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泳三 정부 이후 공산계 抗日운동자 300여 명 서훈(敍勳)"

    ‘주무부처인 보훈처조차도 확실한 실태 파악 못한 상태“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김필재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방해했던 공산계 항일 운동자들 가운데 30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  양동안(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20일 바른사회시민회 등이 주최한 정책토론회에서 “공산계 좌익 항일운동자에게 훈장을 맨 처음 수여한 것은 김영삼 정부”라며 “그 후의 정권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좌익 항일운동자들에게 훈장을 더 많이 주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양 교수는 “특히 노무현 정부는 많은 수의 공산계 좌익 항일 운동자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며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노무현 정부는 두 차례에 걸쳐 101명의 좌익 항일 운동자들에 대해 훈장을 수여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노무현 정부는 마치 항일 운동자들에게 훈장을 못 줘서 안달이 난 것처럼 그해 3.1절에 54명의 좌익항일운동자에게 훈장을 주었고, 같은 해 광복절에 47명의 좌익 항일 운동자들에게 훈장을 주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공산계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2005년 이후로도 공산계 항일운동자들에 대한 훈장 수여는 계속되었다”며 “2016년 현재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공산계 항일운동자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기관은 없다. 심지어 주무부처인 보훈처조차도 모른다”고 비판했다.

    양 교수는 “나름대로 어름짐작해보면 이제까지 서훈된 공산계 좌익운동가들은 대략 300명 선에 접근할 것으로 추산된다”며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

    《2004년 10월 국회에서 이한구의원이 밝힌 바에 따르면, 그때까지 서훈을 받은 좌익 항일운동자 수는 133명에 달했다. 그들 대부분은 공산계일 것이다. 전술한 바대로 2005년 한 해 동안에만도 101명이 훈장을 받았다. 그 두 숫자만 합쳐도 234명이나 된다. 2006년 이후에도 해마다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정부의 훈장 수여가 계속 되어왔고, 그 속에 공산계 항일운동가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해마다 5명만 계산해도 10년 동안이면 50명이다.

    2005년도의 수치 234명에 50명을 더하면 284명이 된다. 만일 이런 계산이 타당하다면 우선 그 숫자만으로도 문제가 된다. 국민이 잘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많은 좌익 항일운동자들이 훈장을 받았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심각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크다. 그 동안 좌익 항일운동자들에 대해 훈장을 줄 것인지에 대한 국민적 차원의 진지한 논의가 없었던 조건에서 쉬쉬하면서 그렇게 많은 수의 좌익 항일운동자들에게 훈장을 주었다니...》

    양 교수는 “좌익 항일운동자들에 대한 훈장 수여 문제는 단순한 명예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혈세에서 충당되는 자금을 필요로 하는 문제”라며 (정부는) 인류의 보편적 도덕률에 따라 위법인 동시에 반국가적인 좌익항일운동자들에 대한 서훈을 중단하고 그들에게 수여된 훈장을 취소하는 조치를 즉각 개시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아래는 이날 양동안 교수가 공개한 대한민국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좌익 항일운동자 중 지명도가 높은 8명의 주요 행적이다. <주>

    ➀이동휘(1873~1935)는 1907년부터 국내에서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다가 소련 령으로 이주했다. 소련에서 1917년 공산주의혁명이 성공하자 그에 동조하여 18년 소련령에서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을 모아 한인사회당을 만들었다. 19년 상해로 이동하여 고려공산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차지한 후 소련의 지시에 따라 임시정부를 코민테른 휘하 조직으로 만들기 위한 공작을 전개했다. 임정 내 민족주의진영의 반대로 그 공작에 실패하자 임정을 탈퇴하여 소련 령으로 돌아가서 임시정부 와해공작을 전개했다.

    ➁여운형(1886∼1947)은 1920년 8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결성에 참여했고, 뒤이어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21년 공산당 선언을 번역했고, 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고 레닌 트로츠키와 만났다. 23년 소련의 지원을 받아 임시정부의 개조 또는 해산을 목표로 한 국민대표대회 소집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29년 일경에 체포되어 3년 복역 후 32년 석방되었다.

    일제말기 일제의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로 인해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기 직전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유지권을 인수받았다. 치안유지권인수를 근거로 하여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여 해방 직후인 45년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그 위원장이 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 및 그 후신으로 등장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주도권을 공산당에 빼앗긴 후 45년 10월 인민당을 결성하고 그 위원장이 되었다. 여운형은 45년 가을부터 김일성에 포섭되어 비밀리에 북한을 왕래하며 김일성 및 소련군의 지시를 받아 행동했다.

    ➂권오설(1897~1930)은 3·1운동에 참여하여 징역 6개월을 복역했다.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26년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6·10만세 운동을 준비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복역했다.

    ➃김철수(1893~1986)는 1920년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에 가입했고, 23년 임시정부 개조 및 해체를 추구하는 국민대표대회 소집에 참여했으며, 25년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26년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29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다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복역했다. 44년 투옥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다. 석방 후 조선공산당의 주류인 박헌영파에 저항하다가 실패하여 당을 떠났으며 그 후 정치활동을 중단했다.

    ➄김재봉(1891~1944)은 3·1운동에 참가했고, 1925년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6년간 징역을 복역했다.

    ➅주세죽(1899~1950)은 3·1운동에 참가했고, 1925년 경성여자청년동맹(조선공산당 외곽조직)을 결성했으며, 29년부터 31년까지 모스크바 동방 노동자 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32년 상해에서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전개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의 처였다.

    ➆장지락(김산, 1905~1938)은 1920년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교정원으로 참여했고, 23년 독립신문을 떠나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했으며, 24년 북경에서 고려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36년 조선민족해방동맹 결성에 참여했으며, 중국공산당군에 참여했다.

    ➇윤자영(1894~1938)은 3·1운동 참여로 1년간 징역을 복역했고, 1921년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했으며, 26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결성했고, 29년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 결성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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