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류근일 칼럼> 
     
                        있지만 없는 '제3의 길' '제3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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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정계 일각에서 가장 많이 논란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제3지대' 또는 '제3의 길'이라는 용어다.
친(親)박근혜 새누리당도, 친(親)문재인 더불어민주당도 아닌
또 다른 정치 세력, 또 다른 정치 노선이란 뜻이다.
안철수·박지원·김종인·손학규·국민의당 호남 의원들,
심지어는 'JP(김종필)와 함께하는 냉면 회동'까지 그런 논란의 당사자가 되고 있다.

 이들뿐 아니라 김무성·유승민 같은 박근혜 대통령과 사이가 썩 좋지 않은 여권 쪽 이름들도 본인들 의사와는 무관하게 또는 유관(有關)하게 들먹여지고 있다. 이 증후군이 현실화될 때는 그것은 내년 대통령 선거를 좌우할 중요한 변수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될지, 그리고 '제3의 길'이란 게 정말로 체계 있게 정립돼 있는지는 지금으로선 고개가 갸우뚱해지지 않을 수 없다.

 '제3의 길'은 토니 블레어 전(前) 영국 노동당 당수이자 총리의 멘토였던 앤서니 기든스가 쓴 말이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슈뢰더 전 독일 총리도 여기 속한다. 신(新)자유주의 경제와 톱다운(하향)식 사회주의 경제를 다 같이 배척하고 성장·기업·부(富)의 창출을 중시하되,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한 국가의 역할도 중시한다는 것이다. 유의할 것은 그러나, 이들의 '제3의 길'은 경제에 한정된 것이지 안보에선 '제3 운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안보에선 이들도 보수와 똑같이 전체주의 위협에 대한 강력한 억지(抑止) 태세를 추구한다.

 우리 경우도 안철수 의원이 처음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고 했을 때, 적잖은 보수 유권자들이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을 제치고 정당 투표에선 국민의당을 찍어 오늘의 3당 체제를 만들어 주었다. 경제는 조금 보수로 기우뚱하든 조금 진보로 기우뚱하든 크게 탈 날 것 없다고 본 데다 적어도 안보에서만은 보수로 가겠다고 하니 보수 유권자들이 안심하고 "좋아요" 해준 것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던 안철수 당초의 정체성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는 더불어민주당보다도 훨씬 앞서 사드 배치에 반대했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방어용 무기 배치에 반대하는 토니 블레어가 있을 수 있나? 없다. 안철수도 처음엔 없다고 했다가 더불어민주당과 선명성 경쟁을 벌이면서 '안보는 보수'를 접고 '안보도 진보'로 가버렸다. 그가 가는 길은 따라서 더 이상 '제3의 길'이 아니라 '제2 진보 야당'일 뿐이다.

 국민의당 비대위원장 박지원은 또 어떤가? 그는 처음부터 경제에선 뚜렷하지 않았지만, 안보에선 단연 '햇볕 근본주의자'였다. 그는 이 당도 저 당도 아니란 점에서만 '제3지대'에 있을 뿐 이념 지형상으로는 '제3지대' 아닌, 대북 유화(宥和) 쪽에 서 왔다. 그는 내년 대통령 선거에 임해선 '제3의 길'보다는 더불어민주당과 후보 단일화를 추구할 가능성이 있다. 그는 '원칙'보다는 '기교(技巧)'에 익숙한 타입인 까닭이다. 따라서 그가 가는 길 역시 진성(眞性) '제3의 길'이라 할 수 없다.

 '하산(下山) 직전'의 손학규는 일찍이 '진보적 자유주의'란 말을 한 적이 있다. '제3의 길' 비슷한 것이다. 문제는 그러나 그가 "사드 배치 반대를 당론으로 삼자" "미국보다 중국과 손잡자"고 하는 일부에게 대놓고 "아니요"라고 할 용의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걸 안 하고 못 할 경우 그걸 과연 '제3의 길'이라 해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김종인은 '경제는 민주화, 안보는 보수'라고 늘 말해왔다. 사드에 대해서도 더불어민주당 대표 추미애와는 말이 달랐다. 그래서인지 그는 요즘 '친문 운동권'에 여지없이 팽(烹)당하고 있다. 이런 '늘 간판' 배역에게 '제3지대' 창업주가 되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전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은 최근 갑자기 새누리당의 '극우화(化)'를 경계하면서 "대북 정책, 더 개방적이어야…" 하며 마치 '제3패션'으로 코디를 바꾸는 듯한 언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그는 야당을 향해 이렇게 말했었다. "개성공단 폐쇄를 신(新)북풍 공작이라 모 략중상, 대북 포용 정책을 신주처럼 모시고…" 1년 사이 공인의 말이 이렇게 달라진 사례도 아마 드물 것이다.

 이래서 여의도의 '제3의 길'은 네스호(湖)의 괴수(怪獸)처럼 '말만 무성하고 실체는 모호한' 설(說)일지 모른다. '제3의 길' 자체는 있다. 그러나 앞-뒤와 겉-속이 다른 수사학으로 표심(票心)을 헷갈리게 만드는 게 '제3의 길'은 아닐 것이다. (조선일보, 2016.9.6. 류근일 칼럼 전재)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 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