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일성이 소련군 대위였다는 사실을 일제히 덮은 교과서

    이승만이 미군장교였다면 어떻게 썼을까?

  • 趙甲濟  
     
    좌편향 교과서들은 북한정권의 괴뢰적 속성과 대한민국 건국의 자주성을
    덮어 학생들이 남북한 어느 쪽이 정통성이 있는지를 혼란시키거나
    北에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가르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범죄행위라고 할 것이다. 
       
    <1945년 9월19일 김일성 일행을 태운 (소련 군함) 푸카초프 호가 원산항에 도착하였다.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 복장을 하고 있었고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 악수를 하면서 '김성주입니다'라고 인사하였다. 그의 왼쪽 가슴에는 赤旗훈장이 달려 있었다.>(孫世一, '이승만과 김구', 제6권)

    1945년 해방 이후 韓民族의 비극은 김일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소련군 대위로서 북한에 들어와 스탈린의 꼭두각시가 되어 소련의 이익을 위하여 봉사하게 되면서 재앙이 시작된 것이다. 북한정권의 수립도 스탈린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 감독한 것이다. 6.25 남침도 스탈린의 지원과 계획 아래서 이뤄졌다. 김일성의 본질을 잘 아는 건국 세대는 북한정권을 괴뢰, 또는 北傀(북괴)라고 불렀다. 李承晩은 김일성이란 이름을 거의 입에 담은 적이 없다. 김일성을 조종하는 이가 스탈린이라고 믿었으므로 김일성을 비판해야 할 때는 스탈린을 상대로 했다.

    반면 이승만은 美 국무부의 親蘇派로부터 견제를 받아 해방을 맞았는데도 귀국이 늦어졌다. 한국의 민심이 이승만을 갈구하는 것을 눈치 챈 미 군정 당국의 요청으로 귀국이 이뤄졌다. 김일성은 소련에 업혀서 북한에 들어오고, 이승만은 진짜 민중이 불러들인 차이가 있다. 김일성은 10대 중반부터 중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중국공산당에 들어가 만주에서 抗日빨치산 활동을 하였으나 日軍에 쫓기다가 1940년엔 소련 지역으로 넘어가 88여단 소속 소련군 장교가 되었다. 그는 조선과 너무 오래 멀어져 있었다. 소련군과 중국공산당을 위하여 복무하느라고 愛族 애국심도 잊었을 것이다. 그가 스탈린에 의하여 선택이 되고 소련군에 업혀서 들어왔을 때는 의식구조가 이방인이었다. 김일성이 우상숭배와 주체사상이란 변태적인 통치술을 내세우게 된 것도 자신의 출신이 소련의 괴뢰였음을 숨기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소련의 조종을 받아 북한정권을 세운 김일성과는 달리 이승만은 건국 과정에서 사사건건 미 군정 당국과 대립하였다. 美 군정 최고 책임자 하지 장군은 이승만을 여러 모로 견제하였다. 당시 미 국무부엔 엘저 히스 등 소련 간첩이나 공산주의자들이 포진, 이승만의 반공노선을 방해하였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미 군정당국 및 국무부와도 싸워가면서 건국을 지도하여야 하였다.

    이승만과 김일성의 차이, 김일성에 대한 소련의 압도적 영향력과 이승만에 대한 미국의 냉담한  자세, 그런 가운데 자주적으로 이뤄진 대한민국 건국과 소련에 의하여 철저히 관리된 북한정권의 수립 과정. 이 차이는 그 뒤 70년의 역사를 결정짓는 출발점이었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한국 현대사의 이 결정적 분기점의 성격을 거꾸로 가르친다.

    1. 거의 모든 교과서가 김일성이 소련군 장교였다는 사실을 숨겼다. 이승만이 미군 장교 복장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더라도 교과서는 이 사실을 쓰지 않았을까?
    2. 거의 모든 교과서가, 김일성을 北의 지도자로 선택한 이는 스탈린이었고, 소련군이 그를 철저하게 조종, 공산정권을 세우게 되었다는 점을 은폐하였다. 김일성이 공정한 선거를 통하여 수상으로 선출되었다는 식으로 가르친다(공산당 선거가 반대가 불가능한 원천적 부정선거임을 쓰지 않았다)
    3. 교학사를 뺀 거의 모든 교과서가 한반도 분단의 계기를 만든 1945일9월20일자 스탈린 지령문을 소개하지 않는다. 극동전선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와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 및 제25군 군사회의 앞으로 보낸 이 암호문에서 스탈린은 북한에 공산정권을 세울 것을 지시한다.
    9월 초 제25군 군사위원 레베데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슈티코프로부터 전통을 받는데 내용은 <김일성이 평양에 도착하면 그를 공산당에 입당시키고, 소련군 장교들로 구성된 경호원을 붙여 비밀리에 지방순회를 시키라>였다. 김일성을 꼭두각시로 세운 공산정권 수립 결정에 의하여 한반도는 38선으로 분단된다. 군사분계선을 사실상 국경선으로 만든 책임은 소련이 져야 한다. 이 결정적 문서가 공개된 것은 1993년으로서 이미 20년이 지났는데도 좌편향 교과서들은 소련의 분단책임을 덮고 미국에 떠넘기기 위하여 이 자료를 묵살한 것이다. 손세일 선생은 '이승만과 김구'(제6권)에서 <(스탈린의) 이 비밀지령은 한반도 분단을 고착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운명적인 지령이었다>고 썼다.
    4. 反헌법적인 민중사관으로 써진 교과서들은 反美-親蘇的 집필 성향을 보인다. 미군의 남한 통치를 점령군 식의 직접통치, 소련의 북한통치를 해방자로서 <행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긴 간접 통치>라고 왜곡하였다. 소련군의 북한통치는 김일성이란 꼭두각시를 앞세운 철저한 조종과 간섭과 지도와 관리였음을 외면한 역사 조작이다. 소련군은 로마넨코 소장 휘하에 민정사령부를 두고, 지방에는 경무사령부를 두어 북한공산주의자들의 조직활동을 완벽하게 조종, 통제하였다. 반면 미군은 남한에서 민주적 통치를 하려고 애썼으며(남로당이 불법과 폭동을 저지르기 전엔 활동을 허용하였다), 미국 노선에 저항하는 이승만을 탄압하지도 않았다. 대한민국 교과서라면 민주적 군정이었냐의 여부로 가치판단을 해야 하는데, 소련에 유리하고 미국에 불리한 기준으로 기술, 학생들에게 反美감정을 심으려 하였다는 의심을 산다.   
    5. 좌편향 교과서들은 북한정권의 괴뢰적 속성과 대한민국 건국의 자주성을 덮어 학생들이 남북한 어느 쪽이 정통성이 있는지를 혼란시키거나 北에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가르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범죄행위라고 할 것이다. 이들 교과서가 이승만과 미국을 主敵처럼 다루는 이유는 대한민국이 가진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인하기 위함이다. 남북대결의 본질은 민족사적 정통성과 삶의 양식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다. 한국사 교과서는 이런 대결에서 敵과 惡을 편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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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이승만을 귀국시켰나. 

    미국은 對日戰에 소련군이 참전하기를 바랐다. 그 代價로 소련이 만주와 한반도를 점령하고 지배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이 항복할 뜻을 미국측에 통보하자 딘 러스크와 본스틸 대령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한반도 지도를 참고로 하여 38선을 미군과 소련군의 점령지 분계선으로 하자고 소련측에 제안했다. 스탈린이 이 제안을 거절하고 “부산까지 소련군이 점령 관리하겠다”고 해도 미국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때 소련군은 만주를 장악한 데 이어 북한지역으로 넘어오고 있었으나 미군은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일본에 대한 美蘇 분할점령을 생각하고 있던 터라 덜 중요한 한반도에선 미국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남한이 공산화되지 않았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소련군은 소련군에 편입되어 있던 중국공산당 산하 抗日 빨치산 출신 장교 金日成을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발탁하여 1945년 9월 북한에 데리고 들어왔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일본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조선독립을 위해 싸운 적은 없다. ‘朝鮮戰爭’이란 책을 쓴 일본공산당원 출신 기자 하기와라 료씨는 “이때 김일성은 조선인의 의식을 갖지 않은 일종의 이방인이었다”고 지적했다.

    바로 이 시기 李承晩은 34년째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소련이 김일성을 데리고 북한으로 데리고 들어온 것과는 반대로 미국은 미래의 대통령이 귀국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李承晩은 1945년 초 흑해연안 얄타에서 있었던 회담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한반도를 소련에 넘겨주기로 스탈린에게 약속했다는 폭로를 한 적이 있다. 그 전부터 李承晩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태프트-가츠라 밀약을 통하여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를 묵인했듯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지배를 인정하려 한다고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여 親蘇的이고 좌경적인 인물들이 박혀 있었던 미 국무부를 화 나게 했었다.


    누가 李承晩을 불러들였나?

    李承晩이 주장한 얄타밀약설은 한참 뒤 회담록이 공개됨으로써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나 1945년 당시엔 미국측이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李承晩이 여행증명서를 받아 귀국을 준비하고 있을 때인 8월 하순부터 국무부와 합참은 여러 가지 트집을 잡고 이유를 달아 ‘反美的 인사’로 낙인찍힌 李承晩의 귀국길을 막았다. 미국 정부의 비협조로 李承晩은 서울까지 가는 교통편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10월1일자 메모에서 李承晩은 한국을 소련의 영향권안에 두기로 한 국무부내의 親共 분자들이 자신의 귀국을 방해한다고 썼다. 李承晩 연구가이기도 한 李庭植 교수(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명예교수)는 ‘해방전후의 이승만과 미국’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썼다.

    <증오와 절망감에 쌓인 채 당황하던 이승만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일면식도 없는 육군장교가 느닷없이 나타나 그의 귀국을 재촉했고 그를 서울로 보내준 것이다. 이승만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0월16일이었다>
    李 교수는 李承晩 귀국의 미스터리를 추적했다. 미 합참본부가 육군성 군사정보처 워싱턴 출장소장 앞으로 전보를 보냈다. <워싱턴에 살고 있는 이승만이란 한국인을 찾아 빨리 서울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부소장인 윌리엄 킨트너 대령은 부하 장교를 시켜서 수소문한 끝에 매사추세츠街의 사무실에 있던 李承晩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이승만을 귀국시켜달라고 요청했던 이는 남한 점령 미군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장군이었다. 하지는 李承晩과 상해 臨政 사람들이 귀국해야 한국의 혼돈상황이 정리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45년 9월13일자 하지 사령부 일일보고서는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이승만을 한국의 孫中山(孫文)으로 여기고 있다”고 했다. 李承晩은 남한의 좌우익 사람 모두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 중장은 인천에 상륙한 9월8일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말을 잘 하는 해군중령 윌리엄즈를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윌리엄즈는 비행기를 타고 대전, 광주, 대구, 부산 등을 돌아다니면서 민심동향을 파악했다.
    한국의 서민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빨리 데려오지 않는가?”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 있다는데 왜 모셔오지 않는가?”

    李庭植 교수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들은 해방과 독립을 동일시했고, 미군과 공산세력과의 갈등이 표면화하기 전이라 좌익도, 우익도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9월14일 좌익들이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 명단에 李承晩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순진한 한국인들은 해방되고 독립한 나라의 대통령이 李承晩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李承晩이란 이름은 오랫동안 많은 한국인의 가슴속에 ‘위대한 독립투사’라는 傳說的 이미지의 뿌리를 내려놓고 있었다.

    이런 民心보고를 받은 하지 중장이 본국에 李承晩을 귀국시켜달라고 건의했던 것이다. 나중에 李承晩을 싫어하게 되는 하지와 좌익이 그의 귀국을 도운 셈이지만, 근본적으론 李 박사에 대한 한국 민중의 존경과 지지가 그를 불러들인 원동력이었다. 無名의 金日成을 북한으로 데리고 들어와 전설적 김일성 장군으로 조작하여 꼭두각시로 부린 것이 소련군인 데 반해 미 국무부는 李承晩의 귀국을 막고 있었다. 그런 이승만을 조국으로 불러들인 것은 그에 대한 민중의 압도적 지지였다. 이런 출발의 차이가 그 뒤 남북한의 차이로 발전한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