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당 점령한 운동권

     
  • 문재인 새민련’의 탄생은 무엇을 함축하는가?

    야당이 완전히 60~70~80년대 이래의 급진운동권, ‘민주당+통진당’ 연대 세력, 그리고 이른바 ‘시민사회 운동’ 출신들의 손아귀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지원 후보를 찍은 41%는 비록 박빙의 차이이긴 하지만, 왕년의 주류에서 이제는 비주류로 밀려났다.
    ‘김대중 민주당’ 시절엔 그들 동교동계와 중도개혁파가 당내 주류였다.
    운동권 출신들은 그 주류의 발탁을 받아 야당에 들어온 신참병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발탁 받던 자들’이 오히려 신(新)주류로 올라서서 자신들을 스카웃 한 왕년의 주류를 쫓아내고 있는 꼴이다.
 
이렇게 해서 오늘의 한국 정치지형은 ‘보수여당 vs. 보수야당'의 대치(對峙)도 아니고 ’보수여당 vs. 자유주의 야당‘의 대치도 아니며 ’자유주의 여당 vs. 중도개혁주의 야당‘의 대치도 아니다.

문재인 당대표의 야당이 탄생하는 것을 계기로 오늘의 한국 정치지형은 ’기회주의 여당 vs. 운동권 야당’의 대치로 짜이게 되었다.
 

  • 과연, 문재인 대표는 당선 직후 연단에 높이 서서 운동권 아바타답게 “박근혜 정권에 전면전을 선포 한다”고 사자후(獅子吼)를 토했다.
    그리고 새로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면면을 보아도 ‘전대협 의장님’ 출신들이 여기저기 창검 든 사천왕(四天王)들처럼 서있다.
     
    그렇다면 이런 정치지형은 앞으로 어떤 정세를 조성할 것인가?
    야당의 국민적 보편성은 갈수록 더 좁아질 것이다.
    야당은 다양한 국민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두루 포괄하는 국민정당 노선에서 더 멀어져, 운동권 노선을 편향되게 추구하는 전투적 이념정당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더 커졌다.
    이것은 한국정치가 앞으로 ‘중도 수렴(收斂)’보다는 첨예한 흑백대결로 질주할 개연성을 훨씬 더 높여주었다.
     

  • 새누리당은 야당의 그런 ‘급진 화(化)’로 앉은 자리서 득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보십시오, 국민여러분, 저런 위험한 외곬 야당에게 여러분의 미래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겠습니까?” 라고 ‘고발’ 하는 것만으로도 여당은 ‘야당의 지나침’의 반사효과를 쏠쏠히 볼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앞으로 우리 정국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의 하늘을 떠받들면서 그 아래서 여, 야가 선의의 방법론적 다툼을 하는 모양새가 되기보다는, 대한민국 70년사의 정당성과 정통성 자체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근본적인 싸움이 더 본격적으로 불붙는 형국이 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새누리라는 자들이 이런 가치투쟁에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새누리 군상(群像)들은 문자 그대로 철학도 없고 사관(史觀)도 없는 몰(沒)가치 집단이기 때문에, 특정한 철학과 사관과 신념체계로  투철하게 무장한 이념집단이 착검(着劍) 한 채 “돌격 앞으로!” 하고 달려들 때는 항상 꼬랑지를 사타구니에 팍 쑤셔 박곤 했다.
    촛불 폭란 때의 이명박 대통령의 ‘아침이슬론’과 한나라당 겁쟁이들의 비루한 투항주의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김무성 방식’은 ‘문희상 방식’이나 ‘박지원 방식’과는 어찌어찌 서로 이해가 맞아 떨어졌었다.
    그러나 '운동권 방식' 앞에서는 “아이쿠!” 소리를 내며 코피를 쏟을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가 그들이라면 ‘김무성 연파(軟派)’쯤은 그냥 깔아뭉개버릴 것 같으니 말이다.
    ‘무대 씨’에 대한 지나친 과소평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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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3년 동안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이 있을 경우, 그것은 그래서 박근혜 정권이나 새누리 군상들이 알아서 감당하려니 하고 믿고 있을 일이 아니다.
    그들은 그런 역사적 인식과 사명감 자체가 박약하다.
    시민사회의 자유민주주의 애국역량의 소임이 더 막중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