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들어 미국 사회에 '시빌리티' 논의가 커지고 있습니다.
    '시빌리티(Civility)'는 교양과 품위, 문명과 문화, 시민정신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논의는 아리조나주 투산(Tucson)에서 연방하원의원이 총격으로 중상을 입고 6명이 사망하고 십여명이 부상당하면서 더욱 중요한 미국의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총격 사고가 난 뒤 보수계와 진보계가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을 때 오바마 대통령은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모임에 참석해 미국 사회의 토론과 대화가 지극히 양극화 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만약 이들의 죽음이 우리 사회의 공적 대화에 '시빌리티'를 선도하는데 도움을 준다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번 비극이 '시빌리티'가 부족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품위 있고 정직한 공공 담론이 우리 국가가 처한 도전에 대응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이것을 위해 미국은 도덕적 상상력을 높이고 서로에게 경청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연설은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후 가장 강력한 호소력을 가진 연설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이 그의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까지도 공감을 준 것은 그의 '시빌리티' 때문이기도 합니다. 품위와 교양이 도전받고, 보수와 진보가 서로에게 비난전을 하고 있을 때 대통령의 품위 있는 '시빌리티' 연설은 서로의 비난전을 잠재우게 했습니다.

    오바마의 '시빌리티' 연설이 설득력을 가진 것은 그가 자신이 속한 정당의 입장을 말하지 않고 '시빌리티' 본질을 진중한 자세로 연설했다는 점입니다.
    미국 정치의 교양과 품위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누구를 비판하지 않고, 오늘의 시련을 미래를 위한 밑거름으로 생각했다는데 지도자의 품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국민들의 태도에 '시빌리티'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미국 사회가 갈수록 첨예화되고 정치와 문화에서 '시빌리티'를 잃어가는 요인으로 "토크 라디오"(Talk Radio)가 많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토크 라디오는 라디오에서 보수나 진보 논객이 특정한 이슈나 정책을 가지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면서, 청취자들과 전화로 대화를 하는 방송입니다. TV와 FM 라디오에 밀려 AM 라디오가 사양길을 걸어야 하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 토크 라디오가 본격화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논객들이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러시 림바우(Rush Limbaugh)는 1천5백만 명, 시안 해니티(Sean Hannity)는 1천2백만 명의 청취자를 가질 만큼 막강한 힘을 확보했고, 림바우는 보수 진영의 지도자라고 자처할 정도로 보수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들 토크 라디오 주재자들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논리 전개가 극단적인 경우가 많고, 의견이 다른 청취자를 극렬하게 공격하거나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립니다.
    24시간 토크 쇼만 하는 라디오 방송국이 수백 개에 이르고 이들 방송국은 미국인들의 의견을 갈수록 대결적이고 분열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시청자를 많이 확보하고 있는 토크 라디오의 주재자들이 대부분 보수 논객들입니다.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토크 라디오 풍토는 미국의 토론 문화를 감정적, 극단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아리조나주 투산에서 연방하원 총격사건이 발생했을 때 '시빌리티' 논쟁이 나오고, 거기에 토크 라디오가 중심에 부상되었던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이 세계 지도국이 된 것에는 '시빌리티'라는 선진성과 품격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품격과 교양이 갈수록 추락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강력한 '시빌리티'의 기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빌리티'를 상징하는 "익스큐즈 미(Excuse me!: 죄송합니다.)가 때로는 공허하게 들리고 형식화 해가고 있지만 그래도 "익스큐즈 미" 문화는 미국의 선진성을 지탱시키는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시빌리티'는 단순히 교양이나 품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성, 정직성, 민주성, 친절, 겸손, 관용과 포용 등 선진성과 문명성의 총체적인 개념이기도 합니다. '시빌리티'는 건강한 민주사회의 초석이고, '시빌리티'가 없으면 민주주의가 가능치 않습니다. 시빌리티는 국민 인격의 수준, 국격의 수준입니다.

    미국 정치에서 '시빌리티'를 말할 때 흔히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의 "시빌리티 규칙(Rules of Civility)"를 거론합니다.

    워싱턴이 14세였을 때 프랑스의 매너 책을 카피해서 숙지했던 "시빌리티 규칙"은 미국 정부와 정치 문화에 바탕이 되었고, 이것은 건국의 역사와 함께 미국 사회에 뿌리 내렸습니다.
    110개 항목으로 된 "시빌리티 규칙"은 "다른 사람이 이야기 할 때 잠을 자지 말라,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때는 말하지 말라, 상대방과 말할 때 입에서 침을 튀기지 않도록 하라, 비록 적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뻐하지 말라..." 등 아주 사소하면서도 구체적이지만, 늘 상대를 배려하는 정신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결국 '시빌리티'의 본질은 남에게 대접 받고 싶으면 상대를 그만큼 존경하고 대접하라는 인간사회의 황금률을 뜻하는 것입니다. '시빌리티'는 문명사회로 가는 정신이자 태도입니다.

    미국사회의 '시빌리티' 논쟁을 보면서 한국의 '시빌리티'를 생각했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은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으로 '시빌리티'의 근간이 되는 예의와 겸손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높았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품위 있는 국가였습니다.

    오히려 개척시대의 미국은 무법천지였고, 예의와 교양이 바닥이었지만 청교도 정신과 시민정신으로 미국의 의식은 세계적 수준으로 변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은 식민지와 전쟁을 거치고, 분단의 비극 속에 이념 갈등의 포로가 되면서 동방예의지국의 품위가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식민지와 전쟁 경험은 인간의 심성을 피폐화시켰고, 전제군주의 수탈과 가렴주구(苛斂誅求)는 착한 국민들의 가슴을 분노와 극단주의로 치닫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분단으로 인한 이념 대결은 한국 사회에 극단주의를 가속화 시켰고, 극단주의는 오늘의 조국을 가장 힘들게 하는 병이 되었습니다. 극단주의를 경계하고 그 척결에 솔선해야 할 지식인들과 지도자들이 오히려 극단주의를 부추기고, 자신의 이익과 합리화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오래전, 한국에서 미국을 방문한 선배 언론인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한국의 대통령 선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분은 진보적 후보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분의 과거 경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하고 지금의 한국을 위해서는 보수적 후보가 필요하다는 제 속심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 언론인은 너무나 놀란 눈으로 "아니 조광동씨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하고 정색을 했습니다.
    이분과의 인연이나 제 과거 성향을 생각하면 선배가 정색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 말에 선배 언론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내가 사람 잘 못 봤군.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변질될 수 있어?" 노기 띤 얼굴로 이 언론인은 식당을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놀라고 어이가 없었지만 죄송하다는 말을 계속하면서 "아니, 선배님은 의견이 다르면 식사도 같이 못합니까?" 하면서 옷자락을 붙잡아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그래, 나는 한국에서도 수구적인 사람들과는 자리를 같이 안 해!" 이 말은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이 언론인은 존경스런 분입니다. 그런데 의견이 다른 것, 정치적 입장이 다른 것, 이념과 사상이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군사독재에서 고통당한 지식인들의 분노와 상처였지만, 조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먹구름이었습니다.

    한국에는 이런 지식인이 의외로 많습니다. 의견이 다르면 적이 되고, 생각이 달라지면 과거의 관계가 단절되는 풍토에서는 인간의 품위가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면 그 사회의 '시빌리티'는 죽어 버리고 맙니다. '시빌리티'가 죽으면 국민의 심성이 병들고, 극단적이 되고, 분노와 증오가 들끓게 됩니다. '시빌리티'가 죽은 사회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습니다. 구호가 아무리 화려하고, 제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시빌리티'의 본질이 되는 관용과 포용이 없으면 그 구호는 깡통이 되고, 그 제도는 껍데기가 됩니다. 결국은 그 사람이 생명을 걸듯이 신봉하는 이념과 사상의 의미도 퇴색하고 죽어 버리고 맙니다.

    '시빌리티'는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요체이자, 선진국이 되는 필수적인 초석입니다.
    자기 생각을 신념으로 믿지만,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다른 것을 관용하고, 겸손한 것이 '시빌리티'입니다.

    저는 미국 사회에서 토론할 때 "존경하는 마음으로 의견을 달리 합니다"(Respectfully Disagree)란 말을 좋아합니다. 여기에 민주주의의 관용과 겸손, 정중함이 있고, 선진성의 절제와 품위가 있습니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상대의 인격과 생각을 인정하고, 상대의 의견과 실체를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 의견을 경멸하거나 비웃지 않고, 상대방의 주장을 경청할 때, 비록 합일점을 찾지 못해도 거기가 감정과 분노와 미움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허지만 이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상대방이 격렬하게 공격할 때, 의견의 본질을 말하지 않고 인신공격을 할 때 대화와 토론은 쉽게 진행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맞대응을 하지 않는 것이 '시빌리티' 입니다. 상대가 인신공격을 하고, 본질을 빗나가는 극단적인 공격을 할 때 침착함과 냉정성을 잃지 않는 것이 '시빌리티'로 가는 중요한 자질이 됩니다.

    나라의 국격을 가늠하는데 '시빌리티'(Civility)는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는 보수나 진보의 신념보다 그 신념을 전개하고 설득하는 대화 방법과 토론 태도, 대화의 인격, 토론의 품위가 더욱 중요합니다. 신념을 담는 그릇이 망가질 때, 그 신념이 아무리 훌륭해도 신념은 가치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품위와 인격을 가지고 자기주장을 하는 자질이 국민의 '시빌리티', 나라의 국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