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추위 속에서 리지웨이 장군을 생각한다!

    6.25 熱戰이 한창이던 1950년 겨울은 추웠다.
    이 시기에 대한 미군들의 회고담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가 'cold'이다.
    미군이 싸운 전투중 가장 온도가 낮았던 것이 6.25였다.

    趙甲濟   
1월24일 오전 3시 현재, 서울은 영하 16도, 나의 고향인 경북 청송군 안덕면은 영하 16도인데 오전 6시엔 영하 18도가 된다고 한다. 철원은 영하 18도(오전 6시엔 영하 22도), 내가 군대 복무를 하였던 경북 영양군은 영하 14도인데 아침 6시엔 영하 19도로 내려간다고 한다. 공군 부대가 있는 일월산 고지는 아마도 영하 26도쯤 될 것이다. 충북 제천은 영하 18도이다. 내륙으로 깊게 들어간 곳일수록 춥다. 
  
  24일 오전 8시 현재 기온: 서울 수유동 영하 18도, 북아현동 영하 17도, 충북 제천시 영하 20도, 경북 영양 영하 16도, 강원도 춘천 태백 횡성 양구 인제 영하 19도, 경북 봉화군 영하 18도, 강원도 철원 영하 18도. 
  
  한반도의 겨울은 춥다. 특히 6·25 熱戰이 한창이던 1950년 겨울이 추웠다. 이 시기에 대한 미군들의 회고담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가 'cold'이다. 미군이 싸운 전투중 가장 온도가 낮았던 것이 6·25였다. 
   
  지금 북한동포들은 우리가 6·25 때 겪었던 그 추위를 거의 알몸으로 견디고 있다. 춥고 배고픈 시절은 남한에선 추억이 되었으나 북한동포들에게는 현실이다. 남한사람들도 몇 사람의 미국인이 아니었으면 지금 북한동포처럼 추위에 떨고 있을 것이다. '알지도 못한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참전을 결단했던' 트루먼 대통령, 군사전문가들의 거의 일치된 반대를 꺾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戰勢를 역전시켰던 맥아더 장군, 낙동강 방어선과 부산교두보를 확보하여 반격의 힘을 축적했던 워커 미8군 사령관, 그는 1950년 12월에 한국군 트럭에 받혀 事故死했다. 중공군 대공세 시기에 워커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유엔군의 총붕괴를 막고 서울을 재탈환했던 리지웨이, 조종사 아들을 북한상공에서 잃은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 등등.
   
  • 6.25에 참전, 중공국을 막아낸 리지웨이 장군.
    ▲ 6.25에 참전, 중공국을 막아낸 리지웨이 장군.
  •   나는 리지웨이 장군의 한국전 회고록을 읽었을 때 여러 번 감동했다. 문명국가의 장교들이 가진 紳士道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戰死한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미8군사령관에 임명된 그는 부인한테 제대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도쿄를 거쳐 대구로 날아온다. 맨 처음 그가 한 일은 李承晩 대통령 예방이었다. 李 대통령은 미군이 중공군의 총공세에 굴복하여 한국을 포기하고 철군하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나는 이 완강한 戰士를 만나 내가 8군을 일본으로 데려가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싶었다. 그는 약간 수동적으로 나를 맞았다. 나는 악수를 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을 했다. 말을 돌려서 할 시간도 없었다.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대통령 각하, 여기 오게 되어서 기쁩니다. 저는 여기 머물려고 온 것입니다.'
       이 말을 그는 기다렸던 것 같았다. 그는 태양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눈에 물기가 고였다. 그는 두 손으로 나의 손을 잡았다.>
       
      서울을 포기한 직후 리지웨이 장군은 한국군의 丁一權 참모총장에게 보낸 친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직 하나의 궁극적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귀하의 국민들의 자유를 지켜내는 일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함께 싸워야 한다.>
      
      리지웨이 장군은 1951년 1월21일 苦戰中인 미8군을 향해서 '우리는 왜 여기에서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란 제목의 글을 내려보낸다. 이 글에서 리지웨이 장군은 '우리는 한국의 마을과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국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만 싸우는 것만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지는 글의 요지는 이러했다. 
      
      <핵심적 문제는 서방문명이 공산주의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가, 아니면 포로들을 사살하고, 시민들을 노예화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지배층이,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神聖視(신성시)하는 정부를 무너뜨릴 것인가이다. 우리의 동맹국인 한국의 자유뿐 아니라 우리의 자유, 우리의 자주독립과 생존을 위해 우리는 싸우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공산주의와 개인의 자유 중 兩者擇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으나 동시에 最善의 기회를 부여받았다. 군인이란 직업의 명예를 드높여, 우리를 믿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의무를 다할 기회가 왔다.> 
       
      1951년 1월1일 그는 서울 북방으로 가서 후퇴하는 한국군을 보았다. 회고록에서 그는 한국군이 무질서하게 무기도 버리고 지휘계통도 무너진 채 퇴각하는 모습을 실감 있게 묘사했다. 리지웨이 장군이 차에서 내려 한국군의 궤주를 정지시켜려고 해도 공포에 질린 한국군은 미군 사령관의 말도 듣지 않더란 것이다. 리지웨이 장군은 1·4 후퇴時 지켜본 한국인들의 참혹한 피난행렬에 대해서 이런 요지의 묘사를 했다. 
      
      <그 장면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수염을 기른 노인들, 아들의 등에 어린아이처럼 업힌 할머니들, 그들은 말 없이 한강을 건너갈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공산주의의 폭력을 피해 잠시 맛보았던 그 자유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이 시기 미군은 후퇴하고 있었고 리지웨이는 병사들과 함께 막사에서 생활하면서 미군의 사기를 회복시켜 반격의 찬스를 만들기 위하여 苦鬪(고투)하고 있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시기에도 그는 한국인에 대한 예의와 동정심과 배려를 유지했다. 그의 회고록엔 고생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紳士란 어려운 조건하에 처했을 때 품위를 유지하는 言行의 소유자이다. 
       
      같은 시기 毛澤東은 人命손실에 대해서는 일체의 고려 없이 작전을 짜고 수행했다. 중공군이나 북한군 측의 기록에선 인간적 배려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戰場에서도 인간의 생명, 그것도 他國民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 리지웨이 장군. 그는 1951년 봄의 반격작전을 통해서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한국포기를 검토하던 미국 워싱턴의 정책입안자들을 안심시키고 한국을 지켜냈다.
       
      이 추운 겨울 한국인들이 따뜻한 週末을 보낼 수 있게 만든 사람중의 한 분이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인 것이다.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우리를 더욱 따뜻하게 해줄 것이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