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열이 나고 온몸이 쑤시고 아팠습니다.
    감기 한번 안 걸리고 살지만
    1년에 한두 번씩은 이렇게 아픕니다.
    마침 추석을 앞둔 일요일이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일은 해야 하지만 아무래도 평일보다는 부담이 적었습니다.
    조금 농땡이를 부리려고 영화를 고르다가
    오랜만에 ‘철도원’이라는 일본 영화가 눈에 띄었습니다.
    일본에서 1999년 만들어져 한국에는 2000년 개봉된 이 영화를
    소설로 먼저 읽었습니다.
    원제가 ‘철도원(鐵道員-ぽっぽや)인 원작소설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아사다 지로(淺田次郞)의 대표작입니다.
    2006년 이 소설을 읽고 참 많이 울었습니다.

    소설이나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줄거리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 오토마츠는 홋카이도의 눈 많은 마을 호로마이 역 역장입니다.
    한때 탄광촌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들끓었던 호로마이는 이제 폐광으로 아침저녁, 학생들의 등하교 전용의 단행 기차가 왕복할 뿐입니다.
    노선 폐지를 앞둔 이 역의 역장 오토마츠 역시 정년퇴임이 코앞에 닥쳤습니다.
    평생을 철도원으로 살아온 오토마츠는 43세에 얻은 딸 유키코를 두 달 만에 급작스런 열병으로 저 세상에 보냅니다.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던 아내는 눈처럼 차갑게 식은 딸의 시신을 안고 돌아오고, 오토마츠는 딸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한 채 역을 지키고 있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을 때 역시 마찬가지.
    아내 시즈에가 병을 얻어 큰 병원에 입원하는 날도 오토는 역에 남아 아내를 홀로 보냅니다.
    눈물을 안으로 삼키고 자신의 일을 말없이 해내는 그에게,
    정년을 맞는 새해 아침 죽은 딸이 각기 다른 나이의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딸은 평생 철도원으로 살아온 아버지를 위로합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말합니다.
    "아빠는 네가 죽었을 때도 플랫폼에서 눈을 치우고 있었어. 이 책상에서 일지도 썼지. '금일 이상무'라고."
    딸은 아버지 어깨를 감싸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는 철도원인걸요. 어쩔 수 없잖아요.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리고 새해 아침, 오토마츠는 늘 그랬던 것처럼 깃발을 든 채 제설차를 맞이하려는 모습으로 플랫폼에서 숨진 채 발견됩니다.

    번역본을 읽고 마침 유미짱이 방학이라 한국에 온다기에
    일본어 원본을 구해달라고 부탁해서 읽기도 한 소설입니다.

    오랜만에 영화로 다시 보며
    이 소설이 패전 이후 일본을 일으켰던 부흥시대에 바치는
    꽃다발 한 송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왜 일본의 부흥시대에 헌신한 여러 직종 중에서
    하필이면 철도원을 택했을까?
    저자인 아사다 지로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철도원’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서구화를 위한 작업으로 철도부터 놓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거미줄처럼 연결합니다.
    일본이 자랑하는 신칸센(新幹線)은 세계 최초의 고속열차입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지금도 일본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일본의 철도들은
    일본의 근대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1951년생인 아사다 지로는 아마 일본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철도와 그 철도를 지킨 철도원을 통해,
    일본의 부흥을 일궜던 ‘말없이 희생했던’ 세대에
    작은 위로의 말을 던지고 싶었을 겁니다.

    호우로 물난리가 난 추석연휴 첫 날
    서울에선 물바다를 헤치고 귀성하는 차량들이 줄을 잇습니다.
    저마다 달려가는 고향,
    그곳에 반갑게 맞아줄 부모님이 계시다면
    그분들이 바로 ‘철도원’의 오토마츠처럼
    오늘 풍요롭다는 이 세월을 만들어주신 분들입니다.

    힘들고 아파도 참고 견뎠던 분들,
    묵묵히 제 자리에서 희생이 미덕인 줄 알고 살아온 분들,
    그리고 평생 목소리 한번 크게 내지 않았던 분들...

    그 분들을 대신해 ‘철도원’의 오토마츠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저씨는 행복한 사람이다. 좋아하는 일만 해 와서.
    결국 딸과 아내는 죽게 했는데 그랬는데도 모두들 잘해주는구나.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