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은 왜 주체성이 부족한가?

    趙甲濟 식 글쓰기(11)/에머슨, 미국인의 주체성을 모색하다

  • 趙甲濟   
      
       소로우의 하버드 대학 선배인 에머슨은 1837년 모교(母校)에서
    「미국 학자들」이란 제목의 강연을 했다.
    하버드 대학의 역사뿐 아니라 미국 지성사(知性史)에 남을 만한 연설이었다. 이 연설은 「知的인 독립선언」이라고 평가되었다.
    이 연설에서 에머슨은 「미국 지식인들은 유럽문화에 대한 외경심을 버리고 우리의 세계를 탐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진(先進) 유럽문화에 대한 事大的 동경심을 극복하고 자신의 문제를 主體的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이야기였다.
    그는 1841년에 쓴 「자주(Self-Reliance)」라는 제목의 수필에 미국 개인주의 정신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명언들을 많이 남겨 지금도 이 글은 미국 젊은이들의 필독 문헌이 되고 있다.
      
       자아의 발견이 없는 朱子學
      
       「남자가 되고 싶거든 非동조자가 되어야 한다. 최후까지 신성한 것으로 남을 것은 당신의 마음, 그 고귀성뿐이다. 이 世俗에서 시류(時流)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은 쉽다. 고독 속에서 나 자신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도 쉽다. 참으로 위대한 인간은 군중의 한가운데에서 고독하게 홀로 서는 것의 달콤한 맛을 아는 사람이다. 남에게 바보처럼 동조(同調)만 하는 행위는 철없는 정신적 허깨비짓이고 왜소한 정치인, 철학자, 성직자들이 좋아하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단호하게 말하라. 내일이 되면 그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단호하게 말하라. 비록 내일 말할 것들이 오늘 말한 것과 완전히 모순된다고 해도 솔직하게 말하라. 위대함은 오해받는 데서 출발한다.」
      
       에머슨은 청교도 聖職者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 자신도 한때 목사였다. 30세 이후에는 수필가, 詩人, 대중 강연가로 활동했다. 그는 주로 미국의 미래에 대한 낙관, 자주(自主), 인간이 가진 엄청난 잠재력을 主題로 삼아 강연했다. 그는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으로는 도달할 수가 없다고 본, 인간본성의 깊은 곳에 있는 정신의 핵심을 꿰뚫고 들어가서 自我를 발견할 때 인간은 비로소 超人的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에머슨은 초월주의자(Transcendentalist)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불교나 힌두교의 신비주의와 범신론(汎神論)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에머슨과 소로우의 사상에서 우리는 명상에 의한 자아(自我)의 발견이 美國知性의 주체성 확립과 연결되는 논리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많은 종교는 명상을 중요한 의식(儀式)으로 하고 있다. 기독교와 샤머니즘에서는 그것이 기도이며 불교에서는 참선이고 힌두교에서는 고행(苦行)이고 명상이다. 이 명상과 기도는 神에게 단순히 도움을 호소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자신과의 대화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이 명상은 인간의 한계를 초극(超克)하는 힘을 갈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의 조건을 초극하는 前단계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대체로 그 자각은 사생관(死生觀)의 정립으로 나타난다.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세워진 1392년 이래 약 600년간 한국사회의 지배적 문화, 그 정치적 이데올로기이자 생활규범이었던 주자학(朱子學)에는 이 명상의 儀式이 없다. 주자학이 인간수양의 방법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古典의 독서이고 정교한 예절이다. 이 독서는 지나간 시대의 저술을 반복적으로 읽어 暗記하는 수준이었다. 예절은 기본적으로 他人을 의식하는 것이지 自我를 발견하는 데는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다.
      
       주자학은 자아발견, 절대자와의 대화가 없는 이념이란 점에서 종교로 분류하기는 어렵고 규범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 지성사(知性史)의 비극은 규범철학을 들여와서 종교처럼 절대화하여 우상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점일 것이다. 주자학의 교조화(敎條化)는 우리나라 지도층 문화에서 깊은 명상과 자기성찰의 습관을 없애버렸다. 神, 자연, 우주와 같은 절대적 존재와의 관계보다도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더 중시하게 되면 그 무엇을 놓치게 된다. 朝鮮朝 지배층에서는 결여되고 新羅와 日本의 지배층에서는 볼 수 있는 것이 명예심에 기초한 死生觀이다. 이것은 신라와 일본의 엘리트들이 샤머니즘과 불교 속에서 명상과 기도를 생활화하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생관의 기초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아는 자각이며 인간생명에 대한 입장의 정리인 것이다. 확실한 死生觀은 생명을 가볍게 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더 소중하게 보면서 그것을 보다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바치겠다는 결심인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통일기(期)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국가, 전우(戰友), 통일 대업과 같은 공익(公益)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武士들의 사례가 많이 소개되어 있다. 마치 일본 武士들 이야기를 읽고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관창(官昌)과 비녕자(丕寧子) 같은 젊은 이들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던지는 모습은 아름답다. 나는 신라의 샤머니즘과 불교, 일본의 선종(禪宗)과 차(茶)문화가 이런 사생관에 도달하는 길잡이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샤머니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과 우주와 대면하도록 하고 참선(參禪)은 자아발견을 위한 깊은 명상이며 일본 지배층의 茶문화는 일상 속에서 정신을 정화시키는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기도하는 金庾信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국통일의 원훈(元勳) 金庾信은 기도를 통해서 초인적(超人的)인 힘을 빌어오는 모습을 자주 보이고 있다. 金庾信은 15세기에 화랑(花郞)이 되어 일군(一群)의 젊은 인재들을 거느리게 된다. 17세기에 그는 중옥(中獄)의 석굴(石窟) 속에 들어가 기도를 시작한다.
      
       『무도하게도 해마다 우리 강토를 침략하여 화란(禍亂)을 가져오는 적을 없앨 힘을 나의 손에 빌려주십시오.』
      
       기도한 지 4일 만에 한 노인이 나타난다. 김유신은 『저는 나라의 원수를 보면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쑤시는 까닭에…저의 정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방술(方術)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말한다. 난승(難勝)이라는 이 노인은 비법(秘法)을 가르쳐 주면서 『이것을 삼가하여 쓰되 망녕되게 전하지 말라. 만약 이를 불의(不義)에 쓰면 앙화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다음해 김유신은 다시 골짜기로 들어가서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맹세하고 기도하니 「하늘에서 갑자기 영광(靈光)이 내려 그 보검(寶劒)에 실리고 3일째 되는 밤에는 허성(虛星)과 각성(角星)의 두 별빛이 아득히 빛나며 칼에 내려드리우니 보검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김유신의 이런 기도는 인간과 우주를 연결하는 매개이고 대화이다.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사회관계에서 얻을 수 없는 보다 본질적이고 초월적인 그 무엇을 인간은 절대자(우주, 하늘, 신)와의 대화를 통해서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의지의 강화, 사생관의 확립, 주체성의 정립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우주 속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와 좌표를 확인하는 기도와 명상이 지배층의 문화로 정착된 나라에서 주체성 있는 인간이 길러지고 이들이 모여서 자주적인 나라가 건설되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발견한 「프라이버시」라는 것도 그런 주체성을 체험하고 실천하는 공간인 것이다. 보스턴에서 만난 50대 초반의 한 한국인 교포는 『국민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 방에 들어갈 때 노크를 하지 않았더니 「아빠, 노크를 하시고 들어오셔야지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뒤에는 어린 아들이라도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프랑스의 정치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1830년대에 미국을 여행하고 쓴「미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인들로부터도 「우리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쓴 책」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에는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던 이 新生국가의 生動하는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토크빌이 여행했을 때는 미국이 독립한 지 50여 년 되던 시기였다. 토크빌은 미국의 대통령 선거 등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음모는 더욱 활발해지고 선동은 더욱 결렬해지며 확산된다. 온 나라 전체가 열병에 걸린 것처럼 되고 신문과 대화에서는 선거가 일상적 주제(主題)가 되며 사람들의 모든 언동과 생각은 이 주제에만 쏠려 있는 것 같다. 결과가 공표되면 열정은 흩어지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 조용해지며 둑을 넘었던 강물은 다시 내려앉는다. 그러나 이런 폭풍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경탄할 만한 일이 아닌가?」
      
       「미국인들은 이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일의 결정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나라를 누군가가 비판하면 조국을 옹호하는 것을 의무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비난당하고 있는 것은 미국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서는 다음 두 가지 가운데 택일(擇一)을 해야 한다. 즉, 모든 사람들의 애국심이냐, 아니면 소수의 정부이냐. 왜냐하면 우리는 전자(前者)가 가져오는 사회적 활력과 저력을 후자(後者)가 가져오는 정적(靜寂)과 동시에 결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토크빌의 미국 紀行
      
       토크빌은 유럽의 왕정하(王政下)민주주의의 조용함과 미국의 소란스러운 대통령 직선제를 비교하면서 後者의 장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열광적인 정치참여에 따른 소란스러움을 혼란으로 보지 않고 활력(活力)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1996년 미국 대선(大選)의 투표율은 40%였다. 1930년대 이후 가장 낮았다. 이것을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로 해석하는 평가도 많았다.
      
       나는 메인州의 포틀랜드市에서 「외국기자가 본 미국선거」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자랑한 것은 한국 대통령 선거의 열광적 분위기와 높은 투표율이었다. 1990년대의 한국 정치 풍토는 1830년대의 미국과 닮은 점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참고로 클린턴이 재선(再選)에 성공한 것은 여자표와 흑인표 덕분이었다. 남자 유권자 중에서는 밥 돌과 클린턴이 비슷했고 백인들 가운데서는 돌이 46%, 클린턴이 43%였으나 흑인들에게선 클린턴이 83%, 돌이 12%를 득표했던 것이다.
      
       내가 하버드에서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미국 사회에서 시민의 참여가 줄어들고 있다」는 걱정이었다. 퍼트남이란 교수는 「혼자 하는 볼링」이란 제목의 책에서 미국사회의 인간접촉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종국적으로는 경제적 위기로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퍼트남 교수는 인간관계가 끈끈한 사회에서 작동하는 정부나 기업은 생산성과 효율성이 높다는 이론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北이탈리아와 한국을 그런 나라로 꼽기도 했다. 인간적 접촉이 많은 사회에서는 신뢰관계가 형성되기에 조직의 기능이 효율적이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연(地緣) 학연(學緣) 혈연(血緣)을 따지는 지나친 私的 인간관계가 公的인 윤리를 저해하고 있는 면이 있다. 인간접촉의 빈도도 중요하겠지만 그 인간관계가 어떤 가치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할 것이다.
      
       토크빌이 관찰한 미국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오늘날의 한국인에 대해서 쓴 글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가끔 했다. 물질적인 목표를 향해서 물불 안가리고 매진하는 점에서 19세기 초반의 미국인과 20세기 후반의 한국인은 닮은 구석이 많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풍요의 한가운데에서 행운을 누리면서도 불만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경탄할 만한 장관(壯觀)이다. 이 세상의 좋은 것들에만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항상 조급한 법이다. 그들이 그 좋은 것들은 찾아내고 차지하며 즐기는 데는 항상 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인생이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힌다. 미국사람들이 끊임없이 (인생의) 진로(進路)를 수정하는 것은 행복에 이르는 최단거리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젊은 시절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는 『왜 이렇게 날이 더디게 밝는가』하고 하늘을 향해서 신경질을 내곤 했었다고 한다. 일하고 싶은 욕심과 충동으로 안절부절 못했다는 「왕회장」형(型)의 사람들이 19세기 초의 미국에도 많았다는 뜻일 것이다. 서부개척시대가 열리고 산업이 발달하여 나라가 온통 용광로처럼 뜨거운 활기를 보이고 있을 때 소로우와 에머슨은 고독 속에서 국민들의 주체성과 미국의 知的인 자주성을 강조하고 다녔다. 물질적인 풍요와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자칫 놓치기 쉬운 가치관과 철학적 기조를 이들은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윤리와 청교도 정신의 통합을 통해서 상호견제하되 생동하면서 부패하지 않는 미국식 발전 모델을 만들어내게 된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항산(恒産)과, 종교와 철학이 만들어내는 항심(恒心)을 균형 있게 결합할 수 있는 나라나 사람은 주체성의 소유자여야 한다. 기자가 하버드 생활중에 모처럼 혼자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얻어 하나의 화제(話題)로 삼았던 단어가 이 주체성이었다.
      
       미국에서 기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소년에게서도 주체성을 느낄 수가 있었다. 주체성의 한 잣대는 자신의 주장을 당당하게 발표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 소년들은 도무지 만만해 보이지가 않았다. 미국의 개인주의는 이런 주체성에 기초하고 있기에 이기주의처럼 사회와 국가를 파괴하지 않고 모일수록 큰 힘을 내는 것이다. 주체성을 가진 인간은 자존심이 강한 만큼 남을 존경할 줄 안다. 自慢한 인간이 남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자만은 교양이 부족한 자존심이라 할 것이다. 우리 문화에 왜 주체성이 부족하고 사대성이 지식인들의 핏줄 속에서 고질적인 흐름으로 자리잡았는가 하는 의문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기자는 한 世代 전에 꼭 같은 고민을 했던 한국인을 발견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