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와 정쟁과 인준 청문회를 지켜보자면
    '구부러진 거울'이란 말을 떠올리게 된다.
    소련 시절 작가 비탈리 구베레프가 '구부러진 거울'이란 소설을 썼고,
    이 소설이 1960년대엔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2007년엔 다시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구부러진 거울이란 "장미가 구부러졌으면 거울 탓 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약점, 단점, 창피스런 과거사, 실수, 잘못을 가진 채 산다.
    그렇지 않은 100 % 품행방정 사례가 물론 없을 리야 없겠지만
    대다수는 그저 비슷비슷한 수준의 '탓'을 가지고 산다.
    이걸 다 들추고 따지기로 한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자가 더 많을지 더 적을지는
    정히 알 수 없다. 이 점에서 한국의 장관, 국무총리 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힘든 일이다.

  •  중요한 건 역지사지(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해야 하리란 점이다.
    상대방이 약점을 들킬 때 "사실은 내게도 저런 약점이 있지..."라고 하는
    양심의 찔림을 느껴야 하리란 점이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내로남달(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은
    적잖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민정(民政) 파트의 사전 체크와 인준 청문회와의 엄격성을 시비하는 건 아니다.
    그래야만 하는 세상이 되었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
    다만, 이 과정은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 한다"고 한
    성서구절을 연상시키면서, 우리네 인간군(群)의 그만그만한
    '도토리 키 재기' 싸움을 돌아보게 해 우울하고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우리 개개인은 남보다 특별히 더 우월한 존재도 아니고 더 깨끗한 존재도 아니며,
    더 의로운 존재도 아니다. 그 누구라도 자신이 도덕적 선민(選民)임을 자처하는 건
    그래서 아주 위험하다.
    언제 어떻게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질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천주교 미사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공동기도문이 있다.
    이게 아마도 모두가 흠결을 가진 채 사는 인간들의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이란 뜻일지 모르겠다.
    인간이 인간을 탓하기엔 이미 모두가 다 오염돼 버렸다.
    그러니 하늘의 구제를 청할 수밖에.

     나 지신을 생각해서라도 서로 불쌍히 여겨야만 나도 살고 너도 산다.
    그러나 공공사회와 정쟁에선 이게 안 된다.
    숙명인가? 어쨌든 씁쓸하다.
    자신에게 되돌아올 것을 충분히 예감하면서도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부메랑을 쏘아대며 살아간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류근일 /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