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신문도 놀랐을 한국 언론의 對北 사대주의

    북한의 도살자 3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중계하고
    무슨 반찬을 맛있게 먹었다는 식으로 써주는 기자들이
    국방부 앞에서 두달째 계속되는
    국군포로 탈북 자녀들의 애끓는 시위는 한 줄도 쓰지 않는다.

    趙甲濟    
      
    [北 최고위 3人 방문] 과묵한 황병서(인민군 총정치국장)… 자신감 넘친 최룡해(노동당 근로단체 비서)… 발언 많이 한 김양건(對南담당비서·통일전선부장)
      -조선일보의 제목이다.
     
      1면엔 한 시인의 기고문이 실렸는데 제목이 '감동의 인천, 聖火가 꺼진 자리엔 南北화합의 불꽃이…'다. '북한 최고위급 인사 3명이 참석함으로써 남북대화와 화해의 물길을 단숨에 트기 시작한 것이다'는 귀절은 아무리 문학이라고 해도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다.
    화해는 가해자가 사과하고 피해자가 용서해야 이뤄진다.

    요사이 한국 신문은 기사를 문학적으로(선정적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하면 남북관계를 규정하는 眞僞- 彼我-善惡구분이 모호해지고,
    현실을 도외시한 '우리민족끼리'라는 원시적 감정에 압도당하여 安保의 울타리를 허문다.
     
      동아일보는 32면중 8개 면을 독재정권 3인방의 행적을 미주알고주알 보도하는 데 바쳤다.
    남북통일이 된 것도 아니고, 北이 核을 포기한 것도, 국군포로를 돌려준 것도 아닌데,
    마치 개선장군이 돌아온 듯한 紙面(지면) 배분이다. 제목도 기가 막힌다.
     
      '고립탈피-건재 과시 김정은 式 깜짝쇼'
      '北 "오솔길 냈으니 이젠 대통로 열어가자'
      '김관진 "요즘 南선 소주 폭탄주 마셔", 김양건 "25도 보해 아직 있나"'
     
      북한 노동신문 편집자들은 이런 한국 신문을 읽고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한국 언론의 선동체질은 세월호 보도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는데
    황병서 방문 보도에서 그 실력이 또 다시 드러났다.
     
      스포츠를 선전장으로 이용한 이 3인은 작년 장성택을 무자비하게, 反문명적으로 처형한 범인들이다. IS를 능가하는 人類(인류)의 암덩어리 김정은 학살정권의 핵심이다. 조폭보다도 못한 윤리의 소유자들이다. 보수언론까지도 스포츠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이들의 무례한 방문을 비판 없이 무슨 경사가 난 듯이 보도하였다. 한국 언론은, 핵문제 해결 없이, 인권문제의 해결 없이, 천안함 폭침에 대한 사과 없이 남북관계가 진전될 수 없음에도 이 3인방이 무슨 평화의 사도나 된 듯이 보도하였다. 북한이 억류한 국군포로가 6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500명이 생존해 있다. 이들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내 본 적도 없는 정부나 언론, 이들을 우습게 보는 북한정권의 모습이 이번에 또 斷面的(단면적)으로 드러났다. 北의 對南공작은 혼이 빠진 한국 언론에 의하여 성공한다.
     
      이럴 때마다 등장하는 게 '해외 언론 일제히 보도'라는 제목이다. 해외 언론에서 일제히 보도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국내 언론은 국내 문제도 엉터리로 보도하는데 해외 언론이 일제히 보도하면 무슨 좋은 일이 생기는가?
     
      국제경쟁을 해본 적이 없는 분야는 후퇴하고 국제경쟁을 하는 분야는 先進(선진)한다. 국제경쟁을 하는 기업, 스포츠, 과학은 先進이고 국제경쟁 대신 국내경쟁만 하는 국회, 언론은 後進(후진)이다. 국제경쟁을 하는 인천공항은 一流(일류)이고, 그럴 필요가 없는 서울역은 불결하다. 대한항공의 機內(기내) 서비스는 세계1등이고, KTX의 특실은 일본 신칸센의 보통실보다 못하다.
     
      국내에서만 큰 소리 치고, 해외에선 절절 기는, 그리하여 위험한 지역 취재는 한사코 피하는, 골목대장 같은 한국 언론은 조선조를 쇠락시킨 위선적 명분론의 전통을 이어 가는 守舊(수구)세력의 한 축이다. 守舊의 핵심은 위선적 명분론과 노예근성과 사대주의이다.
     
      노예근성은, 중국과 북한정권을 대하는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李承晩과 朴正熙를 독재자로 몰면서 죽은 김일성에겐 주석, 죽은 김정일에겐 국방위원장이라는 호칭을 여태 쓴다. 민족반역자의 생일을 '태양절'이라고 보도하는 정신 나간 기자들도 있다. '故김정일 국방위원장 추모'라는 말이 국영방송을 탄다. 동맹국을 反국가단체보다도 홀대하는 '北美'라는 표현도 한다. 중국에는 비겁하고 미국엔 악랄하다. 착한 사람에겐 잔인하고 악하고 강한 자에겐 부드럽다.
     
      위선적 명분론인 한글전용의 포로가 되어 박근혜 대통령의 本名인 朴槿惠는 무시하면서, 시진핑의 本名인 習近平은 친절하게 써준다. 毛澤東을 우리 식으로 '모택동'이라 하면 될 터인데, 중국인을 흉내 내어 '마오쩌둥'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억지를 부린다. 다 사대주의적 DNA의 발로이다.
     
      노예근성의 한 특징은 줏대가 없고 자주적 관점이 부족하여 늘 힘 센 사람의 눈치를 본다는 점이다. 동시에 惡(악)에 대한 응징과 敵(적)에 대한 복수를 모른다. 정의감이 없어 제대로 화를 낼 줄도 모른다. 主見이 없으니 늘 時流(시류)에 휩쓸린다. 북한의 도살자 3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중계하고 무슨 반찬을 맛있게 먹었다는 식으로 써주는 기자들이 국방부 앞에서 두 달째 계속되는 국군포로 탈북 자녀들의 애끓는 시위는 한 줄도 쓰지 않는다.
     
      이런 언론을 무시하고 경멸할 줄 모르는 사람은 국가 지도자가 되어선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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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한 취재를 회피하고,
    국민들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든다.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언론인보호위원회(Committee to Protect Journalists)의 통계에 따르면 1992년 이후 현재까지 취재중 피살된 기자는 세계 전체에서 1072명이다. 피살된 지역 통계에 따르면 이라크가 166명으로 가장 많다. 이어서 필리핀 76명, 시리아 67명, 알제리 60명, 러시아 56명, 파키스탄 54명, 소말리아 53명, 콜롬비아 45명, 인도 32명, 멕시코 30명, 브라질 29명, 아프가니스탄 26명, 터키 21명, 스리랑카 19명, 보스니아 19명, 타지키스탄 17명, 르완다 17명,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16명, 시에라 레온 16명, 방글라데시 14명이다.
      
       피살될 때의 취재 대상은 정치가 45%, 전쟁이 38%, 부패가 22%, 인권문제가 19% 순이었다. 한국에선 한 명의 기자도 피살되지 않았다. 한국인 기자도 全無(전무)하다. 일본 기자는 6명이 죽었다. 1072명 중 한국인 기자가 한 사람도 없는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위험 지역이나 위험한 취재를 피한 것, 또는 총알을 피해다니는 비상한 재주가 있거나. 한국전과 월남전에서도 한국 기자는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 한국에선 기자가 戰場(전장)에 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랑이 된다. 군인이 戰場에 갔다고 유명해지는 셈이다.
      
       몇년 전 시리아 內戰을 취재중이던 일본의 <저팬 프레스(Japan Press)> 소속 女기자(야마모토 미카·山本美香)가 정부군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그는 다른 일본기자 한 사람과 함께 격전중인 알레포에 잠입하였다가 참변을 당하였다. 야마모토 미카 기자는 직전에 NHK와의 인터뷰에서 ‘누군가가 기록을 하면 그 분쟁은 빨리 끝나거나 확대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을 갖고 분쟁지역 취재를 계속해 왔다’고 말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딸은 전쟁중인 나라의 어린이들과 여인들이 겪는 고통을 꼭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사실보도에 목숨을 건 그의 숭고한 기자정신과 위험지역을 피해다니는 한국 기자들의 자세가 비교된다.
      
       한국의 돈 많은 언론사가 기자를 常駐(상주)시켜서 보도해야 할 분쟁지역이 있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그리고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우크라이나의 內戰 현장이다. 특히 애국자의 후손인 문창극 씨를 친일파로 몬 문제 기자들을 이런 곳에 보내 외국 기자들로부터 취재의 원칙과 기자의 윤리를 배우도록 해야 할 것이다.
      
       위험한 취재를 기피하는 기자들에게 선동, 조작, 편향은 제2의 天性(천성)이 되고 있다. 용감할 수 없으면 부지런하기라도 해야지, 언론은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을 전하는 데는 게으를 뿐 아니라 편향된 시각을 개입시켜 국민들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든다.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親러叛軍(반군)에 의한 말레이시아 여객기 격추사건보다 유병언 기사를 한 백 배 이상 더 길게, 더 크게 다루는 것은 正道(정도)가 아니다. 한국 언론은 감정적 反日 보도로 韓日관계나 일본에 대하여 왜곡된 정보를 국민들에게 전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한국 정부와 언론의 비판에 의하여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다는 식의 해석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한국 언론은, 세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 중 한국과 관련된 것만 가려내 과장하는 습성이 있다. 일본으로 들어간 韓流(한류)만 이야기하고 한국으로 들어온 日流(일류)는 무시한다. 균형이 잡히지 않는 정보를 常食(상식)하면 편견을 가진 사람이 된다.
      
       뉴스의 크기를 재는 尺度(척도)의 보편성이 약하다. 사소한 국내기사를 키우고 중요한 국제기사를 무시하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특히 외교, 안보엔 무관심하고, 정치, 수사, 스캔들, 폭로에 치중한다. 이러다가 보니 한국 언론을 통해서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한국 언론은 교양과 이혼하였다. 시청률과 구독률의 포로가 되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저질 보도를 量産(양산)한다. 좋은 책 소개란이 없고, 정신을 풍성하게 만드는 人文的(인문적)내용이 약하다. 살벌하고 메마르고 가파른 紙面(지면)과 화면이 국민들의 정서를 사막화시키고 있다.
      
       이런 위기의 근본은 기자들이 憲法(헌법)과 文法을 輕視(경시)하거나 무시한다는 점이다. 기자들이, 국가와 국민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데 언론의 특권을 악용하고, 한글專用(전용)으로 한국어를 반신불수의 言語로 만들었다. 많은 은퇴 언론인들이 요사이 “내가 기자를 했다는 것이 부끄러웠던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지금 약 2만 6000명의 기자들이 누리는 언론자유는 선배 기자들이 권위주의 정부 및 日帝(일제)와 싸워서 쟁취한 것인데, 이를 공짜로 즐기면서 고마움도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 특단의 自省(자성) 노력이 없다면 한국은 이런 언론 때문에 쇠퇴할 것이다. 언론 때문에 기회가 오더라도 통일을 하지 못하고, 매일 쏟아내는 저질 정보 때문에 결국 국민들의 분별력도 파괴될 것이다. 선동이 체질화된 한국 언론의 정상화 없이는 정치의 정상화도, 나라의 정상화도, 국민의 정상화도 불가능하다.
      
       2만 명이 넘는 기자들이 매일 쏟아내는 불량 정보를 상시적으로 偏食(편식)하면 국민의 정신건강은 망가질 수밖에 없다. 언론으로 흥한 나라가 언론으로 망할지 모른다. 개화기의 선각자 李承晩(이승만), 徐載弼(서재필)은 언론인이었다. 그 후배들 중 상당수가 흥신소나 루머센터 소장 역할을 하고 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