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인이 쓴 '로마문화왕국 新羅' 이야기
    신라는 북방草原의 길을 통하여 로마와 교류하였다!

    趙甲濟  
     
10여년 전 일본 도쿄를 여행하던중 일본인 기자의 소개로 다치바나 씨를 만났다. 그는 1972년에 文藝春秋에 '다나카의 인맥과 금맥'이란 추적 기사를 써서 다나카 수상을 물러나게 하였던 유명한 저널리스트이다. 책으로 꽉 찬 그의 집을 찾아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재미 있게 읽었다는 新刊을 추천하는 것이었다.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라는 일본 제1의 유리 공예가가 쓴 「로마문화왕국 - 新羅」(新潮社)란 책이었다. 317쪽 분량의 원색 사진이 많은데 책 표지 띠에 써놓은 선전문이 이러하였다. 
   
   「古代史가 바뀐다! 東아시아에 누구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로마 문화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新羅다! 출토유물과 新발견의 고대 기록사료 등, 實在자료에 의하여 신라의 수수께끼를 해명한다.」 
   
   이 책에서 주로 인용하고 있는 자료는 1973년과 이듬해 경주에서 발굴한 天馬塚(천마총·발굴 당시는 155호 고분)과 皇南大塚(황남대총·발굴 당시는 98호 雙墳) 출토 유물이었다.
기자는 두 고분 발굴 취재를 한 적이 있어 이 책이 빨리 읽혔다. 
  
   著者 요시미즈氏는, 신라 유물에 로마 문명의 흔적이 있다는 대담한 주장을 하였다.
신라가 중국으로부터 한자·불교 등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6세기 전까지는 북방 草原의 길을 통하여 중앙아시아 및 중동, 그리고 흑해·지중해 연안의 로마 식민지와 물적·인적 교류가 왕성했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을 타고 로마의 문화(유리 공예품, 황금칼, 장신구 등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람과 정신적인 것들까지)가 신라에 들어왔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고구려 백제와 신라가 다른 점을 강조하였다.
고구려·백제는 중국 문물을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유독 신라는 6세기 중반까지 중국의 先進문물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저자는, 신라가 북방 草原의 길을 통하여 서쪽 세계와 교류하고 있었고 중국에 못지 않은 先進 문물을 수입하였으므로 굳이 중국에 기댈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로마 문화를 수입하고 있던 新羅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문물이 先進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백제·고구려가 거의 매년 北魏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 나라와 사신을 보내어 교류한 것과는 선명한 대조이다. 
   
   「로마문화왕국-신라」의 저자 요시미즈氏는 이 점을 집중적으로 캐고 들어간다. 한반도의 구석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가 무슨 배짱으로 아시아 문명의 거대한 光源인 중국을 무시하고 수백년을 버티었는가. 
   
   요시미즈氏는 한국과 중국 측의 史料를 검토하여 辰韓(신라의 모태. 지금의 경상도 지방 부족국가)이 중국의 西晉에 조공한 서기 286년 이후 91년간 공백, 신라가 前秦에 조공한 382년 후 126년간 공백, 北魏에 사신을 파견한 521년 이후 43년간 국교 공백의 상태였음을 적시하면서 이것은 미스터리라고 규정했다. 
   
   <신라는 이웃 백제·고구려가 중국의 정치·경제제도를 도입하고 중국문화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여도 이에 동조할 필요가 없었을 정도로, 自國의 정치제도나 경제시스템, 또는 문화 전반에 걸쳐서 자신을 갖고 수행할 수 있을 만큼 고도의 내용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고분의 출토 유물을 분석하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 저력은 로마문화에서 나온 것"이란 주장도 하였다. 
   요시미즈 씨는, 우리 고고학자들이 스키타이-흉노 草原 문화의 결정체라고 보는 신라금관이 기본적으로는 그리스-로마계통의 왕관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라 積石木槨墳에서 나오는 수많은 금팔찌, 금귀고리, 寶劍, 유리 공예품 등을 분석하였다. 상당수가 로마에서 온 것이든지, 로마적인 것이 중앙아시아-초원 루트를 통해서 신라에 들어온, 로마문화 源流의 유물이란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皇南大塚에서 나온 유리 그릇 가운데는 로마에서 수입한 것도 있지만 로마의 유리 기술자가 신라에 들어와서 신라의 시설을 가지고 만든 것도 있다고 썼다. 
   
   4~6세기 신라는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서방 로마세계와 교류했고 이는 신라 지도부가 이 문화 루트를 잘 아는 흉노족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했다. 서방으로 통하는 창을 열어놓고 있었던 신라는 6세기 중반부터 중국으로 방향을 튼다. 
   
   신라의 이런 입장변화는, 5세기에 게르만족이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西로마 제국이 멸망하고(476년), 유럽·아시아에 걸쳐 있었던 로마 식민지가 황폐됨으로써 문화 교류의 상대방이 사라진 때라고 이 책은 주장했다. 北중국을 통일했던 鮮卑族(유목기마민족)의 나라 北魏도 신라처럼 로마와 교류했으나 西로마가 망한 18년 뒤 수도를 大同에서 中原의 낙양으로 옮김으로써 로마와 단절한다. 
   
   신라는 법흥왕의 개혁 이후 중국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불교, 한자, 제도를 정력적으로 수입한다. 법흥왕은 왕족의 장례식도 간소화시켜 호화찬란한 積石목곽분이 일거에 사라지고 중국식 석실묘로 바뀐다. 著者는 이 책의 끝을 이렇게 마무리짓고 있다. 
   
   <그 후 신라는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唐과의 교류를 밀접히 함으로써 약소국이면서도 곧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도 멸망시킨 뒤 한반도를 통일하였다. 小國 신라가 지녔던 이러한 반도통일의 에너지는 과거 로마문화의 수용 시대에 쌓아 올렸던, 중국문화와는 다른 에너지의 잠재적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반도 통일의 큰 원동력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著者가 신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4년이었다.
미추왕릉 지구 발굴 때 출토된 코발트 블루의 작은 玉구슬 속에 남녀의 얼굴이 상감되어 있고, 그 주변을 새들이 날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영남대학교 李殷昌씨로부터 전해 들었다. 
   
   흥분한 요시미즈氏는 경주박물관으로 달려가 그 玉구슬과 對面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 하나밖에 없는 肖像玉이다』고 단정했다고 한다. 네 인물이 새겨져 있었는데 두 사람은 寶冠을 쓴 왕과 왕비. 눈썹이 옆으로 붙어 있고(連眉) 콧날이 날카롭고 오뚝했으며 피부는 흰 서양 사람이었다. 요시미즈氏는 『옥구슬의 디자인, 제작방법, 상감된 인물 등으로 추정할 때 틀림없이 로마 세계에서 만들어진 구슬이다』고 단정했다. 그렇다면 왜 이 구슬이 아시아 대륙의 끝머리에 붙은 신라에 와 있단 말인가. 
   
   著者 요시미즈氏는 『과거 내가 품고 있었던, 삼국시대의 신라 문화가 종래의 통설과는 달리 백제나 고구려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는 인식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 사실을 확실히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요시미즈氏는 신라의 독특한 문화 수용 실상을 밝혀내면 동양사, 고대 한국사, 고대 일본사, 고대 유라시아史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고대 신라로 안내한 문제의 玉구슬이 만들어진 곳을 세 군데로 좁혔다.
지금 루마니아인 다키아, 지금 불가리아인 트라키아 및 모헤시아國 . 이곳은 당시(서기 4~5세기)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다. 이 3國 중 어느 나라에서 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玉구슬은 무역품이 아니라 그곳의 王家에서 신라 王家로 선물한 것임이 분명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라와 로마 세계는 일종의 國交까지 맺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요시미즈氏는 신라 고분에서 로마문화 계통의 유물이 발견된다는 것은 물건만 교류한 것이 아니라 물건을 따라서 사람이 오고갔으며 로마의 정신문화도 묻어왔을 것이라는 점을 유독 강조하고 있다. 그 예로 든 것이 1973년에 경주 鷄林路 공사장에서 발굴된 황금 寶劍이다. 길이 약 30cm의 이 보검은 황금판에다가 여러 개의 보석을 박은 호화찬란한 것이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名品이다.
요시미즈氏는 이 보검의 계보를 추적하여 지금의 불가리아에 있었던 트라키아의 켈트族 왕이 주문 생산하여 신라 王家에 선물한 칼이라고 단정했다. 
   
   트라키아 왕이 이런 귀중품을 무역상에 맡겨 북방 초원을 통과시켜 신라에 전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트라키아 왕의 사절이 직접 신라에 왔든지 신라 사신이 트라키아까지 가서 받아 왔든지 둘 중 하나란 것이다. 요시미즈氏는 트라키아 왕이 금세공 기술자를 신라로 보내면서 호위병으로서 흉노족을 썼을지도 모른다고 추리했다. 
   
   한 일본인을 흥분하게 만든 4~6세기 신라문화의 서방적 요소, 여기에 한민족의 源流가 갖는 국제성과 주체성의 뿌리가 있을지 모른다. 요시미즈氏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의 부족합의제 통치행태는 흉노의 전통과 같다고 썼다. 왕을 부족장들이 추대하는 방식도 흉노의 君主 추대승인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신라騎兵이 칼·창뿐 아니라 도끼와 곤봉 등 다양한 무기를 가졌던 것도 로마의 기병으로부터 북방기마민족이 채용한 무기 시스템을 신라가 수용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요시미즈氏는 삼국사기를 분석하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중국曆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신라는 로마曆을 사용한 것 같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또 皇南大塚 北墳에서 나온 銀製龜甲東物文盃에 새겨진 바지를 입은 노예를 추적하여 이는 南러시아에 있던 흉노인이 만든 것이라고 추정했다. 요시미즈氏의 관점이 흥미로운 것은, 지금까지 한국 학계의 정설이 된, 古신라 문화에 스키타이-흉노 문화의 영향이 크다는 주장을 서쪽으로 더욱 연장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스키타이-흉노계통의 북방기마민족 문화에 영향을 준 것은 로마문화이며 흉노 등을 매개로 하여 신라에 들어온 문화의 源流는 로마라고 보았다. 이 로마문화의 전달자라고 그가 지목한 것은 북방초원에 있을 때 이미 로마문화를 수용했던 흉노족이다. 
   
   흉노는 원래 놀던 무대가 북방초원 지역이기에 그들이 신라에 들어와 있어도 이 지역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로마에 이르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요시미즈氏는 신라통일의 잠재력은, 당시 세계의 2대 문명인 로마와 중국의 문화를 다 같이 받아들여 종합함으로써 생겼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 문무왕 비문대로 신라 김씨가 흉노족이라면, 또 신라김씨의 선조 김알지가 후한에서 쫓겨난 흉노인 金일제의 후손이라면, 그들은 신라지역에 들어오자마자 反중국, 親서방(로마) 정책을 펴 한 300년간 로마문화를 중점적으로 수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국인들은 자랑스럽게 말한다. 
   
   『우리의 조상은 몽골인이다. 칭기즈칸도 우리와 같은 몽골인이야.』 
   이 蒙古란 말은 唐 시대에 작명되었으나 칭기즈칸이 등장한 뒤에 널리 쓰였다. 중국의 秦漢 시대, 우리의 古朝鮮, 三國時代에 몽골지역 및 중앙아시아 지역 등 북방초원 지대를 휩쓸던 유목기마민족은 匈奴族이 主流였다. 이때는 몽골이란 말이 없었다. 이 흉노족은, 한참 뒤에 몽골족과 투르크족으로 분류된 북방 종족의 혼성 유목민으로 보인다. 
   
   몽골족은 몽골초원의 동부에, 투르크족은 서부인 알타이 산맥 부근이 본거지였다는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투르크족에는 서양 사람들의 피가 많이 섞여 있다. 흉노족은 그 활동 무대가 서쪽 알타이 쪽이었으므로 그 문화 속에는 서양적인 요소가 많고, 흉노계통이 정권을 잡은 新羅의 문화 속에는 백제·고구려에는 없는 서양의 영향이 들어 있다. 
   
   칭기즈칸 이후의 몽골 시대에 초원으로부터 한반도로 많은 移民이 있었던 적은 없다.
고대사 시절에 유목기마민족이 한반도로 들어왔다면 당시 몽골초원의 주인공이던 흉노계통과 직간접적인 영향이 있는 기마민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누가 『우리 조상은 흉노족이었어』라고 말하면 당장 비판이 쏟아진다. 
   
   우리가 그 흉악한 흉노족의 후손이라고? 뭐 단군의 아들이 마적단 같은 흉노라고? 
   
   이는 漢族의 심리전에 넘어간 탓이다. 
   
   漢族은 자신들을 괴롭힌 유목민들의 이름을 지을 때 흉악한 漢字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匈奴란 글자를 보면 화가 날 만도 하다. 조선조 양반들이 韓民族의 뿌리를 몽골이나 흉노족과 연결시켜 생각했는지, 아니면 漢族의 일파라고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後者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조선조 양반들은 漢族의 明을 부모의 나라라고 생각했고 그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인종적으로는 漢族보다 더 우리와 비슷한 오랑캐 여진족의 나라와 싸워서 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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