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圓仁(원인)의 入唐求法巡禮行記(입당구법순례행기)를 읽고 감동하다"
  • 원인의 동상ⓒ여수향토문화백과
    ▲ 원인의 동상ⓒ여수향토문화백과


  • 조갑제 대표ⓒ
    ▲ 조갑제 대표ⓒ

    일본 天台宗(천태종)의 大成者(대성자)인 圓仁(원인/일본 발음은 엔닌)은 서기 838년7월부터 847년 초겨울까지 唐(당)에 들어가 불법을 배우기 위한 고난에 찬 순례를 했다.
    이 여행기록 <入唐求法巡禮行記>(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唐(당)과 일본을 오가면서 국제무역을 하던 해상왕 張保皐(장보고) 등 신라인의 해외 활동이 잘 적혀져 있다.
    장보고를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이 여행기는 日記式(일기식)이다.
    중국 천지를 걸어서 다니면서 체험한 민중의 삶은 생생하다.
    圓仁(원인)은 주관적인 감상을 극도로 절제하면서 아주 세밀하게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적어놓았다.
    일본인의 기록정신이 이런 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司馬遷(사마천)의 <史記>(사기)를 읽는 느낌이 든다.
    절제된 동양식 문장이다. 

  • 원인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 있는 복사본이다.ⓒ두산대백과여수향토문화백과
    ▲ 원인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 있는 복사본이다.ⓒ두산대백과여수향토문화백과


       
    圓仁의 이 여행기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현장법사의 <大唐西域記>(대당서역기)와 함께 세계 3大 기행문으로 꼽힌다.
    <중심>에서 출판하고 金文經(김문경)씨가 譯注(역주)를 붙인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등장 인물의 거의 절반이 唐(당), 일본인이 아니라 신라인이다.
    圓仁이 9년 동안 唐에서 공부하고 여행하는 데, 그리고 귀국하는 데 在唐(재당)신라인들의 도움이 컸다.
    그는 신라인의 唐內(당내) 집단거주지나 연락망, 특히 張保皐(장보고)가 산동반도에 세운 기지인 赤山(적산)법화원의 큰 도움을 받았다.
     
    신라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의 여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譯注者(역주자) 金文經(김문경)씨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 이 신라인들이 세계무역사의 새로운 단계인 동서해상교역의 초기단계에 가담하고 그 주인노릇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신라인들은 마치 아라비아 페르시아 상인들이 지중해나 중동의 해안에서 수행하였던 것과 같은 역할을 동쪽의 세계에서 그것도 前者(전자)에 비해서 훨씬 위험한 해상에서 앞장서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세계의 교역은 종전의 唐(당)을 중심으로 한 조공무역에서 민간이 주도하는 교역체계로 그 내용이 바뀌어갔다.
    이와 같은 동아시아 무역의 질적 변화를 가져오게 한 주인공들이 바로 신라 무역상인들이다.>

    이 여행기에서 圓仁(원인)은, [주인은 도적의 마음으로 사람을 재어보았다](主人賊心算人)라고 쓰는 등 자신이 접했던 인물들의 평을 자주 했다.
    그는 신라인들에 대해서는 한번도 험담을 하지 않았다.
    그가 묘사한 신라인들의 언동은 감동적이다.
    신라인들은 이 일본 高僧(고승)에 의해서, 唐에서 당당하고 정직하게 살면서 일을 정확히 하고 친절하고 의리있는 사람들로 그려져 있다.
      
    그가 唐(당)의 관리들과 하는 일은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데 在唐(재당) 신라인과 하는 일은 척척 돌아간다.
    신라인들은 唐內(당내)에 거점과 인맥을 잘 만들어두었고 정보에 밝으면서 책임감이 강한 것으로 나온다.
    장보고의 唐內 네트워크가 강했고 신라무역상들이 우수한 항해술을 근거로 하여 당-신라-일본을 연결하는 서해, 남해의 해상항로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책을 통하여 확인된다.

    圓仁(원인) 일행이 9년간의 순례여행을 끝내고 신라 배를 타고 귀국하게 되는 과정, 그 동안 수집했던 불교 典籍(전적)들을 신라인에게 맡겨두었다가 불교탄압의 와중에서도 고스란히 돌려받는 이야기, 장보고의 부하 張(장)대사가 圓仁을 무사히 귀국시키기 위하여 배를 짓는 이야기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더구나 당시 일본은 신라를 敵國(적국)으로 간주, 항해중 신라 영해로 표류하여 들어갈까봐 경계하던 시절이었다.
    신라인들은 敵國(적국)의 승려를 동족 대하듯이 한다.

    <張대사는 지난 해 겨울부터 배를 만들기 시작하여 금년 2월에 이르러 일을 마쳤다.
    오로지 우리를 실어 떠나보내어 귀국시키고자 함에서였다.>

    그러나 누군가 張대사를 모함하는 신고를 唐(당)의 관청에 하는 바람에 張대사가 만든 배를 탈 수 없었다.
    圓仁은 중국의 남부 항구 明州(명주)로 가서 거기에 와 있는 일본 배를 타고 귀국하기로 한다.

    <접대중인 張대사는 20리를 배웅해와서 비로소 헤어졌다.>

    圓仁은 또 신라 배를 이용한다.

    <신라사람 진충의 배가 숯을 싣고 초주로 가려는 참에 만났는데 배 운임을 의논하여 그 삯을 비단 5필로 정하였다.>

    <초주에 도착하니 신라坊의 총관인 劉愼言(유신언)이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우리를 맞아주었다.
    비로소 명주에 있던 일본인은 이미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劉(유)대사에게 부탁하여 이곳에서 출발하여 귀국할 수 있도록 도모해주기를 청하였다.>

    <신라사람 金珍(김진) 등의 서신을 받았는데 이르기를,
    [5월11일 소주의 송가구로부터 출발하여 일본국으로 갑니다.
    21일을 지나 내주 관내의 노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일본국의 스님들이 지금 등주의 적산촌에 머물고 있으니 그곳으로 가서 그들을 만나 배에 태우고자 합니다.
    그런데 전일 노산을 떠날 즈음에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 스님 등은 이미 남주로 가서 일본국으로 가는 본국선을 찾아 떠났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바로 노산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반드시 배를 타고 오십시오]
    라고 하였다.>

    <노산으로 가는 배편이 있어 편지를 써서 김진 등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이곳의 소식을 알리고 특별히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였다.
    그 뒤 다시 노산을 향하여 바다를 건너고자 여행 식량을 준비하였다.
    초주의 신라인 劉(유)총관이 모든 일을 맡아주었다.
    전 총관인 薛詮(설전)과 등주 張대사의 동생인 張從彦(장종언), 그리고 어머니 등 모두가 배웅하였다.>

    <김진 등의 배를 찾을 수 있었다.
    배에 올라 떠났다.
    등주 관내에 이르러 배를 정박하였다.
    張詠(장영 대사)이 배로 올라와 만났다.>

    <張대사가 보낸 송별의 물건을 받았다.
    적산포로부터 바다를 건넜다>

    <날이 밝을 무렵 동쪽으로 산들이 있는 섬을 보았다.
    높거나 낮거나 하여 이어져 있었다.
    뱃사공 등에 물었더니 [신라국의 서부, 웅주(공주)의 서쪽 땅]이라고 했다.
    본래 백제의 땅이다.
    하루종일 동남을 향해 나갔다.
    산과 섬이 연이어서 끊이지 않았다.
    밤10시가 가까워질 무렵 고이도(전남 신안군 하의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구초도(전남의 거차군도 중 한 섬)에 도착했다.
    섬지기 한 사람과 매를 키우는 사람 2명이 배 위로 올라와서 이야기하기를,
    [나라는 편안하고 태평합니다.
    지금 당나라 칙사가 500명을 이끌고 경주에 와 있습니다.
    4월중에 일본 대마도의 백성 6명이 낚시를 하다가 표류하여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무주의 관리가 잡아 데리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병으로 죽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서남 방향에는 멀리 탐라도가 보인다.
    신라국의 동남쪽에 이르러 큰 바다로 나아갔다.
    동남쪽을 바라보고 갔다.>

    <날이 밝을 무렵 동쪽으로 멀리 대마도가 보였다.
    정오경에 전방에 일본국의 산들을 보았다.
    오후 8시 무렵이 되어 히젠국 마쓰우라군 북부 시카시마에 도착하여 정박하였다.>

    험난한 귀국과정의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다가 圓仁(원인)일행이 唐(당)에서 수집한 많은 서적을 싣고 한반도의 서해안-남해안을 거쳐 일본에 무사히 도착하는 장면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안도가 되었다.
    마치 내가 1200년 전으로 돌아가 劉愼言(유신언), 張(장)대사 등 신라인이 되어 圓仁일행을 무사 귀국시키기 위해서 노삼초사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國境(국걍)을 초월한 인류애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에 등장한 신라인들의 정보망, 基地網(기지망), 우수한 항해술, 정확한 업무자세는 왜 통일신라가 민족사 최초의 一流(일류)국가였는가를 웅변해준다.
    一流국가는 一流국민으로 구성된다.
    9세기 신라인들이 보여준 품격이야말로 신라의 國格(국격)이었을 것이다.
      
    圓仁 또한 일본의 천태종을 발전시킨 國師(국사)가 되었고, 그의 여행기에 신라인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하여 그 뒤 사람들이 신라와 張保皐(장보고)의 對外(대외) 활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제1 가는 자료가 되도록 하였으니 이야말로 국경을 넘어선 報恩(보은)이 아니겠는가.
      
    圓仁(원인)의 여행기를 영문으로 번역 출판하면서 <圓仁의 唐代(당대) 중국 여행>이란 책을 냈던 前(전) 주일미국대사 라이샤워도 신라에 감탄했다.

    <당시의 한국(신라)은 지리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적으로도 이미 오늘과 같은 나라였다.
    같은 민족, 언어, 국경을 가지고 한국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있는 나라는 중국뿐이다.
    한국에 필적할 만한 소수의 국가群(군) 속에 일본이 들어 있다.>

    신라통일을 가능케 했던 것은 羅唐(나당)동맹이었다.
    신라인의 해외 활동은 세계제국 唐의 제1 동맹국이었다는 데서 가능했을 것이다.
    1945년 이후 한국인의 활동무대가 신라인을 닮아 세계로 넓어질 수 있었던 것도 韓美(한미)동맹 덕분이었다.