의 동맹을 이유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독일령 격파를 명분으로 산동반도에 1개 여단을 상륙시켜 교주만에서 제남(濟南)까지의 지역을 점령했고 해군은 남태평양의 독일령 제도를 탈취했다.

    2010-12-30
  • <261>안창호 먼저 상해로

    방랑자 (21) 당시에는 모르고 있었지만 아마 조국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 동포들한테도 내 이름이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특히 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측 승리로 정전이 되었고 미국이 주도하여 세계 질서를 세우는 상황이었으니 나에 대한 기대가 컸을 것이다

    2010-12-29
  • <260> 총리-대통령 추대 단체 6곳

    방랑자 ⑳   5년만에 찾아온 태산의 묘는 잡초에 덮여졌고 묘비는 검게 풍상으로 그을려져 있다. 이곳은 필라델피아 근교의 론뷰(Launview) 공동묘지. 태산이 묻힌 지 13년이 되었다. 묘비에 써진 태산아(THISANAH) 그리고 (1899-1906)의 짧은 글이

    2010-12-28
  • <259>조선은 버림받았는가

    방랑자 ⑲   「글쎄요, 민족자결주의는.」하고 백악관 비서실장 튜멀티(Joseph Tumulty)가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백악관의 비서실장실 안에서 튜멀티와 단둘이 마주 앉아있다. 비서실장 독대인 셈인데 이만하면 나에게 최상의 예우를 갖춰 준 셈이다. 그러나 지금

    2010-12-27
  • <258> 3.1운동이 일어났다

    방랑자 ⑱   3·1운동이 일어났다. 조국 동포들이, 그것도 압제 하에서. 그 소식을 들은 순간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박용만이다. 박용만의 무장군단. 잘 훈련된 군단이 돌진하는 장면이다. 나는 뉴욕에서 그 소식을 들었는데 3월 10일쯤 되

    2010-12-25
  • <257> 민족자결주의! "윌슨을 만나자"

    방랑자 ⑰   내가 다시 미국 본토 땅을 밟은 것도 1919년 1월 15일이었으니 만 5년만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강화회담에 약소국(弱小國)동맹회의 조선국 대표로 국민회에서 선발되었기 때문이다.물론 상해의 신한청년단

    2010-12-24
  • <256>'하와이 사단'

    방랑자 ⑯   그날 이후로 나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를 장악했다. 나는 권력이란 국민의 지지가 바탕에 있어야 형성된다고 교육받았으며 체험을 한 사람이다. 하와이에 온 후에 나는 학교와 교회, 그리고 잡지 발간 일에만 몰두했어도 그것이 바로 내

    2010-12-23
  • <255> 나를 비난해주게

    방랑자 ⑮   국민회 회비 횡령은 사실로 드러났다. 그해 연말 안수일을 중심으로 한 회원들이 결산을 확인한 결과 1만불이 넘는 회비중 절반인 오천불 정도의 사용처가 불분명했다. 안수일로부터 그 사실을 들은 내가 격분했다. 동포의 성금을 횡령,

    2010-12-22
  • <254> 돈과 멀어야 마음이 편하다

    방랑자 ⑭   한인기숙학교를 중앙학교로 이름을 바꾼 나는 남녀공학을 실시했는데 한인 최초의 남녀공학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학생 기숙사를 세웠다. 그래서 그 기숙사로 내가 하와이에 왔을 때 카우아이(Kauai)섬 교회에서 만난 김미옥이도

    2010-12-21
  • <253> 박용만의 분투

    방랑자 ⑬   나는 1913년 8월 25일에 한인기숙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교민 아이들의 교육에 열정을 쏟는 한편으로 교회에서 교민들의 단합과 조국에 대한 봉사를 강조했다. 나를 하와이로 초청한 감리교 감리사 와드만이나 박용만 모두의 기대에

    2010-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