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세의 비밀, 그 일그러진 초상』 중에서
  • 1. 운동권의 개관
    우리나라 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운동권세력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운동권이란 용어는 1980년대 후반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주로 대한민국체제를 무너뜨리는 민중민주주의운동을 하는 반대세 좌익운동권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그러다 1990년 전후 일어난 공산권 붕괴를 계기로 좌익운동권에서 이탈한 세력이 많아지면서 운동권의 의미가 넓어졌다. 즉 1960년대 4ㆍ19혁명에서 1987년 6ㆍ10항쟁 등에 이르기까지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반정부 민주화운동을 했던 우익(대세)운동권까지 포함하는 용어가 된 것이다. 따라서 운동권에는 대한민국의 체제를 긍정하는 우익(대세)운동권과 대한민국체제를 부정하는 좌익(반대세)운동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우익운동권이란 대한민국체제를 긍정하고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실현시키기 위해 반독재투쟁 등을 전개한 그룹이다. 1960년 4ㆍ19혁명, 1964년 6ㆍ3사태, 1970년대 반유신투쟁,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ㆍ10항쟁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대부분의 세력들은 자유민주화를 실질적으로 이루기 위한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을 자유민주화세력 즉 우익운동권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6ㆍ29선언 이후 정치ㆍ사회의 민주화가 실현되면서 반독재 투쟁, 이른바 ‘민주화투쟁’에서 벗어나 현실 참여로 나아갔다. 이들은 제도권 정당 등으로 진입하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의 참여로 인해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함께 민주화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는 평가를 듣게 되었다. 자유민주화세력의 동참으로 대한민국 우익은 ‘독재수호세력’이라는 오명을 벗어버리고 명실 공히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하는 우익이라는 평가를 듣게 되었다. 

    둘째, 좌익운동권은 반독재투쟁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실제는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고 사회주의체제로의 변혁을 추구한 반국가ㆍ반체제 그룹이다. 좌익운동권의 뿌리는 매우 깊다. 해방 전후 조선공산당ㆍ남로당 등 좌익활동세력, 정부 수립 전후 및 6ㆍ25전쟁 와중에 활발했던 빨치산 활동세력, 1960년 2공화국 당시의 친북통일운동 참여세력, 3공화국 시기 인혁당ㆍ통혁당ㆍ남민전 등 각종 좌익사건 참여세력, 1980년대 중반 이후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운동(주사파와 PD파) 참여세력, 오늘날의 범민련ㆍ한총련 참여세력 등도 좌익운동권이라 할 수 있다. 좌익운동권에 속했다가 1980년대 말 동구 공산국가들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사상의 허구성을 깨닫고 대한민국체제를 긍정하는 우익세력으로 변한 세력들도 많다. 이들이 오히려 좌익세력의 실체를 국민들에게 알리고 경계심을 갖도록 하는 전도사 역할을 하거나 좌익들의 반국가 활동을 막는 소방수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다.


    2. 운동권 세력의 역사
    (1) 1공화국 시기(1948.8-1960.4)
    1공화국 시기에는 6ㆍ25전쟁의 후유증과 이승만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로 운동권 세력이 활성화될 여지가 매우 적었다. 1960년 이승만 정부의 3ㆍ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운동이 일어나 4ㆍ19혁명으로 확산되었다. 4ㆍ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화를 위한 시민운동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4ㆍ19혁명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1세대라 할만하다. 4ㆍ19혁명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향했던 것은 독재를 청산하고 자유민주화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부는 빨치산 출신 등 숨죽이고 있던 좌익들이나 좌 편향성을 가진 좌경세력이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하기도 하였다.

    (2) 허정 정부와 2공화국 시기(1960.4-1961.5)
    4ㆍ19혁명 이후 대학교를 중심으로 통일운동 등 급진적 학생운동이 활발하였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 결성 등 노동운동도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장면 민주당 정권은 지주ㆍ관리 등이 다수 포함된 한민당에서 출발한 보수우익 정당이었으므로 학생들의 급진적 행동과 대중들의 변혁적 요구를 수용하기 곤란하였다. 따라서 민주당 정부는 이러한 변혁적 대중운동을 조정하지 못하고 혼란을 겪다가 5ㆍ16군사정변을 야기하고 말았다. 1960년 4ㆍ19혁명 이후 1961년 5ㆍ16군사정변까지 약 1년 1개월 동안 시위건수는 무려 2,000여건에 달했다. 

    (3) 군사정부와 3공화국 시기(1961.5-1972.12)
    박정희 정부가 1964년 3월 한일국교정상화 방침을 밝히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1964년 6월 3일 대학생들은 정권퇴진운동까지 벌이다가 경찰간 유혈충돌까지 발생하였다. 이것이 6ㆍ3사태이다. 당시 이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지금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원로들로 대우받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도 6ㆍ3사태 때 구속되었던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1970년 11월 청계천피복노조의 전태일이 열악한 근로조건에 항의,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 분신자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시골출신들이 돈을 벌기 위해 너도 나도 가방을 싸들고 서울의 각 공장으로 취직을 하였는데, 이들 공장근로자들은 ‘공돌이ㆍ공순이’로 불리며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였다. 전태일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했는데, 햇볕도 볼 수 없는 골방에서 매일 14시간 이상 일하고 일요일도 쉬지 못할 정도로 혹사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재단사들의 열악한 근로조건에 항의하여 분신자살을 감행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운동이 활성화되었는데, 1970년대만 전국에서 2,500여개에 달하는 노조가 만들어졌다.

    (4) 4공화국 시기(1972.12-1979.10)
    박정희 대통령은 제7대 대통령선거(1971.4)에서 승리한 이듬해인 1972년 12월,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대통령 3선 제한마저 없애고, 대통령 직접선거제를 간접선거제로 바꾸어 영구집권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대통령에게 헌법적 효력을 가진 긴급조치권도 부여하였다. 유신체제 수립 후 한동안 운동권세력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다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한 후인 10월 2일 서울대문리대 학생들이 유신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시위를 한 것을 계기로 하여 반유신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73년 12월 24일 함석헌ㆍ장준하ㆍ백기완 등 재야인사 30여명이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구성하고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에 정부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하여 개헌논의를 금지시켰다.

    1974년 3월 신학기 들어 대학생들의 유신반대투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던 1974년 4월 3일 오전 10시, 11시를 기해 서울대ㆍ이화여대ㆍ성균관대 등 서울 시내 각 대학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 명의의 ‘민중ㆍ민족ㆍ민주선언’(일명 삼민선언), ‘민중의 소리’ 등의 유인물이 배포되고 시위가 일어났다. 이날 저녁 10시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아 인민혁명을 기도하는 민청학련이라는 지하단체가 결성되었다며 이를 발본색원하기 위해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한다고 하였다. 이후 정부는 이철ㆍ유인태 등 유신체제 반대 투쟁을 주도하던 『민청학련』관련자 1,000여명을 체포하여 이중 32명을 국가보안법ㆍ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다.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7월 13일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중형이 선고되었는데, 이철ㆍ유인태 등 7명은 사형, 12명은 징역 20년, 6명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국정원(모태는 중앙정보부)의 과거사를 조사한 국정원진실위에서는 민청학련이 사회주의정부 구성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유신정권 타도를 목표로 한 것이고, 1974년 4월 3일 전국 동시다발적인 유신반대 시위를 위한 준비모임으로 규정하였다. 실제 이들은 모두 다음해 2월 15일 대통령특별조치에 의거,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반체제운동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민청학련 관련자 중 인혁당재건위 관련자들과 연계된 사회주의세력인 여정남(경북대총학생회장)만 1975년 4월 9일 사형당하였다.

    1975년 5월 발동한 긴급조치 9호는  유신체제ㆍ대통령에 대한 일체의 부정ㆍ비방을 금지시키고 항거하는 교수ㆍ학생ㆍ언론인ㆍ종교인ㆍ문인 등을 구속시켰다. 이러한 강권통치는 민주화의 열망을 확산시키고 운동권세력을 양산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79년 8월 11일 YH사건이 일어났다.

    YH무역(가발업체) 여공 노동자들이 회사의 불법폐업에 반발,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는데, 정부는 경찰을 동원하여 강경 진압하였다. 경찰은 신민당사를 진압할 때 김영삼 총재 이하 의원들까지도 무차별 폭행하였다. 이러한 강경 진압 과정에 여공 1명이 사망하였다. 김영삼 총재는 정부에 강경하게 항의하고 정권타도 투쟁을 선언하였다. 이에 정부는 김영삼의 총재직 정지에 이어 의원직마저 박탈하였다(1979.10.4). 이때 김영삼은 정부의 타협 제의를 거절하면서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을 남겼다.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사건을 계기로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ㆍ마산에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이 부마사태이다. 이에 대한 대책문제를 둘러싸고 경호실장 차지철과 갈등을 빚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차지철은 물론 박정희 대통령마저 시해하는 10ㆍ26사태를 일으켰다.

    (5) 최규하 과도정부 시기(1979.10-1980.8)
    10ㆍ26사태로 계엄이 내려진 가운데,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은 10ㆍ26사태에 정승화 육참총장이 연루된 것으로 나타나자, 1979년 12월 12일 정승화 육참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총격전 끝에 연행하는 12ㆍ12군부쿠데타(12ㆍ12사태)를 일으켜 군권을 장악하였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들이 서서히 정권을 장악해 가려하자, 전국적으로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특히 서울에서는 1980년 5월 15일 서울역광장에서 10만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대해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김대중ㆍ김종필 구속, 김영삼 가택연금, 언론통제, 대학 휴교령, 직선제 헌법개정 중단 등의 조치도 취하였다. 이것은 대학생들의 더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1980년 5월 18일 전남대 일부 학생들이 학교 앞에서 전두환 퇴진, 계엄해제, 김대중 석방 등을 주장하며 계엄군과 대결하였다. 이를 막는 계엄군은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신념을 가진 검은베레모의 사나이 공수부대였다. 물러날  줄 모르고 오직 승리만을 생각하는 공수부대와 투쟁성이 강한 대학생들의 격돌은 과격한 양상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이 가세하고, 일부 유언비어들이 유포되면서, 시위는 광주 전역으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결국 계엄군은 시위대의 위험성을 과대 평가하여 강경 총격진압 작전에 돌입하였고, 시위대들도 경찰무기고를 탈취하여 무장항쟁을 하였다. 이러한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은 200여명 미만의 사망자와 1,000여명의 부상자를 낳고 5월 27일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인명 피해보다 더 심한 광주 지역민의 가슴에 상처를 남겨 이후 호남지역에서 전두환 군사정부를 비판하는 저항적 성향이 보편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대학생들도 전두환 정부에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반정부 투쟁을 일으키는 뒷 배경이 되었다.

    정부는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앞두고 각국들에게 인권탄압 이미지를 주지 않기 위해 1984년 후반 대학교내 학생들에 대한 사찰을 중단하는 등 자유화조치를 취하였다. 이후 대학교 구내는 해방구가 되어 이른바 이념서클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주사파 등 종북좌익세력을 확대ㆍ재생산하였으며, 과격한 반체제ㆍ반정부 투쟁을 폭발적으로 일으키는 메카 역할을 하였다.

    (6) 전두환 정부 시기(1980.9.1-1988.2.25)
    전두환 정부 시기는 학생들의 반정부 투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등 학생 운동권세력이 크게 확산되는 시기였으며, 학교 교문을 폐쇄하는 휴교령도 자주 발동되었다. 특히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를 경찰이 은폐하다가 사실이 폭로되어 격렬한 비판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1987년 6월항쟁의 촉발제 역할을 하였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문제에 대한 여당과 야당의 협상이 진전되지 않자, 개헌논의를 중단하고 현행 헌법(대통령간선제)을 유지하겠다는 호헌(護憲) 선언을 하였다. 이를 ‘4ㆍ13호헌조치’라고 한다.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하고 싶다는 ‘대통령직선제’ 여망이 물거품 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반정부 학생시위가 빈발하는 가운데, 1987년 6월 9일 연세대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혼수상태에 빠지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사실은 이틑날인 6월 10일 신문들에 대서특필되었고, 이것이 국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켜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6ㆍ10항쟁이다. 이후 정부가 6ㆍ29선언 발표로 항복 할 때까지 20일간 전국적으로 학생ㆍ시민들이 동참하는 초대형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을 통칭 ‘6월 항쟁’이라고 한다. 정부는 시위의 심각성을 깨닫고 대통령직선제 헌법개정을 수용하겠다는 헌법개정 선언을 하였다. 이것이 1987년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후보가 국민들에게 밝힌 6ㆍ29선언이다.

    (7) 노태우 정부 시기(1988.2-1993.2)
    6ㆍ29선언 이후 여ㆍ야 합의로 개정된 헌법에 따라 제13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는데, 야권 분열(김영삼ㆍ김대중)로 인해 여당(민정당) 후보로 나선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태우는 전두환 대통령의 육사동기이자 신군부 핵심세력으로서 전두환 대통령의 낙점을 받아 여당 후보가 된 것이었다. 이 시기 민주화운동을 전개한 운동권세력들은 군사정권을 굴복시켰다는 승리감이 컸으나, 양김(김영삼ㆍ김대중)의 분열로 노태우가 당선되자 많이 실망하였다. 당시 운동권세력들은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당선되었음에도 노태우 정부를 군사정권으로 취급하여 민주적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좌익운동권의 활동이 매우 활성화되었다. 전대협 등 좌익운동권이 주도하는 대학생들의 폭력 시위가 빈번히 일어났다. 좌익운동권은 노동계에도 영향을 미쳐 노동조합 결성도 급증하고 과격한 노동운동이 분출하였다. 노태우 정부는 좌익운동권의 반정부 투쟁에 대해 무력한 모습을 보여 노태우 대통령이 ‘물태우’라는 비아냥거림을 받기도 하였다.

    좌익운동권이 세력을 넓혀가고 활동력이 고조되는 가운데, 1990년 전후 중대한 국제적 변화들이 일어났다. 폴란드ㆍ동독ㆍ체코 등 동구 공산권 국가들은 물론 사회주의체제의 종주국인 소련마저 몰락한 것이다. 그야말로 공산국가의 연쇄도산이었다. 좌익 운동권들은 몰락할 것으로 믿었던 자본주의체제는 건재한데 예상하지도 못했던 공산주의체제가 붕괴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운동권 내부에 사상적 혼란을 가져왔다. 이에 따라 좌익운동권에서 탈퇴하여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대한민국을 수용하는 우익세력으로 전환하기도 하였다. 일부는 여전히 좌익 성향을 가졌으나 활동을 중단한 채 새로운 직업으로 전환하기도 하였다. 일부는 충격 속에 새로운 명분을 찾아 좌익운동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여소야대로 힘들어하던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통일민주당), 김종필(신민주공화당)과 정치적 결단을 내려 여당인 민정당(민주정의당)과 3당 합당하여 민자당(민주자유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김영삼은 우여곡절을 거쳐 민자당 대통령 후보에 당선되었다. 김영삼 민자당 후보는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이 들어맞는 격이었다.

    (8) 김영삼 정부 시기(1993.2-1998.2)
    김영삼은 박정희ㆍ전두환 정부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며 민주화운동을 이끈 정통 야당세력이었다. 이로써 김영삼 집권기는 기존의 산업화세력과 새로 들어온 자유민주화세력이 융화되어 신 우익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자유민주화세력이 권력핵심부를 장악하게 된 것이다. 그에 따라 지금까지 운동권의 존재 근거였던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구도가 사라졌다. 군사정권의 종식으로 반민주 정권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된 탓이다. 이에 따라 민주화운동에 편승해왔던 주사파 등 좌익운동권은 투쟁명분이 약화되었고, 세력 약화를 절감하게 되었다. 이들은 그간 치중했던 비합법 노선이 대중적 지지를 잃어감에 따라 합법ㆍ개량주의 형태로 변경하여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려 하였다. 즉 좌익운동권은 민중혁명ㆍ계급운동 등의 핵심을 감추고 정치적 시민운동으로 포장하여 대중들을 끌어들이려 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전대협 등에서 배출한 젊은 좌익ㆍ좌경운동가들이 시민단체ㆍ노동계ㆍ교육계ㆍ학계ㆍ언론계ㆍ법조계ㆍ정계 등 각 분야로 본격적으로 퍼져나갔다.

    (9) 김대중 정부 시기(1998.2-2003.2)
    김영삼 정부가 물러나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다. 김대중 후보는 호남의 절대적 지지를 등에 업고, IMF외환위기를 초래한 여당(한나라당)에 대한 심판론 등이 작용하여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처음으로 호남을 근거로 한 정당이 권력을 잡은 것이다. 이 때 각계에 호남 출신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지역간 역차별이라는 불만도 나왔으나, DJ를 심정적으로 동일시하던 호남 출신들의 소외 감정이 많이 해소되었다. 이때 상당수 운동권 출신들이 정계ㆍ관계 등으로 많이 진출하였는데, 대부분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한 우익운동권이라 할 수 있으나, 그 중 일부는 사회주의를 지향한 좌익운동권으로 분류되는 인사들도 있었다. 이러한 운동권 출신들의 국정 참여는 사상적 갈등을 더욱 유발한 면도 있으나 이들이 정계ㆍ관계에 들어와 국정에 직ㆍ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 대한민국세력이 되어 갔다. 그러나 일부는 대한민국을 부정하던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좌편향성을 보였다는 비판도 있었다.

    (10) 노무현 정부 시기(2003.2-2008.2)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물리치고 극적으로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코드인사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진보정권’임을 자처하는 등 사상적 노선을 분명히 하면서 국정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도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대한민국을 긍정하고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국정을 운영하였다. 다만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386세대 운동권 출신들이 상당수 청와대ㆍ정부 요직에 들어와 국정운영에 참여하였다. 이중에는 주사파 출신 등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좌익운동권 전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는 우익세력들로부터 ‘좌파정부’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좌익운동권으로 평가받았던 일부 노무현 정부 참여세력들도 좌경 성향을 보였다고 할 수는 있으나 그들이 대한민국을 부정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정권에 참여하여 국정경험을 해 보면서 점차 대한민국의 존재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태도가 변화한 것으로 관측된다. 국가경영에 참여해 본다는 것은 세상을 달리 보이게 하는 큰 교육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 중 나머지 일부는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한 것으로 의심받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