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노조? 군대도 노조? 대한민국 간판 내리나?
  • [조선일보 류근일 칼럼]

    '다른 나라 ' 대한민국

      국민이 잘 모르는 가운데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로 변모하고 있다.
    모두가 알아보는 가운데 진행되는 변모도 물론 있다.
    외교·안보 기조의 변화가 그렇다.
    진보 정부는 애초엔 사드 배치에 반대한 세력이다.
    "한·미 동맹이 깨져도 전쟁만은 안 된다"고 한 '학자 특보'의 발언도 있었다.
    불바다 공갈을 누가 치는데 그런 소리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에선 1박만 하고 간다.
    이를 두고 '코리아 패싱(한국 제치기)'의 시작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국내적으로도 새 원전(原電) 사업 백지화, 노동시장 개혁 없는 최저임금 인상 등
    전례 없는 뒤집기가 진행되고 있다.
    이 뒤집기는 '밑으 로부터 변혁'과 '위로부터 변혁'을 다 거치고 있다.
    아스팔트 함성은 '밑으로부터 변혁'이었다.
    이에 떠받혀 문재인 정부가 출현했다.
    문(文) 정부 출범 후론 '위로부터 변혁'이 내리꽂히고 있다.
    변화를 하려니 스태프들을 갈아치워야 했다.
    문 정부는 '늘공(늘 공무원)'을 제치고 운동권 성향의 '어공(어쩌다 공무원)'들에게
    칼자루를 쥐여 줬다.

  •   이들 운동권 권력은 부처별로 위원회라는 걸 두었다.
    거의 자칭 '진보' 인물들로 채운 위원회다.
    과거의 들러리 위원회와는 달리 진보시대 위원회들은 세상을 갈아엎는 실세다.

    비판자들은 그래서 "마치 혁명위원회 같다" "국회보다 더 세다" "헌법상 근거가 없다"고 나무란다. 실제로, 행안부 산하 경찰개혁위원회는 "여건이 성숙되는 대로 경찰 노조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라"고까지 주문했다. 그 전 단계로 경찰관직장협의회가 생긴다.

    경찰에 노조가 생길 여건이 성숙한다?
    그렇게 되면 그건 갈 데까지 간 막장이다.
    주 40시간 근무에 시달리는 경찰관들이 노조를 만드는 게 뭐가 나쁘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학생운동도 4월 중순까지는 등록금 인상 반대 등 달콤한 이슈만 내걸다가
    5월부터는 급속히 체제 타도 투쟁으로 튀지 않던가?
    젊은 경찰 노조원들이 머리에 띠 두르고 "사드 배치 결사반대"를 외치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전율할 일 아닌가?
    이러다간 병영에도 노조 만들자 소리가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한국 사회엔 이미 많은 변혁의 진지(陣地)가 구축돼 있다.
    대학, 교사 사회, 대기업 노조, 공공 노조, 재야 법조계, 미디어 노조, 공무원 노조에 이어
    재조(在朝) 법조계에도 그런 물결이 스며들더니 마침내 경찰까지 그렇게 될 모양이다.

    진보나 노조가 복리, 권익, 근무 조건 개선, 봉급 인상 같은 것을 두고 합법 활동을 벌인다면
    그거야 자유민주주의 법질서가 백 번 보장해 준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노동 운동은 너무 지나치게 이념적으로 굳어졌고,
    불법 투쟁, 체제 투쟁으로 넘어갔다.
    이런 추세가 경찰 등 공권력에까지 미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 온 대한민국은 간판 내리게 된다.
    그 대신 올 것은 직접민주주의?
    연방제 분권?
    주권(主權)은 아스팔트에 있다?
    민중민주주의?
    코뮌(commune)주의?

      지금으로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유지하자"와
    "자유주의를 뗀 민주주의로 가자"가 막상막하로 부딪히고 있다.

    이 판에선 권력 중심(정부)이 두 개다.
    이중 권력(dual power) 상태인 셈이다.
    기존 국가인 '늘공'은 있지만, 새로 치고 들어온 '어공'이 대안(代案) 국가 노릇을 하는 식이다. 19세기 무정부주의 사상가 프루동은 이 이중성을 이렇게 설파했다.
    "제도정치의 그림자 아래, 정치가들과 성직자들의 시야(視野) 밖에,
    사회는 천천히 조용히 대안 질서를 만든다."

     1871년의 파리 코뮌, 1936년의 스페인 내란, 1990년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 때
    그런 이중 권력 상태가 있었다.
    두 권력 중심의 관계에선 무리한 것, 지나친 것, 억지인 것, 섣부른 것,
    인간 본성에 반(反)하는 것, 도그마(독단)가
    당장엔 성(盛)했어도 막판엔 쇠(衰)했다.
    한국 현대사에선 어느 게 순리이고 어느 게 무리일까?
    근대성·자유·민주·공화·개인·세계시장이 순리이고
    그 반대의 '탈레반 근본주의'가 무리이자 수구이다.

     문제는 대중이 이에 둔감한 채 당장의 공짜 포퓰리즘에만 솔깃해 있는 현실이다.

    변혁의 민낯은 복면가왕(覆面歌王)인 채 '지당하신 말씀'만 메아리친다.
    개혁, 적폐 청산, 나라다운 나라…. 그러나
    그 뒤의 '숨은 코드'를 해독해야 한다.
    오르그(조직꾼)·아지프로(선동꾼)·군중이 맞물려 돌아가는 판에선 그래서,
    그들의 수(數)를 웃돌 시민적 항체가 눈 떠야 한다.
    원전을 지키려 한 이성(理性)의 면역력 같은 것 말이다.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 2017/10/26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kl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