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朴正熙(박정희)를 살려준 金安一(김안일) 최후 인터뷰

    “朴正熙소령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남로당조직 명단을 털어놓아 수사에 협조한데다가
    그의 자세가 의연하여 수사관들을 감복시켰기 때문입니다.
    백선엽(白善燁)·김창룡(金昌龍), 그리고 저 세 사람이 연대보증을 서고 석방시켰지요.”


    趙甲濟   

    金昌龍(김창룡)이 살리자고 했다 -
    朴正熙(박정희) 수사책임자 金安一(김안일) 당시 특무과장
     
  • “朴正熙소령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남로당조직 명단을 털어놓아 수사에 협조한데다가 그의 자세가 의연하여 수사관들을 감복시켰기 때문입니다.
    백선엽(白善燁)·김창룡(金昌龍), 그리고 저 세 사람이 연대보증을 서고 석방시켰지요.”

    <1989년 12월 월간조선>
  


  白善燁(백선엽)의 최초증언
  
  • 白善燁씨(전 육군참모총장·숙군수사때 육군본부정보국장)는 최근에 출간된 회고록 「전쟁과 나」에서 이렇게 썼다.

    「숙군과정에서 중형이 선고된 군인 중 구명된 유일한 케이스가 있었다.
    그는 朴正熙소령이었다. 방첩대(CIC)의 수사반은 남로당 군사책인 李在福이 육군사관학교에 조직을 침투시켜 일부 중대장을 통해 생도들까지 좌익활동에 가담시킨 사실을 포착했다.
    사관학교의 좌익조직수사에서 용의자의 한 사람으로 체포된 사람은
    육사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했고 당시 육본작전교육국의 과장이던 박정희 소령이었다.
    숙군의 일단계 작업이 완결된 즈음인 49년 초 어느날 방첩대의 金安一소령이 나에게 『박정희 소령이 국장님을 뵙고 꼭 할 말이 있다고 간청하고 있으니 면담을 해주십시오』라고 전했다. 김소령은 아울러 박정희 소령이 조사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조직을 수사하는 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들어 꼭 만나 봐줄 것을 요청했다. 
      
    김소령은 나의 승낙이 있자 곧 박정희 소령을 나에게 데려왔다.
    내가 박소령을 면담한 곳은 정보국장실이었다.
     박소령은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한 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차림의 그는 측은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면담 도중 전혀 비굴하지 않고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평소 그의 人品(인품)에 대해서는 약간 알고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에서도 침착한 그의 태도가 일순 나를 감동시켰다. 
      
    『도와드리지요』 
      
    참으로 무심결에 이러한 대답이 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약 20분간의 면담을 마치고 그를 돌려보냈다. 
      
    당시 숙군작업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로버츠 군사고문단장도 간여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정보국 고문관 리드 대위로 하여금 참모총장 고문관 하우스맨 대위와 로버츠 준장에게 박소령의 구명에 관해 양해를 구하도록 했다. 동시에 이 문제를 육군본부에 넘겨 재심사를 요청했다. 육본은 채병덕(蔡秉德)총장에 의해 형집행정지 조치가 취해졌고, 이어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일이 마무리됐다. 
      
    나는 정보국 김점곤(金點坤) 소령과 유양수(柳陽洙)대위에게 얘기해 군인신분이 박탈된 박정희 소령을 문관으로 정보부에 근무토록 배려했다. (중략) 58년 그의 이름이 소장진급 대상자 명단에 끼여 경무대에 올려졌을 때 당시 참모총장이던 나에게 경무대로부터 연락이 왔다.
    곽영주(郭永周)경무관은 『박장군의 신원조회결과 과거 좌익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나는 『박장군에 대해서는 내가 보증한다』고 회신했다. 그는 무난히 소장에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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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씨의 이말은 「朴대통령은 과연 공산주의자였나」 「누가 朴正熙를 살렸나」 하는 수수께끼에 마침표를 찍을 만한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朴대통령을 구명했다』는 얘기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고, 『당신이 살렸는가』란 질문을 받았을 때 애써 부인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방첩대장의 증언
      
    白씨의 이 기록에 등장하는 방첩대의 金安一(김안일) 소령은, 1963년에 육군준장으로 예편하여, 그 뒤 목사로 변신, 지금(1989년)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에 살고 있다. 73세. 그를 만나 보았다. 
      
     『朴正熙가 나를 통해서 白국장을 만났다는데 그런 기억은 없고 朴소령 수사담당자인 金昌龍(김창룡)대위가 나를 찾아와 수사에 협조해준 朴대위를 살려주자고 해서 내가 직접 朴소령을 만난 뒤 金대위와 둘이서 白국장에게 구명을 건의한 기억은 납니다』

    金安一씨는 『朴正熙소령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수사에 협조했고, 수사간부들과 면담을 했을 때의 태도가 의연하여 우리 스스로가 살리자는 생각이 우러났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金씨는 『군내 남로당 조직의 핵심간부인 吳一均(오일균)도 수사에 협조했으므로 살리려고 했는데 상부를 설득할 수 없었다. 그도 아주 깨끗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말했다.
    金씨는 『그때는 죽이기보다 살리기가 훨씬 어려웠다』고 덧붙였다. 
      
    吳一均의 수사를 맡았던 당시 방첩과 수사관 李珍鎔씨(전 공화당의원)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를 전향시켜 놓으니 꼭 살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蔡秉德(채병덕)총참모장에게 찾아가 구명 탄원을 했더니 간부회의에 부쳤던 모양이에요. 결론이 나기를 여수·순천에서 너무 많은 희생자가 생겼으니 일벌백계로라도 살려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형당할 때도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습니다』

    吳一均과 朴正熙 두 장교는 절친했다고 전한다.
    朴正熙는 대통령이 된 뒤, 충북 청원군을 지나다가 어느 마을을 가리키더니 『저곳이 吳一均(오일균)의 고향인데…』라면서 감개무량해 하더라는 것이다. 
      
      ―朴소령이 골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습니까? 
      
      『골수 공산주의자는 붙들리면 신문관과 이론싸움을 벌이려고 합니다. 논쟁에서 설득당하면
    자백하겠다는 친구도 있지요. 朴소령은 그런 확신범도, 또 이론가도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조직을 자백한 朴소령을 데리고 다니며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까? 
      
      『데리고 다닐 필요는 없었습니다』 
      
      ―사관학교의 조직은 朴소령의 자백으로 일망타진된 것입니까? 
      
      『그런 면도 있고, 그 전에 잡힌 李在福(이재복)과 김종석(金鍾碩)의 비서 입에서도 많은 자료가 나왔습니다』 
      
      미군은 자료 갖고 있다
      
      ―그 때의 수사·재판자료는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하는데 1963년의 대통령선거 때는 야당에서
    朴대통령에 대한 구체적 주장을 했습니다. 
      
      『저는 전역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는데, 그 사상논쟁을 지켜보고 미군이 야당에 정보를 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수사할 때 중요 수사기록을 모두 영어로 번역하여 미 고문관에게 넘겼는데 그 파일이 보존돼오다가 이용되고 있는 것 같았어요』 
      
      ―朴正熙소령을 직접 신문하여 고문도 하고 한 사람은 육사5기생인 李漢普씨로 알려져 있는데…. 
      
      『李씨는 그때 조사과장이란 직책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사기술이 부족했어요. 피의자를 너무 우락부락하게 다루다가 팔을 분질러 놓곤 했지요. 日帝(일제)학병출신인데 기골이 장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원자탄이 떨어졌을 때 피폭당하여 치료를 받은 적도 있었고, 말년에는 거의 실명한 채로 생활했습니다』

    朴대통령 치하에서 그의 신문담당관이었던 李漢普씨가 박해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金씨는 『정보부에서 李씨를 회유하려고 했던 기억은 난다』면서 『나는 이때까지 입을 닫고 살았으니 무사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웃었다. 
      
      ―朴正熙소령도 많은 고문을 당했다고 하는데…. 
      
      『자술서를 써 수사에 협조했으므로 고문할 이유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최남근과 김종석은 조직을 불지 않아 고문을 많이 당했습니다』 
      
      ―남로당 조직에 있어서 朴正熙의 임무는 무엇이었습니까? 
      
      『특별한 임무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朴正熙소령의 상선(上線)인 李在福을 어떻게 체포했습니까? 
      
      『숙군 수사를 해보니 군내의 남로당 조직과 연결되는 외부 선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이 연결점 수사를 위해 잠복하고 있던 金昌龍(김창룡)팀이 수상한 사람을 검문했는데, 이 사람이 무엇을 갖고 있다가 입으로 삼켜버렸어요. 증거인멸을 한 셈인데, 이 사람을 데려가 아무리 고문하고 달래도 별다른 자료를 찾을 수 없었어요. 金昌龍이 저한테 찾아와 이상한 놈을 잡았는데 이제는 놓아주려고 한다면서 그래요. 제가 마지막으로 한 번 보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李在福(이재복)을 찾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수상한 친구를 세워놓고 제가 그 전에 붙들려 와 있던 군내의 남로당 거물 吳一均(오일균)중령을 옆방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제가 吳에게 바짝 붙어 서서 「저 친구가 李在福이지?」하고 넘겨짚었더니 吳의 얼굴이 상기되더군요』 
      
    金安一소령은 그때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 李在福에게 『당시도 목사이고 나도 기독교도이니 우리 서로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하자. 대답하기 곤란하면 대답을 하지 않아도 좋다』고 달랬다고 한다. 『저는 李在福에게 목사가 공산주의 활동을 한 데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느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는 한점의 부끄럼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도 깨끗이 죽었습니다. 李在福은 지금 표현대로 한다면 해방신학 비슷한 종교관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군의 의심이 5·16 재촉
      
    1963년 대통령선거 때 朴대통령 후보의 사상 前歷(전력)이 문제가 되자 정보부에선 고향에서 쉬고 있던 金安一씨에게 연락, 어느 신문에 기고하는 형식으로 해명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金씨는 「朴후보가 남로당에게 가입, 좌익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관계에 의해 의리상 그렇게 한 것이지 이념적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는 요지의 글을 써 주었으나 실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金安一씨는 朴正熙소장이 5·16쿠데타를 한 데는 그의 사상에 대한 미군의 의심이 중요한 작용을 했다고 믿고 있다. 1960년 4·19의거 뒤의 민주당 정권시절 朴소장은 최경록(崔慶錄)육군참모총장 밑에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있었다. 朴소장 바로 밑에서 차장으로 있었던 사람이 金安一 준장이었다. 
      
     『그때 미8군은 朴소장을 한국군부에서 제거하려고 애쓰고 있었어요. 가끔 미군에서 기습적으로 작전 참모부서에 들이닥쳐 한국방어계획 등 기밀서류의 보관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무슨 약점을 잡으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미군이 崔참모총장에게 압력을 넣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퇴근 무렵인데 朴소장이 총장실로 불려 들어가 오랫 동안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도 퇴근을 미루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깜깜해진 뒤에 朴소장이 나왔는데 의견충돌이 있었던 듯 얼굴이 벌개져 있어요. 
      
     저는 미군이 崔총장에게 朴소장에 관한 인사 압력을 넣었고, 崔총장이 그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 아닌가 짐작했습니다. 한참 있더니 朴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문제는 金형이 나서서 설명해 줄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 말은 내가 미8군 사령관한테 가서 朴소장이 지금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달라는 뜻이었습니다. 朴장군을 조사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잘 먹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영어도 할 줄 모르고 그렇다고 통역을 데리고갈 수도 없고. 그러다가 朴소장은 2군부사령관으로 전보돼 대구로 내려갔고, 거기서 5·16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朴소장은 군에서 추방당하기 전에 擧事를 해야 한다는, 쫓기는 기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李在福비서가 많이 털어 놓아
      
      ―단시간에 군내의 남로당 조직을 일소하려면 무리가 많이 따랐을텐데요. 
      
      『군내의 남로당 조직은 약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군대 분위기 때문에 경계심이 무디어져 半공개적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군대는 전출이 잦습니다. 남로당 세포 중에 한 사람이 전출가버리면 기능이 마비되기도 했습니다. 숙군 수사가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李在福의 비서가 잡혀 수많은 군내 세포명단을 불었기 때문입니다. 지방조직까지 불었습니다. 그는 육군장교였는데, 이 비서를 데리고 전국의 군부대를 돌면서 남로당을 찍으라고 했지요. 그대로 줏어 담는 수사였습니다. 사관학교내 조직이 알려져 朴正熙가 구속된 것도 이 비서의 제보 때문이었습니다』 
      
      『金鍾碩의 비서 鄭모는 대구의 목사 아들이었는데 처음에는 자백을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찾아와 기도를 같이 하면서 회개하도록 빌었더니 조직을 털어놓더군요』 
      
      李在福, 崔楠根, 金鍾碩, 吳一均, 朴正熙 등 5명은 남로당 군사부 조직도상의 핵심인물이었으나 이들 5명이 여순반란 사건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는 것이 定說(정설)로 되고 있다.
    여순 반란사건은 14연대의 남로당 세포가 독자적으로 일으킨 것이지 李在福(이재복)이 이를 지령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남로당 고위간부 朴甲東(박갑동)씨도 『여순 반란 사건이 났을 때 당 지도부는 대단히 당황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영남 유격사령관 朴正熙?
      
      ―숙군수사를 日帝 고등계형사와 헌병출신이 했다는 비판도 있는데…. 
      
      『숙군작업으로 특무과의 전문수사 요원들이 많이 필요하게 되어 경찰관들을 특채하게 되었습니다. 수도청 사찰과 형사들과 일제 헌병출신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노엽(盧燁. 조선군사령부원사헌병과 준위 출신), 이진용(李珍鎔.일제 경찰 출신), 장보형(조선군 헌병 출신), 장복성(일제 경찰 출신) 같은 이들이 이때 특무과로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사상범 수사 경험이 많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때 군은 두 가지 피난처 역할을 하였다. 하나는 경찰에 쫓기는 좌익인사들의 피난처, 또 하나는 북한공산세력과 반민특위에 쫓긴 일제 경찰·헌병 출신들의 피난처이기도 하였다. 
      
    여순반란사건 수사는 일제 경찰·헌병출신들이 군내의 좌익을 소탕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숙군수사의 실무책임자 白善燁 대령은 만군헌병출신, 일선수사의 선봉장 金昌龍대위도 관동군헌병 출신이었다. 盧燁씨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육사 제8기 특임반에서 간단한 교육을 받고 임관되었습니다. 일제시대 흥남헌병대에서 근무했던 김성하, 용산헌병대 조장 출신 최태화, 관동군의 헌병 하사관이었던 이옥봉, 청진 고등계 형사 출신인 고영섭 씨등이 나와 함께 특무과에 장교로 들어갔습니다. 1949년 1월의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맨 처음 한 일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돼 있는 숙군대상자들을 재심사하는 일이었습니다. 형무소가 꽉 찰 정도로 들어 있었는데 마구잡이로 구속된 이들이 숱했습니다. 조사관들도 사상관계에 전문지식이 없어 판별할 능력이 적었습니다. 우리가 수사를 하면서 골수 공산주의자와 억울한 피의자들을 구별하여 많은 이들을 석방시켜 주었습니다. 아마도 반 이상을 풀어주었을 겁니다』  

    盧씨는 85세 노인이 돼 지금(1989년) 서울여의도에서 살고 있다. 

      죽이기보다 살리기가 어려워
      
      ―金昌龍대위는 金安一 과장님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했습니까? 
      
      『그는 1연대 정보주임이었는데 저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고 독립적인 수사를 하였습니다.
    행정적인 처리는 저를 거쳐서 하였습니다. 朴正熙 등 육군 사관학교내 세포에 대한 수사를 金昌龍이 한 것은 1연대가 그 학교와 가까운 태릉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군 내부의 사상적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경찰이 수배한 좌익이 군으로 피신해 들어왔고, 이들 좌익이 충돌질한 탓도 있어 경찰과의 적대의식이 강했어요. 그때 장교들 사이에서는 군은 사상문제에서 무색투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돌았습니다. 이것은 사상이야 어떻든 군은 국가에만 충성하면 된다는 사조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순진한 발상이었다고 할까요』 
      
      ―숙군수사에 대한 군수뇌부의 생각은 어떠했습니까? 
      
      『꼭 살려야 할 사람은 살리기가 곤란했고, 꼭 잡아야 할 사람은 잡아놓기가 힘들었습니다.
    수사에 협조하여 이제는 풀어주어도 공산주의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사람을 살리자고 건의하면,
    위에서는 여순반란 사건 때문에 내 부하가 얼마나 희생되었는데 살려준단 말이냐고 하면서 난색을 표했고, 친한 부하를 구속시키려면,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변호를 해주고…. 
      
      강태무, 표무원 두 장교가 자신의 대대병력을 이끌고 월북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평소에 수상하여 내사를 하다가 공산주의 조직과 연루돼 있다는 증거를 잡고 구속을 시키려고 이응준(李應俊) 육군 참모총장에게 결재를 받으러 갔더니 그럴 리가 없다면서 영장에 서명을 해주지 않아요. 그러다가 월북 사건이 터지니 李총장은 오히려 白善燁국장에게, 「그것도 몰랐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제가 李총장이 결재를 거부했던 영장신청서를 가지고 白국장과 함께 총장에게 갔더니, 李총장도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고 즉석에서 사표를 쓰더군요. 
      
      군내의 남로당 거물 金鍾碩에 대한 수사는 미 고문관 하우스맨 때문에 어려웠습니다. 金중령은 하우스맨의 신임을 받고 있어 우리가 증거없이 영장을 신청했다가는 일이 틀어질 것 같았습니다. 일부러 정보를 흘려 金중령의 귀에 들어가도록 했더니 불안해진 金중령이 도망가버렸어요. 영장 결재고 뭐고 없이 아주 수월하게 그를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필동의 어느 절에 애인과 숨어 있었는데 현장을 덮쳐 많은 서류와 함께 붙들었지요. 남로당 조직에 관한 것도 있었습니다. 金중령을 잡아온 뒤에도 하우스맨은 그럴 리가 없다고 해서 대면을 시켰더니 그제야 납득을 하더군요』 
      
    金安一씨는 숙군수사의 선봉장격이었던 金昌龍이 군내의 좌익세력을 제거하는 데는 큰 공을 세웠지만 두 가지 단점이 있었다고 했다. 
      
      『하나는 공 앞에선 戰友(전우)가 없었다는 점, 또 하나는 이해관계가 틀리게 되면 공산주의자로 몰기를 서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숙군수사가 한창일 때 丁一權(정일권)씨가 저를 부르더니, 「창룡이가 나를 빨갱이라고 한다」고 어처구니 없어하더군요』 
      
    金安一씨는 『그러나 숙군수사가 없이 6·25를 맞았더라면 한국군은 내부 반란으로 조기에 붕괴했을 것이다』고 했다. 한 특무대 간부출신은 『1956년에 金昌龍특무대장이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朴正熙 장군의 쿠데타는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金이 李承晩(이승만)의 위광을 업고 군을 감시하고 있었다면 4·19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보다는 「金昌龍이 朴正熙 소령을 살려주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가 더욱 흥미있는 假想(가상)을 부를 것 같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