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통령의 말을 듣고...조지 오웰의 '1984년'을 생각하며...
  •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8월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국민 보고대회 ‘대한민국, 대한국민’에서 “우리 정치가 이렇게 낙후됐다, 국민은 직접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조선닷컴.

     문재인 대통령은 물론 간접민주주의와 대의제 민주주의를 부정하기 위해 이런 말을 꺼낸 건
    아니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보완하기 위해 ‘촛불시위’에서처럼 국민이 그 뜻을 정치권에 직접
    입력시켜야 한다는 취지였다. 졸은 말이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건 참여 행위가 너무 부족하지도 않고 너무 지나치지도 않을 적정(適正)선, 최적(最適)선을 추구해야 하리란 당위다.
     
     참여가 너무 부족하면 민주주의가 엘리트들만의 과두지배로 것 돌 우려가 생긴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재벌, 관료, 국회-정당의 계파보스들, 대형 포탈과 메이저 미디어들이 국가경영을 다 말아먹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국민 참여가 너무 (그릇되게) 지나치면 ‘국민’을 내세운 군중이 대의제, 관료제, 지식인을 제치고 폭민(暴民)정치를 자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도 덜도 말고 참여의 적정선을 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 추세는 어떤가?
  •  요즘은 전(全) 세계적으로 대의제 민주주의-엘리트 민주주의-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도전을
    받는 국면이다.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난민문제-이민자 문제가 인종갈등-문명갈등을 일으키자 포퓰리즘(민중주의)과 민족주의, 국수주의가 기승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자유주의가 내세웠던 개인주의-똘레랑스(tolerance, 관용)-법치주의-엘리트 리더십-글로벌리즘이 후퇴하고, 표퓰리즘이 내세운 집단주의-군중직접행동-아스팔트 정치-배외(排外, xenophobia)주의-반(反)세계화-민중주권론이 전면에 떠올랐다. 이런 추세는 오른 쪽에서도 일어났고 왼 쪽에서도 일어났다. 영국의 브렉시트(EU 탈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현상이 우익 포퓰리즘이라면, 그리스와 베네주엘라 사례는 좌익 포퓰리즘이라 할 수 있다.

     나라마다 사정은 다르나, 좌-우를 막론하고 표퓰리즘과 국수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체인 자유민주주의 대신, 그 둘을 분리시킨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 국가가 ’자유주의 있는 민주주의 국가‘보다 더 많다.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양극화와 문명충돌을 해결할 수 있을까?
    그리스와 베네주엘라를 보면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브렉시트와 트럼프 포퓰리즘의 귀추가 어떻게 될지는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별 수는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문재인 정부가 내놓은 일련의 시책들은 '중도 좌파적' 포퓰리즘에 가깝다. 원전(原電) 폐기론, 비정규직 철폐론, 공공부문 확대론, 증세(增稅)에 의한 복지론, 부동산 시장 규제... 등은 다 ‘진보적‘ 포퓰리즘이다. 그러나 경제부문은 이런 실험 저런 실험을 다 해 볼 수 있는 문제이고, 그 결과는 민심의 향방에 따라 성공-실패로 판정받을 것이다. 그래서 그건 시간문제다. 문제는 정치부문의 포퓰리즘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직접민주주의 필요성’은 곧 정치부문에서 있을 수 있는 ‘진보’ 포퓰리즘이다. 그리고 이것이 자칫 지나치게 추구될 경우엔 ‘1948년 당시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길이 이어질지가 의문에 직면할 수 있다. 지나침이 적절히 제어될 것이라고 기대는 한다. 그러나 뉘 알랴. 그것이 도를 넘을 경우 한국 자유민주주의는 쇠퇴의 길로 전락할 수 있다.

     ‘진보’ 운동지휘부가 추동하고 견인하는 군중적 직접민주주의는 자유주의-세계시장을 배척하고 그 대신 자주, 민족, 민중, 해방을 내세울 확률이 높다. 그 끝은 잘못 될 경우 집단주의, 반(反)세계시장, 반(反)서구문명, 반(反)개인, 완장부대의 위압적 정치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딱히 그런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했다는 뜻이 아니다. 일반론적으로, 비(非)자유주의적 직접민주주의가 흔히 빠지곤 하는 위험을 상기한 것뿐이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물론 만능이 아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보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만이, 그리고 대의제 민주주의만이 공포로부터의 자유,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한다.
    오늘의 세대는 전체주의 독재에서 살아본 적 있나? 없으면 탈북동포들에게 물어보라.
    공포가 무엇이고 폭력이 무엇인지를. 오늘의 세대는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번제, 燔祭, 유태인 학살)를 아는가? 영화에서 보아 알기는 할 것이다. 그런 공포가 나치즘과 스탈린주의 치하에 있었고 지금의 북한에 있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아닌, 대의제 민주주의 아닌, 법치 민주주의 아닌 민주주의-즉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가 오늘의 인민민주주의 북한에 있고,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지옥 세상인지를 오늘의 세대는 먼저 충분히 알고서 직접 민주주의를 논해도 논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참여 민주주의를 하더라도 그 적정선을 넘지 않을 수 있다. 이 학습이 오도된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면역력이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그래서 결국 두 가지다. 기존 대의제 민주주의의 폭을 넓히기 위한 효과적인 참여의 정치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그러면서도 어떻게 무질서, 폭민정치, 대중독재, 집단에 의한 공포, 반(反)지성적 분위기, 디지털 시대의 그릇된 정보에 기초한 선동정치, 대중조작(操作)의 음모정치, 홍위병 세태를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후자의 요청을 누가 담보할 것인가?
     
     왠지 비관적인 생각이 든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은 지나간 시대의 픽션인가, 항상적인 개연성인가? 오늘의 지식인들이 스스로 자문자답해 보고, 세상을 향해 답해줘야 할 질문이다.

    류근일 / 전 조선일보 주필 /2017/8/28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