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딕 체니, “라이스와 힐이 김계관에게 속아 北核 문제를 망쳤다!” (上)

    ‘합의를 위한 합의’에 집착하다 금융제재, 테러지원국 제재, 敵性國 교역 제재를
     다 풀어주고 自滅하다.

    趙甲濟   
분석가는 많지만…

“머리가 좋은 사람이 부족하여 망한 나라는 없다.
용감한 사람이 없을 때 망하는 것이다.”

나는 1980년대 말부터 북한의 핵문제를 취재하여 왔다.
중요한 고비 때 용감한 사람이 한국과 미국의 정권 수뇌부에 있었더라면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이다. 1994년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 핵시설 폭격을 검토할 때 金泳三(김영삼) 대통령이 말리지 말고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2005년에 시작된 북한 지배층에 대한 미국의 국제적 금융 제재를 2년 뒤 풀어주지 않았더라면?

북한의 핵문제를 정교하게,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이 보았지만
이를 국가생존 차원의 문제라고 인식하고, 고민, 결단하는 공직자를 만난 적은 없다.
논평가와 구경꾼은 많았지만 死生決斷(사생결단)하는 전략가와 행동파는 없었다.
북한 정권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서 포위망을 뚫고, 네 번이나 핵실험을 하면서,
實戰(실전)배치 상황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벼랑 끝 전술’로
나왔고 한국과 미국이 구경꾼의 자세로 임하였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엔 김계관이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모사드의 정보

2006년 10월9일 북한이 최초의 핵실험을 하였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다음 날 북한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면서 한 문장을 덧붙였다.

<북한이 핵무기나 핵물질을 국가나 非국가 단체에 移轉(이전)하는 행위는 미국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될 것이며, 미국은 그러한 행위의 결과에 북한의 책임을 확실하게 물을 것이다.>

여섯 달이 지난 2007년 4월 중순 부시 대통령의 안보 보좌관 스티브 해들리의 사무실에서 딕 체니 부통령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국장 메이어 다간을 만났다. 다간은 시리아의 사막 알키바에서 건설 중인 시설물의 사진을 내어놓고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결론은 북한이 영변의 원자로와 같은 가스냉각식 흑연 감속로를 지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 35년간 이런 型(형)의 원자로를 운영하고 있는 나라는 북한뿐이었다.

이스라엘 측은 체니에게 한 북한인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영변의 핵연료 제조 책임자인데 시리아의 원자력위원회 책임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찍혔다. 이 북한인은 6자회담의 북한 대표단 일원으로 활동한 사실도 확인되었다. 모사드는 비슷한 시기 한국의 국가정보원에도 체니에게 제공한 정보와 같은 설명을 하였다. 

이스라엘 측은 이 정보를 제공한 뒤 미국에 이 시설을 폭격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문제를 놓고 백악관에서는 수개월 동안 極秘(극비) 협의가 계속되었다. 대통령 안보보좌관 해들리가 주관한 이 협의에는 체니 이외에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 그리고 합참의장, CIA 부장, 국가정보국 국장이 참석하였다.

폭격이냐 외교냐?

체니 부통령은 부시 대통령이 경고한 대로 미국이 원자로 시설을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라이스, 게이츠 등 다수는 “확인된 정보가 아니다” “시리아가 이라크의 미군에 보복을 할 것이다”의 이유를 대면서 신중론을 폈다. 결론이 나지 않자 체니 부통령은 2007년 6월14일 대통령과 갖는 週例(주례) 오찬에서 미군에 의한 폭격을 건의하였다. 부시는 다른 참모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면서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6월17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날 저녁 백악관의 대통령 숙소에 안보 관련 부서 책임자들이 모였다. 부시는 “정확한 정보냐”고 물었고, 국가정보국 국장 마이크 맥코넬은 “시리아의 시설물이 원자로라는 데 강한 자신감이 있다”고 답했다. 이날 두 가지 대책이 논의되었다. 외교적 방법과 폭격이었다. 前者(전자)는 이 문제를 유엔과 국제원자력위원회에 통보, 국제적 공감대를 형성, 시리아가 원자로 건설을 포기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체니는 시리아나 북한과 같은 깡패 국가가 그런 방식의 외교적 압박에 굴복할 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미국이 하든 이스라엘이 하든 군사적 방법만이 有效(유효)할 것이다’고 했다.

이틀 뒤 이스라엘의 애후드 올메르트 수상이 워싱턴을 방문하였다. 부시 대통령과 회담한 올메르트 수상은 체니 부통령과 따로 만나 다시 한 번 미국의 군사적 조치를 권유하면서 미국이 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임을 명백히 하였다. 그 직후 국가안보회의에서 체니는 다시 한 번 미국에 의한 군사적 대응을 제안하였다. 부시 대통령은 “부통령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나요?”라고 물었다. 한 사람도 손을 들지 않았다. 부시는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기로 결론을 내린 뒤 라이스 장관에게 이스라엘이 어떻게 나올 것 같으냐고 물었다. 라이스는 “이스라엘이 협조적으로 나올 것이다”고 답하였지만, 체니는 “우리가 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폭격할 것이다”고 반박하였다.

7월 중순 부시 대통령은 올메르트 수상에게 전화를 걸어 외교적 방법을 선택하여야겠다고 말하였다. 실망한 수상은 이런 요지로 반박하였다.
“우리의 운명을 유엔이나 국제원자력기구 같은 데 맡길 순 없다. 시간이 없다. 원자로에 연료가 들어가기 전에 부숴야 한다. 연료 裝塡(장전) 뒤에 폭격하면 방사능 오염의 위험성이 있다.”

2007년 9월6일 밤 이스라엘의 F-15 편대는 시리아 영공을 침범, 알키바의 원자로를 완벽하게 파괴하고 돌아왔다. 이스라엘은 미국에 폭격 사실을 비밀에 붙일 것을 부탁하였다. 그렇게 하면 시리아의 지도자 바샤르 아사드도 공개적인 반응을 삼갈 것이라고 했다. 시리아는 폭격을 당하고도 침묵하고 서둘러 건물 잔해를 치웠다. 북한 기술자들이 그 직후 시리아를 방문, 事後(사후) 대책을 논의하는 것도 포착되었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핵물질의 移轉(이전)’이란 금지선을 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직접적인 응징을 하지 않았다. 미국 국방부는 격화된 이라크의 內戰(내전)에 말려들어 있었고, 국무부의 라이스 장관과 크리스토퍼 힐 6자회담 대표는 북한을 상대로 막후교섭을 진행 중이었으며,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비판적 여론에 직면, 지지율이 폭락하는 등 레임덕 증상을 보이고 있을 때였다.

딕 체니의 ‘라이스-힐 고발장’

체니 부통령은 2011년에 출판한 회고록 《나의 시대에(IN MY TIME)》서 ‘좌절’이란 제목의 章(장)을 만들어 2007년의 對北(대북)협상 실패를 신랄하게 비판, 폭로하고 있다. 라이스와 힐이 김정일과 김계관에게 속는 정도가 아니라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고 공격하였다. 그는 부시 대통령이 이들에게 휘둘려 對北(대북)제제의 두 틀(테러지원국 지정, 무역제재 규정)을 허무하게 없애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金大中(김대중)과 盧武鉉(노무현) 전 대통령의 對北(대북)굴종 정책에 대한 비판과 비슷한 맥락의, ‘라이스-힐의 배신’에 대한 일종의 고발장이다.

체니는 對北정책이 어긋나기 시작한 단초는, 2006년 10월 말 북경에서 있었던, 6자회담 미국 대표 힐과 북한 대표 김계관의 단독 회담이었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미국의 6자회담 원칙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부시 대통령이 6자회담을 구상한 이유는 북한에 대하여 미국·한국·중국·일본·러시아가 단합된 압박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힐-김계관 회담은, 다른 나라들을 제치고 미국과 북한이 따로 협상해선 안 된다는 정신을 깬 접촉이었다는 비판이다. 두 달 반 뒤인 2007년 1월 힐은 라이스의 허락 하에 베를린에서 북한 대표단과 다시 만났다. 체니는 미국 대표단이 북한 대표단을 위하여 만찬까지 열어준 것을 비꼰다.

<그들이 가장 확실한 금지선을 넘었는데도 우리는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다니!>

라이스의 《더 없는 명예: 워싱턴 시절의 회고록(2011년)》에 따르면, 힐 차관보가 독일의 메르켈 총리를 만나기 위하여 베를린에 도착한 라이스를 찾아와 흥분된 표정으로 보고하였다고 한다. 김계관이, 영변 원자로를 폐쇄하고 추방한 IAEA(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을 다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뭘 원하지요? 경수로입니까?”
힐은 “그게 아니고, 돈을 돌려 달라고 합니다”고 했다.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동결된 북한 관련 계좌 2500만 달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힐은 “김계관이 상부의 지시를 넘어서는 언질을 준 것 같다”면서 “즉시 답변을 해줘야 한다”고 졸랐다. 라이스 장관은 백악관으로 전화를 넣어 부시 대통령에게 간략한 보고서를 보낼 터이니 신속히 결정해달라고 하였다. 몇 시간 뒤 부시 대통령에게 다시 전화를 하였다. 대통령은 회담을 진행하라고 허락하였다. 뒤돌아보면 이것은 큰 실수였다. 북한은 6자회담이 아닌 美北 단독 협상을 이용, 임기 말의 부시 정부를 농락하면서 국제 금융제재라는 포위망을 벗어날 뿐 아니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도 빠진다. 

협상을 위한 협상에 매몰되어 목표 상실

라이스와 힐이 북한에 끌려가는 과정을 지켜본 체니는 <이들 외교관이 어떤 형태의 거래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다 보니 北核(북핵) 포기라는 목표를 잃어버렸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半信半疑(반신반의)하는 부시 대통령도 라이스와 힐에게 ‘비핵화로 가는 길이 맞나?’라고 여러 번 물었다. 그때마다 두 사람은 현실과 동떨어진 말로 대통령을 안심시키려 했다고 한다. 체니 부통령은 미국의 가장 큰 실수는 2007년의 2월13일의 6자회담 합의라고 썼다.   
2007년 2월13일, 6자회담은 ‘(2005년)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 합의’를 발표하였다.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쇄·봉인, IAEA 감시·검증요원의 영변 복귀, 對北 중유 5만 톤 제공(약속 이행시 추가로 95만 톤 제공), 美北(미북) 및 日北(일북) 관계 정상화 추진에 합의하였다. 2·13 합의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테러지원국 지정으로부터 해제하기 위한 과정을 개시하고 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對적성국 교역법 적용을 종료시키기 위한 과정을 진전시켜 나간다는 공약을 상기하면서, 미합중국은 미·북 관계정상화 실무그룹 회의를 통해 도달한 컨센서스에 기초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치들과 병렬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공약을 완수할 것이다.>

미국은, 핵실험, 영변 핵시설 재가동 등 북한의 違約(위약)에 대하여 벌을 주기는커녕 2005년 9월19일에 약속하였던 의무를 이행하겠다는 또 다른 약속만 믿고 對北(대북)제재의 근간을 해체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런 약속을 받아내자마자 북한은 또 다시 억지를 부리기 시작한다. 3월의 6자회담에서 북한은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에 동결된 2500만 달러의 북한 관련 예금을 해제하여, 돌려주지 않으면 회담에 불참하겠다면서 퇴장해버렸다.

부시, 노무현에게 화를 내다

6자회담에서 9·19 합의가 나오기 나흘 전인 2005년 9월15일 미국 재부무는 미국 애국법 311조 규정에 따라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을, (북한 정권 등을 위한) 불법자금 세탁 우려 기관으로 지정, 미국 금융기관에 대하여 이 은행과의 거래를 금지시켰다. 미국 재무부와 국무부는 특별 팀을 만들어 북한의 달러 위조, 마약거래, 무기수출 등 범죄행위를 추적, 여기서 벌어들인 돈이 북한 정권의 유지 및 핵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사상초유의 간접적 금융제재에 나선 것이다. 국제금융기관은 이 조치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마카오 당국은, 예금 인출사태로 BDA가 파산 직전에 몰리자 경영권을 인수하고 북한 관련 계좌 52개(2500만 달러)를 동결하였다. 북한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운영 중이던 골드스타 은행도 업무가 정지되었다. 북한 은행과 거래하면 애국법 311조에 저촉되어 미국의 금융기관과 거래를 할 수 없게 된다는 공포심이 확산되어가면서 북한은 정상적인 금융거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의 은행들도 북한 거래를 기피하게 되었다. ‘현금거래’가 아니면 무역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매년 10억 달러를 위조달러, 위조담배, 마약밀매, 무기수출 등 범죄로 벌어들이던 김정일 정권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런 가운데 그해 11월의 부산 APEC 총회에 참석한 부시 대통령이 경주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다. 필자는 이 회담 내용을 월간조선(月刊朝鮮) 2006년 1월호에서 이렇게 썼다.

<서울의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2005년 11월 경주에서 열린 韓·美 頂上(정상)회담 때 마카오 은행에 대한 미국의 금융제재 건은 당초 議題(의제)로 잡히지 않았었다고 한다. 외교부와 청와대 실무자들도 부시 대통령에게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답이 뻔할 뿐 아니라 두 나라 관계를 오히려 서먹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해 의제에서 빼버렸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이 무렵 미국의 제재조치가 단순한 금융사건이 아니라 對北 압박 전략의 일환이며 부시 대통령의 특명으로 이뤄진 사안이란 점을 잘 몰랐던 것 같다.   
頂上회담에서 盧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미국의 조치가 北京(북경) 6者회담에 장애가 된다면서 선처를 요청했다고 전한다. 부시 대통령은 “이것은 범죄행위에 관한 것이므로 북한의 불법 核개발을 다루는 6者회담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잘랐다는 것이다. 한참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부시 대통령은 盧대통령을 향해 “만약 북한이 한국의 지폐를 위조해서 유통시킨다면, 한국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정색을 하고 물었다고 한다. 화가 난 표정이었다고 전한다.  
盧대통령은 頂上회담 후 鄭東泳(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불러 자신의 역할을 설명하고 북한 측에 통보해 주도록 지시했다는 미확인 첩보도 나돌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의 대통령이 反국가단체의 국제범죄에 대해서 동맹국의 대통령을 설득하는 변호사役을 자임한 꼴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배석하였던 버시바우 미국 대사는 퇴임 후 이렇게 말하였다.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의 북한 계좌를 동결한 데 대해서 노무현 대통령은 크게 우려했습니다.
 兩國(양국) 정상이 이 문제를 놓고 심한 논쟁을 1시간 넘게 계속했습니다.
결국 경주 회담은 역사상 최악의 정상회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계속)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