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류근일 칼럼>
     
                               카뮈의 '페스트', 한국의 메르스
     
     네팔 지진 같은 자연재해와 에볼라·사스·메르스 같은 역병(疫病) 앞에서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묻는다.  "웬 날벼락이냐?"
    그리고 그 '날벼락'이 왜 하필이면 나한테, 우리한테 떨어졌느냐고 탓한다.
    하지만 재해와 역병, 즉 고통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고통의 무차별성과 불가피성이야말로 인간의 실존(實存) 그 자체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는 그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 인간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물은 작품이다.
     거기서 그는 페스트가 엄습한 알제리의 해안 도시 오랑,
    그리고 그 안에 갇혀버린 다양한 캐릭터를 불러 세운다.
    주인공이자 서술(敍述)자인 의사 베르나르 리외,
    그리고 그의 지기(知己)가 된 휴양객 장 타루는
    "지는 싸움이라 할지라도 결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왜? "왜는 모른다. 다만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들이 치료를 요한다는 것만 알 뿐이다. …
    관심 있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살고 죽는 일'이다. …
    사랑 없는 세상은 죽은 세상…
    때로는 직업과 직무의 감옥에 식상한 채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사랑하는 마음의 따스함과 경이로움만을 소망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래서 그런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고통스러운 여건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장 타루는 자원봉사대를 이끌다가 끝내는 역병에 걸려 숨을 거둔다.
 
 그러나 '페스트'에는 이런 윤리적 캐릭터들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오랑시 당국의 고위 관료 오통은 리외의 비상시국 경고에도 시간을 질질 끌다가
골든타임을 놓쳐버린다. 봉쇄망을 넘나들며 재미를 톡톡히 보는 밀수꾼 코타르드,
고통에도 신(神)의 선의(善意)가 있다고 설파하다가
한 어린이의 죽음 앞에서 할 말을 잃는 예수회 신부 파넬루,
처음엔 도시를 탈출하려 했으나 나중엔 자원봉사대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는
파리의 신문기자 레이몽 랑베르 등 여러 타입이 출현한다.
 
 한국을 강타하고 있는 메르스 사태에서도 비슷한 유형들이 이미 출현했다.
현장에서 분투하다가 병마에 치인 의사와 간호사들,
머뭇거림으로 타이밍을 그르친 당국자들,
 "너 때문이야"라고 정적(政敵)을 나무란 정치인들이 있다.
에볼라 사태 때 미국에서도 일부 공화당 정객은 "오바마가 잘못해서…"라며 역병을 정치화했다.

우리의 메르스 사태에서도 박원순 서울시장은
'오밤중 깜짝 기자회견'으로 박근혜 정부의 '늑장 대응'을 '과잉 대응'으로 대치하겠노라 했다.
"정부가 오죽 빌미를 줬으면…" 아니면 "이 판에 재미 보자는 거냐?"라는 논란이
메르스 이슈를 덮었다. 그러나 누가 더 잘했건 잘못했건
사태의 정쟁(政爭)화는 고통받는 당사자들에겐 아무 보탬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초기적 혼미(昏迷)에서 벗어나
이 고통을 어떻게 봐야 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국민적 공감을 모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우리가 이룩한 발전 뒷면의 허점을 돌아봐야 한다.
무엇을 믿고 그러는지 알 수 없는 우리의 불가사의한 무사태평, 무심함, 무감각이 바로 그것이다.
보건 의료와 공중위생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일례로 우리는 북한 핵(核)의 위험성을 얼마나 실감하고 사는가?
정치인들과 당국자들이 이 문제를 두고
"국민 여러분, 우리의 생사가 걸린 엄중한 사태입니다. 이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이렇게 한없이 안일해도 괜찮은 것인가?
메르스에 대해서도 '꽝' 하고 당한 다음에야 비로소 '어마 뜨거워' 한 것 아니었나?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우선 악의(惡意)를 걷어내야 한다.
고통은 때로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것을 둘러싼 악의다. 박원순 시장에게 "나는 메르스를 퍼뜨리지 않았다"고 항변한 의사 환자가 중태에 빠지자
'주×× 잘못 놀린 그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 악플들,
어떤 환자가 메르스 아닌 암으로 사망했는데도 장례식장 대여를 사절한 일부 병원,
자기네 병원이 아닌 "국가에 구멍이 뚫렸다"고 강변한 삼성서울병원 당국자가 그런 사례다.

카뮈는 그래서 베르나르 리외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악의는 언제나 몽매(蒙昧)함에서 온다.
선의(善意)도 계몽됨이 없이는 악의와 똑같이 파괴적일 수 있다.
몽매함은 모든 걸 다 안다고 자만한다. 자만은 자신에게 살인의 권한까지 부여한다.
 명징(明澄)한 안목 없이는 선(善)이 있기 어렵다."

메르스 사태는 우리 주변에 떠도는 악의, 즉 몽매함을 떨쳐버릴 계기로 다가왔다.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