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리조나 사막의 선한 사마리아인 

    미국 시애틀에서 1년간 연수하면서 겪은 일이다.
    그랜드 캐니언을 비롯하여 미국 애리조나 일대의 협곡지대를 나흘째 여행하고 있었다. 애리조나 주 북단에 있는 도시 페이지(Page)에서 세도나(Sedona)를 향해 출발한지 반시간쯤 지났을까. 내가 운전하던 차가 그만 모래밭에 빠지고 말았다. 겁이 덜컥 났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나를 구출하러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동차보험도 들었지만, 여행 중 긴급현장 서비스로 유명한 트리플에이(AAA) 사(社) 회원으로도 가입해 놓았기 때문이다. 나 나름대로는 보험(保險), 즉 위험대비 안전장치를 이중으로 확보하고 있었다. 특히 트리플에이는 평소 나의 든든한 ‘기댈 언덕’이었다.  

    우선 트리플에이에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 연결 상태가 좋지 않아 전화가 몇 번이나 끊어지는 바람에 전화를 걸고 또 걸고 했는데 결국은 올 수 없다고 했다. 이유는 내 위치가 부정확하다는 것이었다. 넓디넓은 사막지역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몹시 야속했고, 왠지 남의 나라 와서 차별받는다는 느낌도 들었다. 트리플에이의 ‘거절’은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이번에는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역시 못 온다고 했다. 내 차가 아니고 빌린 차(rental car)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들 재현이는 한국의 119긴급구조가 생각났던지 911 긴급 전화를 걸었지만, 가까운 카센터에 전화해 보라는 답만 들었다.  

    내가 가장 믿었던 트리플에이도, 보험회사도, 911도 못 오겠다니 어떡하나. 이제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길가로 나가서 지나가는 자동차를 향해 손을 흔들며 구조요청을 하는 것이었다. 마치 자동차 편승 여행자(hitchhiker)가 하는 것처럼 처량한 낯빛으로 타인의 동정심을 유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의 안전에 비하면 그 정도 창피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로 그 때였다. 지금도 그 이름을 모르는 인디언 여성이 나타난 것은.
    사고지점에서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그의 집이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주소와 전화사용 가부(可否)를 물었을 뿐, 그가 무슨 도움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트럭을 몰고 와서 내리더니 삽을 들고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앞바퀴 두 개가 모래밭에 깊숙이 박히고 차 밑바닥이 흙에 닿은 상황에서는 그의 출현이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기적’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그가 근처 마을에 가서 인디언 친구 두 명을 데려온 것이다. 그 친구 두 명은 부부처럼 보였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아저씨와 조카 사이였다. 그들도 자기네 트럭을 몰고 왔다. 그 남자는 차 밑바닥에 닿은 흙을 삽으로 파낸 뒤 차 트렁크에서 잭(jack)과 휠렌치(wheel nut wrench)를 꺼내 한 쪽 바퀴를 들어 올리고 그 밑에 돌을 받쳤다. 절망의 계곡에 한 줄기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차에 올라탄 다음 이번에 제발 빠져 나오게 해달라고 맘속으로 기도하면서 시동을 걸고 후진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그러자 그 남자는 4륜구동 트럭과 연결 밧줄이 필요하다며, 자신의 조카와 함께 트럭을 몰고 어디론가로 가더니 다른 트럭을 몰고 왔다. 그 전에 있었던 트럭들은 2륜구동이어서 견인력이 없었던 것이다. 내 차와 4륜구동 트럭을 밧줄로 연결한 다음, 나는 내 차를 타고, 그 남자는 그 트럭을 타고 후진 탈출을 시도했다. 말[馬]은 차를 끌어내도, 차는 차를 끌어내지 못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서, 반신반의하며 후진 기어를 넣고 가속페달을 밟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모래구덩이를 탈출하였다. 할렐루야!  

    나를 구출해준 세 명의 인디언, 그들은 애리조나 사막의 선한 사마리아인들(Good Samaritans)이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란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 중 하나로, 사심 없이 남을 도와주는 동정심 많은 사람을 가리킨다. 어느 유대인이 길을 가다 강도를 당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같은 민족의 제사장이나 제사장 도우미격인 레위인은 외면하고 지나갔지만,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 그를 구해주고 보살펴 주었다(신약성경 누가복음 10장). 그와 마찬가지로, 21세기 최고 선진국의 긴급구조 부서도, 가장 현대적인 서비스회사도 외면한 나를, 미국의 소수민족 중에서도 소수민족인 인디언들이 도와주었다. 그들은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지만 그들이 가진 모든 것으로 나를 구출했다. 그야말로 자원하여 찾아왔고, 시간을 냈고, 수고의 땀방울을 흘렸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구약성경 잠언 27장 10절)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인디언 중에서도 나바호(Navajo) 족이었다. 영화 <윈드토커>(Windtalkers)를 보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암호교란작전에 맞서 미군이 인디언 암호병을 투입하는데 그 인디언이 바로 나바호 족이다. 애리조나를 비롯하여 미국 남서부지역에 주로 사는데 그 숫자가 근 삼십만 명에 달하며, 북미 지역 인디언 종족 중에서 가장 큰 종족이라고 한다. 자기들만의 언어 (Diné)를 여전히 사용하면서도 다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나를 도와줄 때도 자기들끼리는 자기네 말로 대화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여행 후 시애틀에 돌아와서 들어보니, 나바호 족은 원래 친절하다고 했다. 4륜구동 트럭을 몰고 왔던 두 사람에게는 그 이름과 연락처도 물어서 적어왔는데 이름이 아이번 비게이(Ivan Begay)와 마라 비게이(Mara Begay)였다. 사막지역의 벌판에 살기 때문에 우편물은 시내 우체국의 사서함으로 받고 있었다. 나는 고마움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아내 대학의 기념품 세 개를 선물로 보냈지만, 그 은혜는 어떤 선물로도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불행 중 다행이었다. 사고가 난 게 봄철 한낮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겨울철 밤중이었다면 어땠을까. 휴대폰이 터지지 않았거나, 인디언이 근처에 살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먼 훗날에는 이런 경험도 낭만일 수 있겠지만 현실에서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끔찍한 낭만’이라고나 할까.  

    3년 전 미국 오리건 주 눈길에서 30대 한인 남성이 조난당해 숨졌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으면서, 여행은 즐거움과 함께 위험도 동반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여행에 따르는 위험을 두려워하여 여행을 마다해서는 안 된다. 여행은 위험(risk)을 상쇄할 만큼의 이익(benefit)을 가져다준다. 미국 시애틀타임스의 한 중견기자는 칼럼에서, 자신의 가족이 여행 중 겪은 위기를 소개한 뒤, 겨울철에도 차의 기름 탱크를 가득 채우고 트렁크에 먹을 것과 덮을 것을 넉넉히 준비해서 과감하게 자동차여행(road trip)을 떠나라고 권했다. 하늘 아래 ‘안전한 항구’(safe haven)는 어디에도 없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에 굴복해서도 안 되는 것이 인생이다. 

    내 차가 사막의 모래밭에 빠진 과정은 극히 단순했다. 지피에스 네비게이션(GPS Navigation), 즉 인공위성을 이용한 차량항법장치가 화근이었다. 지도를 보지 않고 그 녀석(?)에게 의존하여 운전했더니 제 딴에는 지름길이라며 비포장도로를 안내한 것이다. 그 녀석이 일러준 길에는 도로번호도 없었다. 트리플에이(AAA) 여행사가 제공한 지도를 보면 주간(州間: Interstate) 도로에서부터 인디언도로에 이르기까지 여섯 가지 수준의 도로가 나오는데 사고가 난 도로는 족보에도 없는 ‘도로 외 도로’였다.

    최첨단 문명의 이기(利器)가 도리어 사람을 골탕 먹일 줄이야. 사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여행 중에 지피에스 네비게이션 때문에 골탕 먹었다는 후일담을 그 후에도 여러 번 들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여행을 할 때면 언제나 먼저 지도를 살펴보고, 야후 같은 포털사이트에서 여정(旅程, itinerary)을 인쇄하고, 그 다음에는 도로 이정표를 잘 보면서, 지피에스 네비게이션을 참고해서 운전한다. 

    여행 중의 사고는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성장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기계 탓만 하고 있을 수도 없다. 잘못은 기계를 맹신한 나, 그리고 여행 준비를 철저히 하지 못한 나에게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장(家長)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하였다. 그날 사고는 아마추어 여행객의 만용이 부른 ‘인재’(人災)였던 것이다. 그 덕분에 인디언 친구 세 명을 얻긴 했지만 그날 사고는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악몽으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심양섭 / 객원논설위원, 숙명여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