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현상 이면에 있는 것

      도널드 트럼프를 선택한 미국 국민들의 심리 저변엔 무엇이 깔려 있을까?
    평범한 주부이자 네 아이의 엄마이면서 현재 상담심리학 석사과정에 있는
    에퍼슨(A.D.P. Efferson)이란,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자유기고가는 그것을,
    미국 국민들의 ‘루시우스 신시나투스(Lucius Cincinatus) 대망론’이라고 불렀다.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가정주부의 말이기에 그녀의 설명이야말로
    뉴욕 타임즈에 기고하는 쟁쟁한 고급지식인 평론가들보다 한 결 더 정확하게
    트럼프 현상을 꿰뚫어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트럼프의 승리는 결국 미국의 평범한 중하층 백인들의 승리였고,
    따라서 미국의 고급 인텔리들과 기성 엘리트층의 패배이자 망신이었기 때문이다.

     루시우스 신시나투스는 로마의 총통(consul)이었다.
    그는 야만족의 포위로 극도의 위기에 처해 있던 로마의 시민들이 모셔다 세운
    비상 시기 총통이었다. 그는 임무를 잘 수행해서 로마를 구출했다.
    그 후 그는 보다 큰 야망을 가져봄직도 했건만 모든 걸 훌훌 털고 초야로 돌아갔다.
    미국 국민은 로마인들의 그런 다급한 심정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선택했다는 설명이다.

     미국 국민들의 내면을 그녀는 한 마디로 ‘트로마(trauma, 정신적 충격과 外傷)'라고 불렀다.
    미국은 더 이상 믿고 살 수 없는 난세,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고장 난 기계,
    더 이상 먹고 살 만하지 않은 나라라는 위기감이 미국 국민(특히 가난한 백인)들 사이에
    널리 깔려있다는 것이다.
    이 위기는 물론 민주당 공화당 등 정계, 언론매체, 월가(街), 권력화 된 인텔리 층으로 대표되는 기성 엘리트 권(圈)의 위선과 거짓말과 부패와 무능, 무책이 초래한 것이라고 일반 국민은 믿는다는 것이다. 미국 국민은 도널드 트럼프에게 이 누추한 아성(牙城)을 깨는 역할을 맡긴 셈이다.

  •  재미있는 것은,
    흔히 좌익(예컨대 샌더스 같은) 선동가나 전도사에게 맡길 일을
    억만장자이면서 음담패설과 막말을 불사하는 비(非)좌파이자
    반(反)이민 국수주의자(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에게
    그런 역할을 맡겼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런 그가 미국과 유럽의 근대를 담당해 온
    ‘근사한’ 이상주의자-리버럴-학식과 덕망있는 사람들의
    ‘속은 더러운데 겉만 번지레한‘ 세상에 무자비한 폭력(brute force)을 행사한 것만은 틀림없다.
    미국의 성난 국민은 트럼프의 바로 그 점을 높이 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트럼프 현상은 사회심리 측면에서 볼 때,
    바이말 공화국의 나태에 식상한 나머지 히틀러의 폭력을 불러들였던
    1930년대 독일 국민들의 심정과 비슷한 것이었을까?
    이건 좀 지나친 견강부회일 수 있다.
    그러나 필리핀의 두테르테 현상, 러시아의 푸틴 현상, 영국의 블랙시트 현상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대중적 절망감, 좌절감, 분노, 무력감과는 상당한 유사성이 있을 것 같다.

     이런 정서는 타락하고 무능하고 노후한 엘리트 민주주의에 대한
    매스(mass, 대중) 민주주의의 반란이랄 수도 있다.
    문제는 대중민주주주의 또한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타락한 엘리트 민주주의가 과두(寡頭) 지배체제라면,
    타락한 대중민주주의는 폭민(暴民)과 중우(衆愚)의 지배다.
    두테르테와 푸틴은 그 대중이 위임한 권위주의, 폭력, 자의성(恣意性)으로
    대중영합적 권위주의(populist authoritarianism)라는, 일견 모순된 리더십을 행사하고 있다.
    방황하고 허무해 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대중을 강력한 손아귀에 틀어쥐어
    그들을 불안하고 허망(虛妄)한 ‘자유’로부터 도피시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물론 그런 유형의 권위주의는 할 수 없다.
    그곳이 역시 미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기영합과 선동의 정치는 좀 할 것 같다.
    예컨대 백인 중하층의 상한 심사에 코드를 맞추는 미국 판 블랙시트 같은 것 말이다.
    보호무역, 관세장벽, 이민규제, 범죄소탕, 해외지출 축소가 그것이다.
    유럽과 한국이 그 유탄을 맞는 애꿎은 게구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자가 과소평가하는 게 있다.
    예컨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 세(勢)를 몰아내려 하는 중국의 야심찬 군사력 전개를
    ‘트럼프 대통령’은 그걸 그저 멀뚱멀뚱 바라만 보며
    “그래 너희들 다 먹어라, 우린 미국 안으로 들어가련다”라고 하겠는가 말이다.
    그렇게 하다간 미국은 미국 자체조차 제대로 보전할 수 없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꼭 하고 싶어서 소련-중공과 냉전을 벌였고,
    스탈린-마오쩌뚱-김일성과 열전을 벌였으며, 오데르-나이세 강(江)을 경계로 해서
    동유럽으로부터 서유럽을 지켜주었는가?
    다 그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사유가 있었던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에선 한-미 동맹에 차질이 오고,
    미-북 직접 대화가 우리를 배제한 ‘평화협정’을 논의하고,
    자유무역협정이 파기 또는 훼손될 것이란 우려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우선은 그런 일이 행여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의 대미 외교를 벌여야 한다.
    탈미(脫美)-친중 환상일랑 떨치고 실효성 있는 한-미 동맹 지속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다음으로는 우리도 스스로 돕고 지키겠다는 각오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북한 핵-미사일에 대해서도 금기(禁忌) 없이,
    있을 수 있는 모든 옵션을 일단 탁상 위에 올려놓고 검토해 봐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우리는 물론 주한미군 유지비의 약 반(半) 분을 지불하고 있어,
    트럼프가 “그들은 우리에게 돈을 내지 않는다(They don't pay us)"라고 한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은연중
    ”안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안일한 습성이 배어있는 것만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어떻게 되다니? 그런 것 없다.
    우리의 생명과 재산과 가정을 키기 위해선
    우리 자신의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만 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요걸 잊고 있지?

     국제환경은 급속하게 바뀌고 있다.
    그것도 우리에게 유리하지만은 않은 방향으로.
    그런데 우리는 밤낮 사실상의 ‘내전(內戰)’ 일색이다.
    한심한 집구석이다.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