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대하사극 ‘징비록’서 ‘혁신 리더’ 류성룡 역 맡아 열연‘왕 전문 배우’ 김상중, 최초로 임금 앞에 무릎 꿇고 머리 조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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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른대로 대지 못하겠느냐?

    으악, 으악..


    문경새재의 차가운 날씨 속에 비명소리가 새파란 하늘을 찌른다.

    추국(推鞫)장면을 연기하느라 상반신을 노출하고 양손을 밧줄에 매단 배우, 봉두난발에 피 칠갑을 한 배우, 인두로 허벅지를 지져 신음소리를 내는 배우들로 촬영장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1월 중순 ‘징비록’이 본격 촬영 중인 경북 문경 왕건세트장을 찾았다. 기축옥사(己丑獄事)의 도화선이 된 정여립 모반사건의 연루자들을 추국하는 장면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위관 정언신(박칠용 분)이 류성룡(김상중 분)과 이산해(이재용 분)가 지켜보는 가운데, 고문으로 피투성이가 된 죄인들을 심문하고 있었다.

    긴박한 순간, 촬영에 몰두하고 있는 배우 김상중을 어렵게 만났다. 서애 류성룡 선생 역을 맡은 김상중은 특유의 차분한 말투로 KBS 대하사극 ‘징비록’에 출연하게 된 소감을 밝혔다.

    사극은 재미와 감동은 물론이거니와, 교육적인 의미도 크다고 봅니다. 이번 류성룡 선생의 이야기를 통해서 진정한 리더의 모습은 무엇이고, 당시 임진왜란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점, 반성할 점은 무엇인지 재조명할 수 있다는 게 저에게는 무척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표정만큼이나 진지한 대답이 나왔다. 김상중의 교과서적인 소감은 이어졌다.

    이 시대에 왜 류성룡 선생을 재조명해야 하는지 이 드라마를 통해 알게 되실 겁니다. 선생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고, 여러 문헌과 참고서적 등을 통해 선생의 발자취를 밟아 나갈 생각이에요. 선생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바꿔 말하면 ‘참 재미가 없는 사람’입니다. 선생의 조용한 카리스마, 진정한 리더십을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진지 모드’는 여기까지였다. 김상중은 “사극의 가장 큰 애로점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것인데, 이번에 처음으로 왕이 아닌 신하 역을 맡아보니 추위보다 더 힘든 게 있었다”며 “바로 왕과 연기할 때 계속 무릎 꿇는 일”이라고 너털 웃음을 지었다.

    무릎 꿇고 있는 게 힘들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게 됐어요. 다음에 사극 제안이 들어오면 왕 아니면 하지 않겠다고 해야할까봐요. 하하.


    김상중은 “무릎 꿇는 것도 힘들지만, 계속 서 있어야 하는 고충도 간과할 수 없다”면서 “솔직히 김태우(선조 역)가 부러워서 카메라 밖에선 더욱 짓궂게 군다”는 농을 건넸다.


  • 알고보면 광종, 효열태자 이수, 고종 역 두루 거친 ‘임금 전문 배우’
    선조 역 김태우와 ‘찰떡 궁합’ 연기 호흡‥“선조야!” 농담 건네기도


    실제로 김상중은 KBS 대하드라마 ‘제국의 아침’과 MBC 퓨전사극 ‘궁’, 영화 ‘한반도’ 등에서 광종, 효열태자 이수, 고종 역을 두루 거친 임금 전문 배우다. 

    이처럼 사극에선 언제나 ‘근엄한 왕’으로 출연해 온 그였기에, 임금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김상중의 모습은 왠지 낯선 느낌마저 준다.

    줄곧 높은 옥좌에 머물다 바닥으로 내려온 자의 심정은 어떨까? 비록 극 중 상황이긴 하나, 그도 ‘용상의 자리’가 내심 탐이 나는 모양이다.

    ‘징비록’에서 조선의 14대 왕 ‘선조’로 출연하는 김태우는 “제가 왕을 맡은 터라 선배님들께서 소위 ‘왕대접’을 해주시는데, 유독 한 분만 ‘선조야!’라고 부른다”며 “연기할 때 더욱 혹독하게 대해야겠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다른 연기자들은 서 있거나 무릎을 꿇고 있는데 저는 어딜 가나 용상이 있어서 육체적으로 매우 편합니다. 가끔, 대신 중에 한 명이 건방지게 자꾸 용상에서 나오라고 해요. 자기가 쉬겠다고…. 저보다 선배인데, 언제 날 한 번 잡아서 혼낼 생각입니다. (웃음)


    임금님 앞에서 건방을 떠는 배우는 다름아닌 김상중. 그는 김태우의 폭로에 “대체 그런 행동을 하는 자가 누구냐?”며 되레 한 수 위의 농담을 던진다.

    김상중과 김태우는 사석에서 이같은 농담을 스스럼 없이 건넬 정도로 막역한 사이다. 

    지난 96년 김태우가 KBS 공채탤런트로 합격한 뒤 ‘목욕탕집 남자들’ 촬영장을 방문해 김상중의 사인을 받았다는 인연은 이미 잘 알려진 에피소드다. 그리고 2년 뒤 드라마 ‘거짓말’에서 한 차례 연기 호흡을 맞춘 뒤, 17년 만에 한 작품에서 재회한 두 배우는 촬영 현장에서 최고의 친밀도를 자랑하고 있다는 게 제작진의 전언이다.

    김상중은 “선조와의 연기 호흡이 좋고 즐겁다”며 “이러한 호흡에서 나오는 남자들의 정치적 수싸움과 긴장감이 ‘징비록’의 포인트이자 재미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두 사람의 남다른 호흡은 지난 방송분에서 진가를 드러냈다. 이날 ‘징비록’ 2화에서 류성룡(김상중 분)과 선조(김태우 분)는 신하와 임금의 사이를 뛰어 넘는 서로에 대한 신뢰를 보여줬다. 

    역당들의 서찰에 이름이 언급됐다는 이유 하나로 역모 관련자로 의심을 받아 절체절명 위기에 빠진 류성룡. 정여립의 반란으로 동인들의 옥사가 이어지자 그는 “신하된 자로서 그 죄를 죽음으로 묻겠다”며 자신을 결박한 채 맨발로 추국장에 들어섰다.

    그의 뜻을 헤아린 선조는 “성인이 인재를 쓰는 방법은 목수가 재목을 쓰는 것과 같다는데, 몇 자쯤 썩었다고 한 나라의 관서를 쉬이 버릴 수 있겠냐”며 자신의 신발을 벗어 류성룡에게 신겨줬다. 서로의 깊은 심중을 헤아리며 신뢰를 확인한 명장면이었다.

  • 8년째 ‘그것이 알고 싶다’ 진행‥“그런데 말입니다” 유행어 낳아
    네티즌 “김상중이 대사만 읊어도 ‘그것이 알고 싶다’ BGM 환청”


    이처럼 스케일이 다른 남자들의 묵직한 열연과 ‘케미스트리’가 안방극장을 장악하면서, 각종 SNS와 드라마게시판에도 뜨거운 반응이 연일 이어졌다. “배우들의 연기가 더할 나위 없다.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며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는 역사, 그야말로 ‘징비록’이 전하는 메시지가 날카롭다. 말 그대로 진짜 명품사극이다”라는 평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OCN 드라마 ‘나쁜 녀석들’ 종영 후 곧바로 ‘징비록’에 출연하게 된 김상중은 “류성룡 선생의 정적인 모습에서 동적인 모습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는 숙제를 안고 시작한 작품”이라며 “첫 촬영 때 류성룡 선생이 무슨 말이라도 해줄까 싶어 징비록을 쓰셨던 생가에 앉아 있었는데 아무 말도 안들렸다”는 에피소드를 전하기도.

    우스갯소리로 한 얘기였지만 류성룡이란 거인(巨人)을 배역으로 맡은 김상중은 그만큼 큰 부담감과 책임감을 갖고 연기에 몰두하고 있다.

    일례로 지난 주말 방송된 녹화분을 보면 목소리 하나하나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이 느껴진다.

    김상중은 지난 5일 여의도동 63빌딩에서 열린 ‘징비록’ 제작발표회에서 ‘말투’에 대한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다. ‘사극 톤’과 ‘그것이 알고 싶다’의 말투가 비슷하다는 지적에 “심히 걱정이 된다”는 얘기였다. 

    김상중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2008년부터 8년째 진행하고 있어 역대 진행자 중 최장 기간을 기록 중이다. “그런데 말입니다”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김상중은 해당 프로그램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된지 오래다. 심지어 김상중이 무슨 대사만 읊어도 ‘그것이 알고 싶다’의 BGM이 들린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

    이에 김상중은 “드라마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 말투가 나왔다면 무릎 꿇고 반성하겠다”면서 “다만, 사극 톤은 이래야 된다는 식의 선입견은 버려달라”고 당부했다.

    선배 배우들이 이뤄 놓으신 일종의 사극 톤과 무게감은 분명히 있습니다. 현대극처럼 톤을 날려선 안 되겠죠. 이런 톤이 ‘그것이 알고 싶다’와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선입견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이 모든 건 제가 극복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회분에서 ‘선 굵은 열연을 펼쳤다’는 시청자들의 호평이 이어진 것은 김상중이 남다른 고민과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징비록’이 방송 수회 만에 ‘명품사극’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도 김상중과 주연 배우들의 메소드 연기 덕분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임진왜란 7년간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자 했던 ‘혁신 리더’ 류성룡의 생애를 김상중이 어떻게 그려나갈지 시청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 조광형 기자 ckh@newdaily.co.kr
    [자료 제공 = KBS 홍보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