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비곡직은 안 가리는 채 중계(中繼)만 하는 게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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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은 흔히 “북핵 위기 앞에서 정당들이 웬 정쟁이냐?”며,
    자기들은 마치 속세를 초월해 있는 신선(神仙)인 양 말하곤 한다.

    그러나 한국정치의 분열과 대치엔 그 만한 역사적 뿌리와 사연이 있다.
    북 핵을 앞에 둔 작금의 진영 싸움에도 멀고 긴 원인이 있다.
    이건 결코 그 분열과 대치가 좋은 것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건 언론이 지적하듯, 참으로 안 된 일이다.
    그러나 이 ‘지당하신 말씀’을 그렇게 쉽게 해선 안 된다.
    싸움이 좋아서만 싸우는 건 아니기 때문아다.
    언론도 그 싸움의 한 중요한 당사자 아니었나?

     우리 정치사의 타협 불가능한 분열은 8. 15 해방공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을 세울 것인가 말 것인가의 싸움이 그것이었다.
  •  대한민국을 세운 다음에도 이승만 편이냐 반(反)이승만 편이냐,
    박정희 편이냐 반(反)박정희 편이냐의 분열이 있었다.
    이 싸움은 같은 대한민국 편끼리 겨룬 싸움이라
    대한민국이냐 반(反)대한민국이냐의 싸움보다는 ‘원수 됨’ 정도가 한결 덜했다.
    그러나 그 싸움도 워낙 심하게 하다 보니 나중엔 ‘원수처럼 돼버렸다.

     1960-70-80-90-2000년대로 오면서 대한민국 안에는 또
    “대한민국은 태어나선 안 될 나라”였다고 외치는 세력이 생겨났다.
    그래서 우리 정당 정치는 더더욱 미국의 공화당-민주당 같은 분위기와는 달리,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식의 ‘원수들끼리의 내전상황’처럼 돼버렸다.

     지금 우리 청치무대에는 경쟁자 아닌, 적(敵)과 적 사이에서나 쓰일 법한
    대사(臺詞)들이 예사로 튀어나오고 있다.
    상대방은 ‘부역자’이니 이를 ‘궤멸’ 시켜야 한다는 식의 말들이 그렇다.
    그 반대 쪽 역시 오래 전부터 험한 용어들을 안 써왔다고 할 수 없다.
    누가 더 먼저냐는 입증할 수 없다. 8. 15 해방공간 때부터 피차 다 그랬다.

     언론들도 이 싸움의 어느 한 쪽 당사자가 돼 피투성이 싸움을
    최전방에서 고취하고 수행하고 격화키고 선동해 왔다.
    그래 놓고 이제 와 “에헴, 너희들 왜 그렇게 북 핵 앞에서조차 싸움들이냐”고?
    최근의 탄핵 정국에서도 언론들은 총검술 전투를 했던가, 가부좌 틀고 앉아 참선을 했던가?
    마치 긴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말하네...

     놀리려는 게 아니다.
    그 만큼 우리 정치사의 분열과 대치는 통합적 국가정체성이 확립되기 전까지의
    ‘있을 수밖에 없는’ 과정인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얼씨구 좋다”는 뜻이 아니라, 참으로 피곤한 숙명이라는 탄식인 것이다.
    한 단계가 확립되려면 그 이전엔 싸움이 있다는 숙명-이걸 우리는
    아직도 거치는 과정에 있다는 뜻일 게다.

     싸움이 없으면 “왜 싸우느냐?”고 탓하는 언론을 위해 얼마나 좋을까만,
    싸울 수밖에 없는 싸움이 있을 경우엔 사람들은 수 천 년 역사시대를 통해
     언제나 목숨 걸고 싸워 이기고 지고 살고 죽고 했다.
    특히 언론인들이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까지 했다.
    지금 방송매체를 둘러싸고도 엄청난 싸움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웬 싸움이냐?”라니, 싸울 일 있어서 싸운다, 왜?
    발을 싹 빼고 안전지대에 동떨어져 있으려고 그러는지는 모르나,
    시비곡직은 안 가리는 채 중계(中繼)만 하는 게 언론 기능은 아닐 것이다. 
     
    류근일 / 전 조선일보 주필 /2017/9/24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