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戰作權(전시작전통제권)을
    군사주권이라고 선동하는 이들



  • 류근일 /언론인, 뉴데일리 고문

    이승만과 김구. 1945년 8월 광복 후 이 두 거인(巨人)은
    서로 등을 보이며 반대 방향으로 갔다.
    한 사람은 대한민국 건국으로,
    또 한 사람은 '단독 정권(대한민국)' 수립 반대로.
    그리고 70년이 흘렀다.
    남은 것은 이승만 노선과 김일성 노선의 둘뿐
    김구·김규식·남북협상파 노선은 휴전선 양쪽에서 다 사라졌다.
    이게 '해방 70년사'의 움직일 수 없는 기정사실이다.

    이 기정사실은 그러나 휴전선 이북에서는 확고하게 굳어졌는데
    휴전선 이남에서는 그러지 않았다는 데에 한국 정치의 아이러니가 있다.
    대한민국이 선 지 69년이 지났는데도,
    그래서 그 나라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개최할 정도로 컸는데도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노선이 옳은가, 김구의 남북 협상 노선이 옳은가?"라는
    '선사(先史) 적' 싸움이 툭하면 재연(再燃)하곤 한다.
    그것도 사극(史劇)이 아닌 국회에서까지.

    이건 무얼 뜻하는가?
    우리 정계와 지식인 사회 일각엔 아직도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에 대한 불복(不服)이 끈질기게 꿈틀거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불복 심리가 '이승만 죽이기'와 '김구 띄우기'로 연출되는 것이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노선은 '분단 악(惡)'이고,
    이에 반대한 김구의 남북 협상 노선만이 '통일 선(善)'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는 중대한 사실 오인(誤認)이다.

    분단은 북쪽의 인민위원회 1당 독재가 먼저 시작했다.
    이승만은 그에 대응해 '가능한 지역이나마' 자유 체제로 건지려 한 것뿐이었다.

    1948년 4월 19~23일 평양에서 있었던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한
    김구 등의 '통일적 민주 정부론'을 짓밟은 장본인도 이승만 아닌 김일성이었다.

    김구·김규식 등 남북협상파는 남과 북의 일대일 협상을 기대하고 평양에 갔다.
    그러나 회의장에 가보니 그들은 수많은 공산당 외곽 단체 틈에 섞인 '여럿 중 하나'였다.
    회의는 공산당이 짜놓은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남쪽 참석자들은 발언 한 번 변변히 하지 못했다.
    4월 30일에야 남북협상파의 입장이 반영된 '전(全) 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
    공동 성명'이라는 문건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성명은 이랬다.
    '외국군이 철거한 후에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이 정부는 일반적·직접적·평등적·비밀 투표로 통일적 조선 입법 기관 선거를 실시할 것이며,
    조선 헌법을 제정하여 통일적 민주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남북을 통틀어 자유선거를 실시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헌법을 만들어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성명에 김일성은 뭐라고 반응했을까?
    "엿장수 마음대로?" 하며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는 이미 소련 점령군 사령관 스티코프의 지령에 따라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닌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을 착착 진행시키던 참이었으니까.
    김일성에게 남쪽의 남북협상파는 그들이 평양에 오기까지만 유용했을 뿐
    그 이후는 필요 없었다.

    이렇게 해서 김구·김규식 등 남북협상파의 '통일 민주 정부' 여망은
    서울이 아닌 평양에서 폐기 처분당했다.
    그래서 거듭 확인해야 한다.
    "김구 등의 통일 충정을 실컷 이용만 해먹고 차버린 악당은 이승만이었나 김일성이었나?"
    김일성이었다. 이게 그때의 사실이자 진실이다.

    김구·김규식의 두 리더는 그래서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의 특사 유어만(劉馭萬)의 설득대로
    김일성의 '남북 협상 쇼'에 말려들기보다는
    이승만과 함께 반(反)전체주의 자유 진영을 짰어야 한다.
    그리고 다퉈도 그 안에서 다퉜어야 한다.
    그러나 김구는 이를 사양하고
    "소련이 북조선군(軍)을 남진시켜 인민공화국을 선포할 것"이라는
    당장의 대세(大勢)론에만 잠겨 있었다.
    민족주의의 화살이 정곡(正鵠)을 비켜 가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정곡을 비켜가는 민족주의 화살이 지금도 곧잘 있다는 사실이다.
    한·미 FTA를 '이완용 짓'이라고 몰아붙이더니,
    이번엔 또 전작권(戰作權) 전환 연기를 '군사 주권 포기'
    '제2의 을사늑약'이라고 매도하는 소리가 들린다.
    야당으로서 이견(異見)은 말할 수 있지만 가장 확실한 전쟁 억지 장치를
    그렇게 '대외 종속'이라고 터무니없이 때려잡는 것은
    1980년대 NL(민족 해방) 운동권의 초짜들이나 하던 짓이다.
    이런 용어 과잉, 남발은 노무현 시대로 끝났어야 한다.
    이 시대의 민족주의는 '글로벌 민족 이익 추구'로 새롭게 정의(定義)돼야 한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